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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212화 (213/222)

212 황제(4)

레온 클로딘은 총명하고 신실하며 영리한 아이였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치고, 궁금한 게 생기면 꼭 알아내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호기심이 왕성했다.

또한 그는 정이 너무 많고 욕심이 없는 아이였다.

이는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좋은 덕목일지도 모르지만, 모두의 위에 서는 군주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군주는 때로는 냉정하고 비정해야 오히려 아랫사람들이 편하다는 것을 레온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별로 상관없는 일이기도 했다.

레온은 황위에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그에게는 탐나는 자리도 아니거니와 위의 두 이복형의 세력이 너무 탄탄했던 것도 있다.

차이가 너무 심했다.

황태자와 2황자.

둘 중 하나가 차기 제국을 이끄는 황제가 될 것이라는 건 명확했다.

하지만 그런 압도적인 세력 차이 덕에 역설적으로 레온과 레아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황태자와 2황자는 레온의 능력을 높이 샀다.

그들은 언젠가 자신이 황제가 되면 레온을 제국을 위해 중히 쓸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어찌 되든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레온은 위의 두 형이 싫었다. 왜지 모르게 풍기는 그 음험함이 껄끄러웠다.

그래서 누가 황제가 되든 신경 쓰지 않았다.

레온에게 중요한 건 오직 친동생인 레아뿐이었다.

레온은 그저 레아와 즐겁게 살 수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하지만 운명은 레온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어느 날. 야심한 밤. 레온은 홀린 듯이 정원에 나섰다.

하늘에는 보름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크고 밝게 떠 있었다.

레온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돌연. 보름달이 한번 번쩍이더니 새하얀 섬광이 레온을 덮쳤다.

두 눈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끄아아악!”

갑작스럽게 통증이 덮쳐왔다.

마치 두 눈을 불에 달군 쇠로 지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끔찍한 통증이었다.

레온은 눈을 부여잡은 채 바닥을 뒹굴었다.

눈에서는 피눈물이 쉼 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렇게 한참을 뒹군 끝에 마침내 통증이 잦아들었다.

레온은 조심스럽게 두 눈을 떴다.

우려와 달리 시력을 잃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니. 레온은 오히려 그 전보다 더 많은 걸 볼 수 있었다.

“아아…….”

그의 눈앞에는 불타는 황궁이 펼쳐졌다.

흉측하게 생긴 악마의 군대는 백성들을 산채로 뜯어먹었으며, 곳곳에 비명과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그리고 레온은 보았다.

지금보다 성숙한 모습의 레아가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악마의 아가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걸.

그 끔찍한 장면은 몇 번이고 되풀이되고 나서야 레온을 놓아주었다.

“하아. 하아.”

레온은 눈물을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대체 무엇을 본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환상? 아니다. 환상이 아니다.

레온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가 본 이 환상들은 머지않은 미래에 벌어질 일이라는 것을.

‘이대로 가다가는 세상이 악마에게…… 안 돼. 절대로 안 돼.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지?’

레온은 필사적으로 고민하며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어떻게든 이 사실을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을.

마침 다음 날 아침에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레온은 황궁의 복도를 급하게 걸었다.

지나가던 기사들과 귀족들이 그런 레온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도 활기차 보이시는군요! 하하.”

“저하. 이른 아침부터 어디 가십니까?”

“제가 도울 게 없겠습니까?”

레온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세상 친절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는 그들에게서 비웃음과 냉소가 전해져왔다.

어젯밤 갑자기 생긴 능력은 미래를 보는 것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사람 좋은 척은 다 하더니, 속으로는 세력이 약한 나를 비웃고 있었구나.’

레온은 분노와 충격으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하지만 그는 영리한 아이였다.

레온은 평소와 다름없이 해맑은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도착한 회의실. 이미 자신의 두 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 왔구나 레온.”

“어서 앉아라. 밥은 먹었느냐?”

“……네. 먹고 왔습니다.”

적당히 대답하며 레온은 그 둘의 속마음을 들여다보았다.

‘나한테는 아무 관심이 없구나.’

둘은 오로지 서로만을 신경 쓰고 있었다. 황위를 물려받는 것 외에는 아무 관심 없는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착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욕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편이 낫다.

레온은 둘에게서 신경을 끄고 조용히 호흡을 골랐다.

‘미래를 바꿔야 한다.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게 할 수는 없어. 그러려면…… 폐하밖에 없다.’

온 대륙에 영향을 끼치는 제국의 통치자라면 분명 방법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황제를 어떻게 설득하느냐다.

갑작스럽게 악마 이야기를 하려면 자신에게 특별한 능력이 생겼다는 걸 설명해야 하는데…….

그때. 문이 열렸다.

치열하게 고민하던 레온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오셨습니까. 폐하.”

“오셨습니까.”

“좋은 아침이구나.”

황제가 천천히 회의실 내로 들어왔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고 당당한 모습은 절로 사람의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황태자와 2황자는 곧바로 예를 표했다. 하지만 레온은 너무 놀라 그럴 수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사람의 마음이…….’

황제의 마음은 악에 물들어있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사악하고 끔찍한 영혼.

자신의 아버지라는 자가 이런 인물임을 깨닫는 건 커다란 충격이다.

이런 사람이 만인의 위에 서 있었다니.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어린 레온은 너무나 두려웠다.

“레온. 몸이 좋지 않은 것이냐.”

그 중후한 목소리에 레온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멍하니 있을 시간이 아니었다.

레온은 황급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어젯밤 늦게까지 책을 읽느라 피로가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허허. 지식을 탐구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네 나이 때는 충분한 수면이 필수란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레온이 고분고분 따르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황제가 말했다.

“내 오늘 너희들을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보여줄 것이 있기 때문이다.”

“보여줄 것. 말씀이십니까?”

황태자의 반문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황족 중에서도 일부에게만 전해지는 황가의 비밀이지.”

황가의 비밀.

그 단어에 황태자와 2황자가 침을 꿀꺽 삼켰다.

황제가 이어 말했다.

“레온, 너에게도 보여줘야 하나 고민했지만 너는 영리한 아이니 괜찮겠지. 그럼 따라오거라.”

황제가 손짓하자, 회의장의 한쪽 벽이 좌우로 갈라지며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드러났다.

황제와 형제들이 그 계단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레온은 조금 뒤에 서서 황급히 그들을 따라나섰다.

어두컴컴한 계단을 얼마나 내려갔을까.

넷은 마침내 널찍한 지하 공간에 닿았다.

‘여긴…….’

비밀스러운 공간이 많은 황궁이지만 이렇게 넓은 곳은 드물었다.

신기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레온은 한 곳에 시선을 멈췄다.

칠흑의 갑옷을 입은 기사가 자리에 앉아 거대한 대검을 손으로 짚고 있었다.

‘흑기사!’

레온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황제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강함과 악함.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느껴지는 강한 동질감에 말문이 막혔다.

황제는 그런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래. 너희도 알겠지만, 이게 바로 흑기사다. 대륙의 공포. 그 적수를 찾기 힘든 강력한 기사.”

황태자가 두려움을 숨기며 물었다.

“흑기사는 악마와 다름없는 괴물이 아니었습니까?”

“교단에서는 그렇게 주장하더구나. 하지만 틀렸다. 이 강대한 기사는 바로 우리의 선조다. 직접 악마를 처단한 위대한 인물이지.”

악마를 처단한 영웅이라니. 이번에는 2 황자가 당황해 물었다.

“그, 그런 분이 왜…….”

황제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나도 정확히 모르겠구나. 이자는 나중에 대륙이 위험에 빠지면 깨우라 이르고 긴 잠에 빠져들었다. 무언가의 속죄를 한다고 했는데…… 하지만 이만한 힘을 그냥 놀려 두고 있는 건 너무 아깝지 않으냐?”

황제가 흰 이를 드러내며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기나긴 노력과 투자 끝에 마침내 황가는 황제의 말에 복종하는 꼭두각시를 만들어냈다! 일국의 제일가는 강자들이 달려들어도 막아내지 못할 만큼 강력한 꼭두각시를! 자, 어떻게 생각하느냐?”

“……!”

레온은 경악했다.

이건 미친 짓이었다.

악마를 물리친 영웅이자 선조를. 심지어 후대를 위해 잠에든 숭고한 자를 이런 식으로 대우하다니.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불경이었다.

‘인간으로서 이런 짓을 할 수 있다니.’

레온은 서둘러 형제들을 살폈다.

비록 마음에 안 들어도, 그들 역시 레온과 비슷한 반응일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건…… 정말이지 굉장하군요.”

“가끔 교단 놈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겠어요. 정적을 처리하는 데도 좋고요.”

그들의 눈동자를 빛낸 건 경악도 충격도 아닌, 탐욕이었다.

만약 자신들이 황제가 된다면 흑기사를 어떻게 써먹을지 궁리라도 하는 모양이다.

레온이 자랑스러워하던 황가의 핏줄은 이미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레온은 그 뒤로 지하실을 나섰다. 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정원의 수풀 속에 주저앉았다.

새로 알게 된 황제와 형제들이 실체는 역겹기 그지없었다.

“안 돼. 만약 저놈들이 계속 제국을 통치한다면…….”

이대로 미래는 저래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수는 하나다.

‘내가 황제가 된다?’

단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일이다. 영리한 레온은 알았다. 세력이 뒤처지는 자신이 황제가 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무거운 의무를 짊어진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이대로 도망치는 게 차라리 남은 짧은 생이라도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거다.

그게 옳다.

하지만…….

‘레아. 아무것도 모르는 그 아이는…….’

악마에게 잡아먹히던 레아의 모습이 머릿속에 단단히 틀어박혀 자꾸 레온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만약 여기서 외면해 버린다면, 그 미래의 환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겠지. 나는 평생 죄책감과 불안감 속에 살 테고.’

쉽사리 결정할 수 없었다.

레온은 황궁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걸었다. 그간 알고 지냈던 사람들을 찾아가 만났다.

그렇게 하면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을 볼 때마다, 레온의 상처만 더 늘어났다.

결국, 늦은 밤이 되어 레온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레아의 방이었다.

레아의 방 앞에서 잠시 심호흡한 레온은 긴장한 채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인기척이 느껴지자 고개를 든 레아가 맑게 웃으며 외쳤다.

“오라버니!”

“……레아.”

레온은 안심했다. 레아는. 레아만큼은 진실되게 레온을 좋아해 주었다.

레아는 곧 레온을 보며 재잘대기 시작했다.

주로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다.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갑작스럽게 생겨난 능력으로 인해, 모든 게 변해 버렸다.

어린 레온은 힘든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앞으로 펼쳐질 날들도 오늘보다 덜 힘들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와중, 변치 않은 레아의 모습은 레온에게는 마치 구원과도 같았다.

‘그래. 도망쳐서는 안 돼.’

비로소 레온은 결심을 내릴 수 있었다.

레온은 레아의 어깨를 붙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레아. 할 말이 있다.”

“으응?”

레온은 미래를 엿보며 레아가 해야 할 일들에 관해 설명했다.

솔직히 말해, 레아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모든 걸 자신이 짊어질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어리광을 허락하지 않았다.

“레아. 어린아이로 있을 시간은 끝났어.”

그건 레아에게 말하는 것인 동시에,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총명하고 신실하며 영리한 아이는 이제 이곳에 없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건 냉정하고, 능력 있으며, 야욕이 넘치는 황제다.

레아가 스르르 잠들 때까지 다독여주던 레온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내가 미래를 바꾼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그리고 레아를 구하기 위해.

레온은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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