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황제(5)
레온은 다음날부터 차근차근 싸움을 준비했다.
‘아직 내 뜻을 드러낼 때가 아니야.’
지금 레온에게 있는 단 하나의 유리한 점은, 바로 황제와 형제들이 레온이 적이라는 걸 인식하지조차 못했다는 것.
그 방심을 제대로 찌르는 것만이 유일무이한 기회였다.
우선 레온은 천천히 사람을 물색했다.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그를 도울 세력이 필요했다.
믿을 수 있고, 능력 있으며, 마음이 고결한 사람.
당연히 그런 사람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력이 없고 황위와는 너무나 먼 자신이라면 더더욱.
‘조심해야 해. 한 번이라면 실패하면 끝이야.’
레온은 은밀하게 황궁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마음속을 살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조건에 부합하는 이는 없었다.
황궁의 특성상 능력은 뛰어날지라도, 대부분은 황태자나 2황자와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레온은 끈기를 가지고 수색 범위를 점점 범위를 넓혀나갔다.
그렇게 약 한 달간을 돌아다녔고, 마침내 황궁 내의 마법연구부에까지 발이 닿았다.
사실. 레온은 마법사들을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특별한 힘을 다루는 그들은 성격이 특이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가릴 처지가 아니야.’
레온은 마법을 견학하고 싶다는 구실로 마법연구부의 건물을 돌아다녔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레온의 눈에 들어오는 인물은 없었다.
실망한 레온은 그대로 발을 돌려 건물 밖으로 나가려 하는 그때…….
“오. 이거 레온 저하 아니십니까? 많이 크셨군요. 갓난아기였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음?”
뒤를 돌자 보이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
몹시 피로해 보이는 노인은 한 손에 두꺼운 책을. 다른 손에는 찻잔을 들고 있었다.
레온은 상대가 누군지 기억해냈다.
‘오테르!’
대현자라 불리며, 공간 마법이라는 마법의 새 지평을 열어낸 위대한 마법사.
그가 현재 자신의 연구실에 틀어박혀 마법 연구에만 매진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레온은 곧바로 오테르의 마음을 살폈다.
너무나 깨끗한 순백의 영혼.
레온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찾았다!’
그가 원하던 조건에 딱 들어맞는 인물을 찾아냈다.
오테르는 초인의 반열에 든 강력한 마법사이며, 레온의 형제들과도 연이 없었다.
이제야 제대로 일이 풀리는 느낌에 레온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의아해하던 오테르도 허허 웃으며 말했다.
“견학이라도 오신 겁니까? 이 주일 만에 밖으로 나와서 딱 저하를 마주치다니. 이거, 운이 좋군요.”
“응. 그렇소. 운이 아주 좋소.”
“음?”
“얘기할 게 있소. 오테르.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오.”
“으음……?”
레오는 결연한 각오로 오테르에게 말했다. 그는 자신이 본 모든 것을 털어놓을 셈이었다.
만약 오테르가 그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렇다면 남는 건 죽음뿐이다.
‘하지만 도박을 한다면 바로 지금이다.’
갑작스러운 요청에 오테르가 당황했다. 아무리 황자라고 해도 그저 어린아이일 뿐.
장난으로 여기고 적당히 넘길 생각이던 오테르가 황자와 두 눈을 마주쳤다.
깊고 진한 눈.
어린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장한 분위기에 오테르는 압도당했다.
그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제 연구실로 오시겠습니까? 저하.”
“고맙소.”
레오는 오테르의 연구실로 가 모든 걸 털어놓았다.
갑작스러운 각성.
자신이 본 미래.
황제와 형제들의 속마음.
황가의 어두운 비밀.
자신이 미래를 바꾸리라는 것.
그걸 위해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
정신병자의 헛소리라고 치부할 만한 이야기에도 오테르는 진지하게 경청했다.
그리고 그날.
황제는 그 누구보다 든든한 동지를 얻었다.
그 뒤로도 황제는 분주히 움직였다. 미래와 속마음을 볼 수 있기에, 의외로 일들이 쉽게 풀릴 때가 많았다.
하지만 미래를 보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미래는 때로는 레온이 원치 않는 일들도 강제했다.
“이봐 악마 숭배자. 나와 함께해라.”
“뭐라는 거야 개자식이.”
“……입이 험하군.”
악마숭배자 테이오스와의 만남이 그러했다.
테이오스는 변방 도시에서 폭력 조직을 꾸리고 살던 인물이다.
가난한 뒷골목 출신인 테이오스는 가족과 친구들을 살리기 위해 악마와 계약을 했다고 한다.
따로 제물을 바치거나 의식을 준비하거나 하는 일도 없이 말이다.
그 어린 나이를 생각하면 대단한 재능이 아닐 수 없었다.
레온은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테이오스가 측은했지만, 한편으로는 껄끄러웠다.
애초에 악마로부터 대륙을 지키기 위해서 시작한 일에 악마의 힘을 빌리다니?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운명은 말했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이 젊고 재능 있는 악마숭배자가 필요하다고.
황제는 긴 실랑이 끝에 테이오스를 설득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지? 언제 들켜서 처형당할지 벌벌 떨면서 그림자에 계속 웅크리고 있을 것이냐? 나를 따라와라. 나를 따르면 너와 네 가족들 모두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 떳떳하게 살게 해주마.”
그날. 레온은 어떤 더럽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심복이 생겼다.
그 뒤로도 레온은 계속해서 사람들을 포섭해나갔다.
강철기사단을 끌어들였고, 황궁 내의 귀족들에게도 은밀히 손을 뻗쳤다.
그런 레온의 행보를 가장 먼저 눈치챈 건 바로 2 황자였다.
정보력이 아주 뛰어났던 2황자는 레온이 황위에 관심 있다는 걸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차렸다.
또한, 레온의 은밀함과 행동력에 크게 놀라워했다.
하지만 2 황자는 여전히 방심하고 있었다. 세력이 작은 레온을 자신의 아래라 보았다.
그렇기에 2황자는 레온을 포섭하려고 느슨하게 행동했고…… 레온은 그 틈을 노려 2 황자를 번개처럼 처리했다.
그날 이후부터는 살벌한 싸움의 나날들이었다.
이제 황태자는 레온을 경쟁자로 인식했다. 황제 역시 갑작스럽게 세를 불려가는 레온이 썩 탐탁지 않았다.
레온은 그 둘을 모두 상대해야 했다.
실로 위험한 싸움이었다.
죽을 뻔한 적도 많고, 자신을 따라주던 사람도 너무 많이 잃었다.
특히, 점점 궁지에 몰린 황제는 흑기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흑기사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레온을 따르던 강철기사단이었다.
장래가 유망하던 릴리 리안은 흑기사와의 싸움에서 전사했으며, 에스테반 화이트가드는 기사단을 떠났다.
그때 이후.
황제는 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일을 처리했다.
그리고 긴 싸움 끝에 황태자와 황제를 독살하고 권력을 거머쥐는 데까지 성공했다.
상처 가득한 승리.
사람들은 레온을 보며 아비와 형제를 죽인 패륜아라 속닥거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드디어 이곳까지 왔다…….”
레온은 황위에 앉아 다시 미래를 보았다.
결사대의 검에 베여 죽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게 레온에게 주어진 운명이자, 역할이다.
시련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영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시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레온이야말로 바로 그 시련이었다.
레온은 자신의 죽음과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늘 궁금했던 것이 있다.
몇 번이고 미래를 봐도 자신을 베는 검사의 얼굴이 흐릿해 보이지 않았다.
동생의 모습도. 피에람의 여식과 은발머리의 성직자. 숲의 종족도 보였다.
하지만 검사의 얼굴만큼은 보이지 않았다.
‘신께서도 참으로 얄궂으시군.’
머지않아 궁금증이 해소될 날이 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레온은 본인의 업무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어느 날. 한 가지 재밌는 소문을 들어서 코르디스로 향했고 그곳에서 만나고 말아 버린 것이다.
자신을 죽일 검사를.
‘이 자다!’
이안의 분위기는 이질적이었다. 그는 우연히 길을 잘못 들어 이쪽 세상에 흘러들어온 사람 같았다.
‘이것도 운명인가.’
과연 누가 자신을 죽일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이 막상 눈앞에 다가오자, 도리어 마음은 안심이 되었다.
‘안심했다. 저자라면 분명…….’
저쪽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되어줄 뿐이다.
최고의 시련이.
***
황제는 짧게 말했다.
“악마는 긴 역사 속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이 세상의 법칙에 의해 너무나 강해진 악마를 상대할 수 있는 건, 법칙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다른 세상의 주민이 필요하다고…… 신께서는 판단한 모양이군.”
황제의 말에 동료들은 어리둥절해 했다.
다른 세계에서 왔다니. 그게 대체 무슨 얘기란 말인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오테르는 다급히 황제를 치료하려 했다.
“폐하! 우선 상처를…… 사제님. 부디 폐하의 상처를 치유해주십시오.”
오테르가 스텔에게 간청했다.
“그대들이 폐하를 미워하는 것을 이해하오. 하지만 모든 건 세상을 위해서였소. 폐하께서는 대륙과 제국을 지키기 위해 터무니없이 무거운 의무를 짊어지신 것이란 말이오!”
황제는 손을 내저었다.
“오테르 공. 의미 없는 짓은 그만두시오. 나는 여기서 죽어야 하오. 그게 내 운명이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대로 폐하를 보낼 수 없습니다! 그러면…… 폐하가 너무 가엽지 않습니까.”
늙은 마법사의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오테르는 황제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황제를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오테르가 황제를 감싸자 이안도 곤란해졌다.
‘안 죽일 수는 없는데…….’
이 전쟁이 끝나기 위해서는 황제의 목이 필요하다.
설령 여기서 살려준다 해도, 오히려 죽는 것보다 더한 치욕을 받을 것이다.
그런 이안의 마음을 읽은 황제가 미소지었다.
“걱정 말거라. 추하게 삶을 이어갈 생각은 없다. 너에게 내 최후를 줄 수 있다면, 나도 만족한다.”
“어. 음.”
“그 전에 몇 가지 조언을 하마. 악마가 대륙에 찾아올 것이다. 이번 싸움으로 그 시기가 더더욱 앞당겨지겠지. 온 대륙이 힘을 합쳐 그 군세를 막아내야 할 것이다.”
예상하던 말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이 얘기를 왜 황제가 하는지 의문일 뿐.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이쪽이 황제의 본 모습이겠죠.]
황제가 이어 말했다.
“내부에서의 배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대륙의 모든 악마숭배자들이 이곳에 모여 있으니, 제대로 청소만 한다면 후환은 없을 것이다.”
“너…….”
“오늘로 악마와 결탁한 어리석고 사악한 황제는 죽는 거다. 그렇게 되면 레아. 네가 다음 황제다. 너라면 잘해 낼 수 있다고 믿는다.”
화제의 시선을 받자 레아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오, 오라버니. 저는 지금도 아직 무슨 얘긴지 잘…….”
“내 일은 여기서 끝이다. 미안하지만 나머지는 너희에게 맡기겠다. 어려운 싸움이겠지만, 건투를 빈다.”
마치 삶을 마무리하듯. 담담히 얘기하는 황제의 말에 그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황제는 마음이 걸린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테이오스 공에게는 죽어서 사과해야겠군. 결국, 평생 그를 속이고 배신하고 말았으니. 그는 사악한 악마숭배자였지만, 나에 대한 충성만큼은 진짜였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폐하.”
“……!”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건 테이오스였다.
화상을 피부가 녹아서 눌어붙고, 온몸에 진물이 흐르는 끔찍한 몰골.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건 분명 테이오스였다.
테이오스는 계단을 힘겹게 올라오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처참한 상태.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지옥의 불길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계단을 힘겹게 오른 테이오스가 황제와 눈을 맞췄다.
“폐하를 믿었습니다. 태양 아래에서 떳떳이 살아갈 수 있게 하겠다는 그 말을 믿었습니다. 당신이라면 나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줄 거라 믿었습니다.”
절절하게 진심이 묻어나오는 말에 황제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오. 죽음으로써 속죄하겠소.”
“아니. 다시 말하지만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남에게 의지하려던 제가 아둔했던 것이겠지요.”
“잠깐. 지금 뭐 하려고…….”
낌새를 눈치챈 이안이 나서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잇따른 전투로 몸이 너무 둔해져 있었다.
테이오스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주문을 외었다.
“제 스스로를 바치겠습니다. 이곳으로 내려와 절망을 흩뿌려주소서. 나의 주인이시여.”
그 순간.
테이오스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녹색의 기운이 하늘에 닿았고…….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