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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214화 (215/222)

214 격변

“죽여!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 컥!”

“네가! 네가 내 형을 죽였어!”

“엄마…… 안 보여…… 아파…….”

황도에서의 전투는 격렬했다.

처음에는 마법사들끼리의 화력전에 병사들은 나설 자리가 없었다.

하지만 훈련받은 전투 마법사라도 마법을 무한히 사용할 수는 없는 법.

마법 폭격이 잦아들자, 병사들은 이내 서로 얽혀 난전을 펼쳤다.

피와 살이 튀었다.

마법에 팔다리를 잃은 병사들이 기어 다니고, 눈이 붉게 충혈된 기사들은 하나라도 더 많은 적을 베기 위해 칼을 휘둘렀다.

이곳에 더는 황제를 지킨다는 긍지도. 불의에 맞서 일어났다는 신념도 없었다.

있는 건 오직 맹목적인 살의.

마법사 하나가 손안에 얼음 조각들을 뭉쳤다.

터지는 즉시 수류탄처럼 날카로운 얼음 파편을 흩뿌리는 흉악한 마법.

아군과 적군이 섞여 있다지만 뭐 어떤가.

마법사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얼음 마법사답게, 마음을 차갑게 굳히며 마법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런 마법사의 낌새를 알아챈 기사 하나가 땅을 힘껏 박찼다.

기사는 검을 힘껏 들어 그대로 마법사를 내리치려 했다.

그리고 마법사는 기사의 검이 당도하기 전에 마법을 사용하려 했다.

좀 더 빠른 쪽은 마법사였다.

마법사는 곧바로 준비한 마법을 사용해, 기사를 갈가리 찢어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법을 날리기 직전 마지막 순간. 마법사는 반사적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기사 역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비를 쏟아내는 먹구름.

그 먹구름 사이에 붉은 번개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맙소사.”

“신이시여.”

기사와 마법사가 탄식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무기를 나누던 병사들도. 기적을 부리던 사제들도. 시위에 화살을 메기던 궁수들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만큼 하늘에서 풍겨오는 저 압도적으로 불길한 기운은 도저히 무시할 만한 게 못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거센 바람이 불며, 구름이 원형으로 퍼져나갔다.

붉은 번개가 미친 듯이 주위에 흩뿌려졌고. 그 구름 속에서 무언가가 지상에 강림하기 시작했다.

“아아…….”

그 순간. 이 자리에 서 있던 모두가 전의를 잃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과 공포를 흩뿌리는 존재.

모든 악마들의 아버지.

죽음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

제물은 충분했다.

황제의 병사들과 아군이 맞부딪히며 발산하던 어두운 감정들.

족히 수천에 달하는 강력하고 사악한 악마 숭배자들의 영혼.

마지막으로, 테이오스의 증오. 가슴 저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깊고 진한 증오가 완성했다.

대악마 소환의 의식을.

“이런…….”

이안은 서둘러 창가로 가 하늘을 보았다.

이제부터 어떤 일이 일어나려는지 이안은 알았다.

‘이건 빨라도 너무 빠르잖아.’

부정하고 싶었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안은 가슴의 떨림을 억누르고 말했다.

“모두 준비해.”

그리고 그 순간.

창밖에 번개가 내리쳤고, 주위에 붉은 섬광이 번쩍였다.

사람들은 한순간 시야를 잃었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눈을 떴을 때.

황궁의 천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리고 그 뚫린 틈 사이로 내리치는 비를 맞으며, 한 사내가 서 있었다.

“…….”

모두가 침묵했다.

아니. 사내가 풍기는 압도적인 기운에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은 지극히 인간적인 외형을 가졌다.

비록, 길게 기른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은 검었지만, 눈매는 부드러웠고, 날카롭게 솟은 코와 호선을 그리는 입매는 절로 사람들의 호감을 끌어낼 만했다.

평범하게 외형만 본다면 그냥 호감가고 잘생긴 청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사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온몸에 힘이 탁 풀렸다.

맹수를 만난 초식동물처럼 그저 도망치고 싶었다.

절대 싸워서도 대적해서도 안 된다.

본능이 그렇게 외쳐댔다.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대륙의 죽음이자, 공포이며 두려움. 최초의 악마이자 모든 악마의 아버지. 모든 악한 것들의 왕. 그리고 너희들은 대악마라고 부르는 존재다.”

귀족적이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정적 속에서 울려 퍼졌다.

반응이 없자, 대악마는 이어서 말했다.

“인간들의 세상에 내려오는 건 오랜만이군. 너희들의 시간으로는 197년 만인가? 예상보다 빨랐구나.”

오랜 시간 잠을 자다 깨어난 사람처럼 작게 기지개를 켠 악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건 테이오스의 시체였다.

“나를 부르는 데 성공하다니. 보기 드문 깊고 어두운 증오였다.”

파삭.

악마는 테이오스의 머리를 밟아 그대로 으깨 버렸다.

터져 나간 피는 그대로 악마에게 흡수되었다.

이번에 고개를 돌린 악마는 이안을 발견했다.

그리고 흥미를 빛냈다.

“오. 이번 대에 나를 상대할 인간이 너인가?”

악마는 이안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이안은 떨리는 몸을 억지로 부여잡고 짧게 답했다.

“그래.”

“흐음…….”

악마는 이안을 유심히 관찰했다.

세포 하나까지 모조리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에 이안은 성검을 쥐었다.

그러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한참을 살피던 악마는 환하게 웃었다.

“이거. 누군가 했더니 이네스가 아닌가. 반갑다! 진심으로 반가워! 다시는 만나지 못할 줄 알았다. 설마 영혼이 조각난 채로도 다시 도전하러 올 줄이야.”

곧바로 이네스의 존재를 알아챈 악마를 향해 이안이 말했다.

“나는 이안이야. 이네스 님에게 도움을 받고는 있지만.”

“흐음? 뭐. 그런 건 어찌 되든 상관없지.”

흥미를 잃은 듯. 고개를 돌린 악마는 황제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래. 나를 소환한 녀석이 품고 있던 분노의 대상은 네놈이구나.”

황제가 중얼거렸다.

“……이런 건 내가 본 미래에 없었는데.”

“네가 뭐든 읽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교만하구나. 시야가 넓다 하나 결국 한낱 인간 따위에 불과하거늘.”

터벅터벅 걸어간 악마가 황제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멸망을 막기 위해 네가 했던 모든 행동이 결국 나의 도래를 재촉했다. 너의 희생. 너의 인생이 모두 무의미하다는 뜻이지. 지금 기분이 어떤가? 울어도 좋고, 화를 내도 좋다. 어느 쪽이든 참으로 달콤할 것 같다.”

“…….”

저주의 말을 쏟아내는 악마.

물끄러미 악마를 바라보던 황제는 씨익 웃었다.

“글쎄. 정말로 의미 없었는지는 끝까지 가봐야 알 것 같은데.”

“흐음. 강한 마음을 지닌 인간이구나. 그렇다면…….”

느긋하게 얘기하던 악마가 망토에 감춰져 있던 손을 꺼냈다.

“죽어라.”

흉악한 기운이 악마의 손에 모여들었다.

“폐하!”

다급하게 외친 오테르가 공간이동을 사용해 악마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온 신경을 집중했다.

‘폐하만은 지켜야 한다!’

온 생명. 모든 역량을 끌어내 사용하는 마지막 마법이 악마에게 향했다.

공간을 통째로 찢어 버리는 과격한 마법.

하지만…….

“색다른 마법이지만 그 위력은 시시하군.”

손을 내젓는 것만으로도 마법을 흩어 버린 악마는 비어 있는 손을 휘둘렀다가, 다시 망토 안으로 집어넣었다.

오테르의 시야가 위아래로 뒤집혔다. 깔끔하게 잘린 그의 머리가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악마는 떨어지는 머리를 그대로 붙잡아 기괴할 정도로 입을 크게 벌려 삼켰다.

오도독거리는 거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렸다.

그러다 악마는 뼛조각을 바닥에 퉷하고 뱉었다.

“맛이 별로군. 뭐. 오래된 고기가 다 그렇겠지.”

그제야 황제의 얼굴에도 노기가 어렸다.

“네놈……!”

“그래. 이제야 좀 볼만한 얼굴을 하는구나.”

황제는 남은 한쪽 팔로 검을 쥐고 곧장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악마가 빨랐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악마의 손은 황제의 가슴속을 파고들어 그 심장을 쥐고 있었다.

“너는 너를 믿고 따르던 부하를 배신했다. 그렇다며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지.”

“……!”

“네 가장 소중한 걸, 네 손으로 무너뜨려라.”

파악!

악마가 손아귀에 힘을 주자 심장이 뭉개졌다. 핏물이 흐르며 황제의 눈에 초점이 없어졌다.

하지만 거기서 끝은 아니다.

황제는 비틀거리며 검을 쥐었다.

그의 눈은 붉은 안광이 빛났다.

그가 조종하던 흑기사처럼.

악마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대로 너희를 모두 죽여 버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건 별로 재미없겠지. 찾아와라. 기다리고 있겠다.”

꽈릉!

붉은 벼락이 다시 한번 내리쳤다. 일행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곳에 악마는 없었다.

그곳에 있는 건 더는 인간이 아닌 황제뿐이었다.

황제의 검에는 붉은색 번개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걸쭉한 침을 뚝뚝 흘리며 한 사람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레아. 레아…….”

“오라버니?”

레아가 멍하니 대답하자 황제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리고 레아를 흐릿한 두 눈에 담은 순간, 황제가 고함을 지르며 검을 들고 달렸다.

“레아!”

나머지 동료들이 레아를 도우려 했다.

하지만 황제가 땅을 검으로 힘껏 내리치자, 번개 다발들이 반구 형태로 레아와 황제를 감쌌다.

어찌나 번개가 강력한지, 바깥에서는 도저히 뚫어낼 수가 없었다.

오직 둘만의 결투장.

레아가 외쳤다.

“오라버니! 정신 차리세요!”

“크으악!”

“윽.”

황제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번개가 검을 타고 올라 레아를 위협했다.

레아는 검광을 피워내 번개를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둘은 위태롭게 검을 나눴다.

황제는 레아에 대한 살의를 불태웠고, 레아는 그런 황제를 죽이고 싶어 하지 않는 게 눈에 보였다.

‘가장 소중한 걸 무너뜨린다는 게 레아를 의미하는 건가?’

잔혹한 악마의 농간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앞선 전투로 힘을 잃은 이안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레아가 스스로 극복해야 할 시련이었다.

“너 때문이다! 너 때문이었다! 너 가 내 삶을 망쳤다!”

“오라버니…….”

황제는 검을 휘두르며 말을 쏟아냈다.

“나도 이런 의무를 짊어지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행복을 거머쥐고 싶었다!”

황제는 언제나 진심으로 사랑을 나눌 상대에 대해 열망해왔다.

하지만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꿈.

황제는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왜 나만 이렇게 불행한 거지? 나만 불행해야 하냐고―! 이 모든 게 다 너의 탓이다 레아! 그러니 너도 나처럼 불행해져라! 함께 지옥으로 가는 거다!”

황제의 검이 기세를 탔다. 붉은 번개가 연신 레아를 압박했다.

미래와 마음을 읽지 못하지만, 그는 여전히 강한 검사였다.

하지만 레아가 몇 수는 위였다.

레아는 황제의 검을 받아내며 갈등했다.

이대로 황제를 벨지. 그러지 않을지.

‘여기서 오라버니와 함께 죽는다면. 적어도 오라버니가 쓸쓸하지는 않게…….’

황제에 대한 미안함이 레아의 검끝을 망설이게 했다.

황제가 짊어진 걸 알지 못했던 자신이 미웠고, 이대로 여기서 죽는다면 조금이라도 속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떠오른 건 황제가 제정신일 때 했던 말들이다.

한심한 너의 모습에 실망했다는 말.

하지만 그런데도 제국을 레아에게 맡기겠다는 말.

황제는 레아를 믿고 있었다.

믿음. 레아는 황제의 믿음을 깨고 싶지 않았다. 더는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제부터 나는 황제야.’

이제 어리광을 부릴 시간은 끝이다. 레아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검을 꺾었고. 그대로 황제를 향해 휘둘렀다.

황제는 막으려 하는 대신, 역으로 레아의 심장을 찌르려 했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먼 옛날. 황제가 레아에게 검을 수련하라고 당부한 게 어쩌면 오늘을 위해서일까.

결국. 황제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베지 못했다.

그리고 레아의 검은 황제의 목을 깔끔하게 베어냈다.

목이 떨어지자, 주위를 감싼 번개도 사라졌다.

“…….”

레온. 그 최후마저 불행한 사내. 하지만 누구보다 숭고했던 사내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슬픈 눈으로 황제를 내려다보던 레아가 그의 검을 주워들었다.

황제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보검이자, 황위의 상징.

레아는 결연한 얼굴로 황제의 검을 옆구리에 찼다.

이로써 레아는 레온에게서 황위를 계승했다.

그리고 숭고했던 그의 의지도 계승했다.

레온의 삶과 노력이 물거품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레아는 악마를 벨 것이다.

“…….”

조용히 그 모습을 눈에 담던 동료들은 문득, 뻥 뚫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

플로라가 탄식을 터트렸다.

비가 쏟아지던 하늘에서는 하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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