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북쪽을 향해
이안은 조용히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이네스가 앉아 있었다.
마지막 성검 조각에 잠들어있던, 마지막 이네스의 영혼.
이네스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모든 걸 안다는 듯이 말했다.
“마침내 이 순간이 왔군요.”
“……예.”
“제 힘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빌려드릴게요.”
“부탁드립니다.”
이네스는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이안은 그 손을 맞잡았다.
빛이 터졌다.
이안의 몸 안으로 강력한 힘이 흘러들어왔다.
“…….”
이안은 눈을 떴다.
그의 손에는 마침내 완전한 형태를 찾은 성검이 들려 있었다.
이안은 그 성검을 손에 굳게 쥐었다.
***
대륙의 북쪽 끝에는 거대한 바다가 있다.
거친 바다다.
번번이 폭풍이 불고, 집채만 한 파도는 웬만큼 커다란 배도 뒤집어버리며, 수면 아래에는 괴물들이 득시글거린다.
가장 노련한 선원조차 이 바다를 항해하는 것에는 고개를 내저었다.
사람들은 이 바다를 ‘대륙의 방파제’라고 부른다.
저 바다 너머 지옥의 악마들이 대륙을 넘보지 못하도록, 일부러 신께서 폭풍을 불러일으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바다의 근처에서 터를 잡은 성. 대륙에서 제일 북쪽에 있는 요새에서 사람들이 모두 밖에 나와 있었다.
끝없이 쏟아지는 눈이 그들의 머리 위를 덮었지만,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바다만을 쳐다보았다.
지팡이를 짚은 한 노인이 바다를 보며 중얼거렸다.
“신이시여…….”
바다가 서서히 얼고 있었다.
그리고 만약, 바다가 충분히 단단하게 얼게 된다면…….
더 이상 방파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다.
***
전쟁이 끝났다.
황제는 죽었고 레아는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원래라면 이제부터 숨을 좀 고르며 다음을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예정된 것보다 빨리 악마가 소환되고 말았다.
인류는 곧바로 악마와의 싸움을 대비해야 했다.
마침 전쟁으로 각국에서 군사를 일으킨 참이다.
이안과 레아는 곧바로 왕들을 소집해 병력을 북쪽으로 보내라 일렀다.
하지만 예상외로 왕들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일단 선발대로 병사 2000명을 보내겠소.”
“나도 1500. 아니. 1400을 보내겠소.”
“……본대 병력이 몇인데 겨우 그것밖에 보내지 않으시죠?”
“흠. 흠흠. 전쟁으로 우리 쪽 피해가 아주 크다오. 이것도 최대한 쥐어 짜낸 거외다.”
잇따른 전쟁으로 국가들 사이에는 감정적인 앙금이 남았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신뢰하지 않았기에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해타산적인 이유도 있었다.
설령 악마를 막아내도 병력을 다 잃어버리면 국가는 쇠퇴할 것이다.
악마를 막아내고 난 이후, 조금이라도 대륙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는 병력을 아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이기주의가 쌓이고 쌓여 지금 이 회의의 지지부진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안은 속으로 혀를 찼다.
‘당장 힘을 합쳐도 막아낼까 말까 하는데.’
레아의 표정도 어두웠다.
왕들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 데에는 레아가 갓 즉위한 황제라는 것도 컸다.
다를 때 같았으면 대륙의 왕들은 황제에게 고개조차 들 수 없었을 것이다.
회의는 계속 진행되었다.
왕들은 서로를 비난하며, 병력을 조금이라도 더 내라고 실랑이를 벌였다.
이안은 팔짱을 낀 채 과연 이들이 언제까지 이럴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이안의 태도가 거슬렸던 걸까. 한창 싸우던 와중, 갑자기 이안에게로 불똥이 튀었다.
“애초에 악마를 막는 건 그대의 의무 아니오! 우리한테 병력을 더 내라 마라 할 자격이 있는 것이오?”
“맞소! 신께서 인정하신 영웅이라면 악마를 막아내 보시오!”
적반하장으로 나오자 어이가 없어진 이안이 입을 열었다.
“물론. 악마는 제가 막아낼 겁니다. 하지만 악마의 군세를 저 혼자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병력을 내달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때. 대륙의 구석에 자리한 자그마한 왕국의 왕이 비아냥거렸다.
“그대가 약해서 그런 것 아니오? 과거의 영웅들은 검을 한번 휘두르면 대지를 갈랐다 하던데. 그대에게는…… 흠. 그만한 실력이 없어 보이는데?”
정적이 내려앉았다.
갑자기 싸늘해진 분위기에 당황한 변방의 왕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실제로 전쟁에 참여한 왕들은 이안의 실력을 잘 알기에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그저 이안에게 압박만 넣을 생각이었는데, 변방의 왕이 눈치 없이 선을 넘어 버린 것이다.
마침 기회를 엿보던 이안이 곧장 성검을 뽑았다.
왕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지금 무슨 짓이오! 아무리 영웅이라 하나 이런 횡포를 참을 수는…… 어?”
이안이 성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한 호흡 뒤에, 왕의 머리카락이 후두둑 잘려서 흩날렸다.
왕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검을 휘두르는 걸 보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머리카락이 잘려져 있다니.
만약 검이 조금만 아래로 휘둘러졌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두려움으로 몸을 덜덜 떠는 왕에게 이안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걸로 대충 실력을 증명되었죠? 그러니 이제 앉아요.”
“아, 알겠소.”
왕이 앉자 정적이 찾아왔다.
이곳에 참여한 이들은 서로 눈동자만 굴렸다.
‘막무가내인 구석이 있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과격할 줄이야.’
설마 이런 자리에서 이안이 검을 뽑고 휘두를 줄 그들도 몰랐다.
게다가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호위로 서 있던 기사들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해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
예상을 뛰어넘는 실력.
다른 관점에서 보면 여기서 이안이 어떤 짓을 저질러도 막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제 좀 볼만하네.’
이안은 왕들이 보내는 불안한 눈빛을 즐겼다.
어떻게든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역겨운 말싸움보다, 차라리 지금의 살벌한 분위기가 차라리 나았다.
이안은 검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험하게 행동해서 미안합니다. 워낙 긴박한 상황이라 이해해주세요. 사실 이렇게 한가하게 토론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지금 당장에라도 북쪽으로 가서 전투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정도로 상황은 심각합니다.”
몇몇 왕들은 북쪽이 아닌 좀 더 유리한 위치에서 악마의 군세를 맞길 원했다.
가령, 황도라거나.
하지만 이안은 악마들이 대륙에 발을 들이기 전에 상황을 끝낼 생각이었다.
전선이 넓어지고, 시간이 끌릴수록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할 것이다.
게다가 이 추위 때문에라도 싸움을 오랠 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안은 조용히. 그리고 힘을 담아 말했다.
“보낼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보내세요. 두 번 얘기 안 할 겁니다. 전부 보내요.”
“……지금 협박하는 건가?”
짐짓 분노한 체 하는 어느 해양 국가의 왕.
하지만 이안은 그의 눈동자에서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을 엿보았다.
이안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예. 협박하는 거 맞아요. 그러니 순순히 협조하세요. 이게 뭐, 저 좋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만약 병력을 보냈는데 그게 제 기준에 안 찼다. 그래서 악마 토벌에 실패했다…….”
이안은 성검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면 내가 악마한테서 어떻게든 살아 돌아가서. 당신들이랑 당신네 가족들 전부 죽일 거야. 알았어?”
살벌한 울림에 왕들은 일제히 침묵했다.
***
“과했어요. 이안.”
회의가 끝나고 난 후.
레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안에게 말했다.
“저들의 태도는 이기적이고 역겹지만, 이해할 만해요. 과거에 많은 국가들이 악마에게 용맹하고 명예롭게 맞섰지만, 그랬던 국가들은 대부분 쇠락했어요. 왕들로서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죠. 그래서 적당한 계약과 전후의 지원을 약조하면서 구슬렸어야 해요.”
“알아요. 원래라면 그랬겠죠.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너무 빠듯해요. 당장 바다가 얼면, 악마들이 건너올 테니까요. 누군가는 이렇게 해야 했어요.”
레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역할을 꼭 이안이 할 필요가 있나요. 이안도 전쟁 이후를 생각해야죠. 왕들은 이안의 이런 행동을 기억하고, 보복하려 할 거예요. 누군가 그들을 협박해야 한다면, 그건 황제인 저의…….”
“아뇨.”
이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싸움이 끝나고, 망가진 세상을 수습하는 데에는 레아 님이 적격이에요. 저야, 뭐 기껏해야 칼질 좀 잘하는 사람인데요.”
“이안…….”
“그때가 되면 잘 좀 부탁드릴게요. 왕국에서 보낸 암살자들이랑 씨름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한자리는 주실 거죠 폐하?”
이안의 장난스러운 말에 그제야 레아도 표정을 풀었다.
“그때가 되면 이안이 할 일이 아주 많아요. 역대 결사대들도 악마를 토벌한 이후 왕성하게 활동하곤 했으니까요. 또, 황가는 언제나 결사대의 영웅들과 혼인을…… 흠흠. 어쨌든요. 걱정은 마세요.”
헛기침으로 뒷말을 삼킨 레아를 보며 의아해하던 이안이 말했다.
“저희는 당장 북쪽으로 가볼게요. 레아 님께서는 병력을 모아서 와주세요.”
“네. 이안이 그렇게까지 해주었으니, 저도 최대한 분발해볼게요.”
“솔직히. 모여야 얼마나 모일지 모르지만요.”
협박은 나름 먹힌 것 같지만,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당장 병력들을 보낸다 해도 보급이나 동선을 생각해야 하고, 시간 안에 도착할지도 미지수다.
그런 부분을 레아가 최대한 조절하겠지만 한계는 있을 터.
‘다른 거 생각 안 하고 그냥 달려온다면 시간 안에 도착하겠지만…… 그럴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대화를 마친 이안은 곧장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그때. 레아가 그의 등에 넌지시 물었다.
“기분은 괜찮은가요? 이안.”
잠시 우뚝 섰던 이안이 되물었다.
“괜찮고말고요. 왜 그러시죠?”
“……괜찮다면 다행이에요. 아무쪼록, 무언가 힘든 게 있다면 말해주세요. 함께한 시간은 길지 않을지라도, 저 역시 동료가 아닌가요.”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진짜 괜찮아요. 그럼 북쪽에서 뵙죠.”
이안은 도망치듯이 걸음을 옮겼다. 레아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안이 숙소에 도착했을 때, 이미 동료들은 떠날 채비를 마쳐둔 상태였다.
넷은 곧바로 마차에 올랐고, 이내 북쪽을 향해 달렸다.
일행은 빠르게 이동했다.
밤낮없이 달렸고 말이 지치면 중간 거점마다 다른 말로 바꿨다.
덕분에 그들은 나흘 만에 대륙의 북쪽 끝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저히 지금이 한여름이라는 게 믿을 수가 없네.”
마부석 옆자리에 앉은 플로라가 바깥을 보며 중얼거렸다.
설산이 이곳저곳에 우뚝 솟아 있는 북쪽 지방에는 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웬만한 1층 건물보다 더 높게 쌓인 눈을 헤쳐나가려면, 플로라의 불꽃으로 눈을 녹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녹은 눈은 금세 다시 꽁꽁 얼어버리곤 했다.
그만큼 이렇게 살을 에는 추위는 일찍이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한겨울의 대초원에서 느꼈던 날씨와 비슷한 느낌.
우마딜로가 말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 죽는다.”
“응.”
이미 대륙의 남쪽까지 눈이 오고 있었다.
농사는 불가능했으며 추위와 병으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이런 기상 이변을 막기 위해서는 원흉인 악마를 토벌하는 수밖에 없다.
“뭐. 싸움의 결론은 금방 날 거야. 악마가 죽든, 우리가 죽든.”
고삐를 쥔 이안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얼굴이 이안답지 않게 심각해, 동료들이 눈치를 살폈다.
최근 이안의 상태는 계속 이랬다.
대악마를 마주치고 난 이후부터 내색하지 않으려고 해도, 긴장과 불안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냐 물어도 이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만을 되풀이할 뿐이다.
“아.”
갑자기 이안이 탄식을 내뱉자, 동료들이 화들짝 놀라 시선을 집중했다.
이안은 앞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겠네.”
마차를 끌던 말 두 마리가 쓰러졌다.
플로라의 불꽃으로 따뜻하게 해주고, 스텔이 계속 치유해주었지만 결국 버텨내지 못한 것이다.
“목적지까지는 얼마 안 남았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렇게 말한 이안은 마차에서 내린 뒤, 두꺼운 상의를 눌러쓰고 걸음을 옮겼다.
동료들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세찬 눈보라를 맞으며 언덕을 몇 시간 오르자 어느새 시야가 탁 트였다.
앞에 펼쳐진 건 끝없이 이어진 검은 바다.
그리고 그 바다는 빠르게 얼어붙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