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생각의 시간
이안과 동료들은 대륙 가장 북쪽의 요새에 발을 들였다.
성주는 그런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환영합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나요?”
성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설명했다.
“우선 해안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병력이 좀 있어서 준비는 빨리 되고 있는 편입니다. 그만큼 바다도 빨리 얼고 있어서 문제지만 말이죠. 하하하!”
체구가 땅딸막하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성주는 북쪽 지방 사람답지 않게 유쾌한 성격이었다.
그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이안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이안은 그런 성주에게서 슬쩍 거리를 벌리며 말했다.
“추가 지원군이 올 때까지는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날씨가 상상 이상으로 안 좋아요.”
“그 정도는 예상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끼리 악마들을 맞이할 수도 있겠군요.”
“최악의 경우에는…… 그럴 수도 있죠. 보급은 충분합니까? 날이 많이 추운데, 자칫 병사들이 추위를 버티지 못할까 걱정이네요.”
성주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걱정 마시죠. 저희는 아주 오랜 시간부터 이날을 대비해왔습니다. 무기도, 땔감도, 식량도 모두 넉넉합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성주는 유능한 인물인 듯했다.
한시름 놓은 이안을 성주는 바다로 데려갔다.
꽁꽁 얼어붙은 연안 위에는 병사들이 목책이나 투석기 따위를 설치하고 있었다.
성주가 다가서자 그들의 시선이 몰렸고, 그들은 이내 이안 일행을 알아보았다.
“봐! 결사대다! 영웅들이야!”
“저 붉은 머리는…… 피에람 가문의 천재 마법사 플로라 피에람이잖아. 실제로 보니 훨씬 아름다워!”
“성녀 스텔이야! 가서 기도를 부탁드려볼까?”
“아. 나무인간 우마딜로다.”
치켜세우는 말에 플로라는 괜스레 머리를 쓸어넘기며 표정을 가다듬었고, 시선이 거북했던 스텔은 이안의 등 뒤에 숨었다.
우마딜로는 ‘나만 멋있는 별명이 없다’며 투덜거렸다.
어쨌거나 병사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황제가 바뀌자, 교단에서는 이안 일행의 이야기를 멀리 퍼트렸다.
특히 사악한 악마 숭배자들을 무찌르고, 황궁으로 쳐들어가 타락한 황제를 벤 이야기는 큰 인기를 끌었다.
레아는 레온의 명예를 지켜주고 싶었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는 악역이 필요했고, 구심점이 필요했다.
황제는 죽어서도 악역이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구심점은 바로 이안이었다.
병사들은 이안을 보며 웅성거렸다.
“저 사람이 이안인가 봐. 기세가 장난 아니야.”
“역대 최초로 평민에 머리가 검은 영웅이래.”
“하지만 기사들과 결투를 벌이고 모두 살려줄 정도로 명예롭대.”
“초원에서는 사악한 야만인들을 몰아냈다고 하더군.”
“연금술사들의 도시에서는 타락한 시장을 끌어내렸다는데?”
병사들은 이안의 모험에 대해 수군거렸다.
그들 대부분은 의도적으로 교단에서 퍼트리거나 음유시인들이 노래한 이야기였다.
때로는 과장되고 거짓이 종종 섞여 있는 이야기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실제 사실에 기반해 있었다.
그만큼 이안이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펼친 모험이 많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덕분에 이안에게도 많은 별명이 붙었다.
교단의 영웅. 코르디스의 수호자. 마녀 살해자. 코헨의 해방자. 대초원의 친우. 성도의 방패. 피에람의 은인. 흑기사 살해자. 대수림의 구원자. 황제 살해자. 그리고 대륙 제일의 검사.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쓰이는 별명은 하나였다.
“불사신 이안.”
“다른 건 모르겠지만 저 사람이랑 함께 있으면 죽을 것 같지 않아.”
“분명 악마도 저런 사람을 죽이지는 못하겠지.”
처음에는 코르디스에서 한 번 죽은 것으로 되었다,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우스갯소리로 처음 생긴 별명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수많은 전장과 위험한 모험에서 살아남았다는 의미에서 사람들은 이안을 불사신이라 불렀다.
이안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죽지도. 지지도 않을 거라고.
따라서 악마도 막아줄 것이라는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이 들어있는 별명이었다.
이안은 사람들이 자신을 무어라 부르든 내버려 두었다.
사람들의 힘이 되는 것이 자신이 역할임을 잘 알았다.
주위가 좋은 의미로 소란스러워지자 성주가 허허 웃었다.
“이거. 와주시는 것만으로도 사기가 바짝 오르는군요.”
이안은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물었다.
“한시가 급하니 저희도 전쟁 준비를 돕겠습니다. 뭘 하면 되겠습니까.”
이안의 제안에 성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영웅들께서는 있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큰 힘입니다. 준비해 둔 숙소에 가서 쉬어주십시오.”
“그래도…….”
“이건 저희의 일입니다. 그리고 이안 님의 일은 악마를 상대하시는 것이지요. 부디 체력을 보존해주십시오. 병사들도 그걸 바랄 겁니다.”
단호한 말에 결국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주의 말대로다.
얼마 안 남은 시간을 더 의미 있게 사용할 방법은 있을 터다.
성주의 안내에 따라 일행은 숙소로 향했다.
먼 길을 쉬지 않고 이동했던 터라 다들 피로가 쌓여 있었다.
이안이 방문의 손잡이를 잡으며 말했다.
“다들 쉬어.”
이안은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플로라가 그런 이안의 등에 대고 물었다.
“……이안.”
“응?”
이안이 뒤를 돌아보자 플로라가 한참을 꼼지락거렸다.
왜인지 스텔도 옆에 다가와 이안의 소매를 꾹 쥐었다.
우마딜로까지 가만히 서서 쳐다보자, 때아닌 정적이 내려섰다.
난처해진 이안이 물었다.
“왜 그래들. 뭐 할 말 있어?”
“그…… 별일 없지?”
한참 고민 끝에 궁색한 말을 내놓은 플로라가 조심히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이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별일은 무슨. 너희도 어서 들어가서 쉬어. 이따 식사시간에 보자.”
“어. 응…….”
이안이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서로 시선을 교환하던 동료들도 이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 뒤에 서 있던 이안도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걱정을 끼치게 한 것 같아요.’
[아직 마음이 정리가 안 되었군요.]
‘네.’
이안은 대악마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극히 인간적인 외향.
게임에서 화면 너머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감.
대악마를 앞에 둔 이안은 마치 거대한 폭풍 앞에 알몸으로 내던져진 심정을 느꼈다.
자연재해를 앞둔 것 같은 무력감과 두려움이 온몸을 옥죄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적어도 지금의 이안의 힘으로는 그럴 것 같았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일까?
아니면 대악마가 흩뿌리는 공포가 너무 커 판단이 흐려진 것일까.
결국, 스스로 사고하기를 포기한 이안이 물었다.
‘이네스 님이 생각하시기에는 어떠신가요? 제가 그놈을 이길 수 있을까요?’
이네스는 언제나 이안이 가로막히면 옳은 길을 가르쳐 주었다.
이번에도 해답을 줄 것이라고 이안은 믿었다.
그만큼 이안은 이네스를 신뢰하고 의지하고 있었다.
대륙의 모두가 이안을 의지하고 있음에도 그 중압감에 짓눌리지 않은 건, 이안에게도 이네스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번만큼은 이네스도 고개를 저었다.
[대악마는 인간의 시선으로 가늠할 존재가 아니에요. 그가 얼마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저조차도 확실치 않답니다.]
‘과거에 이네스 님은 어떠셨는데요. 어떤 심정으로 악마를 쓰러트릴 수 있었죠?’
[흠…….]
잠시 기억을 더듬던 이네스가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반드시 이길 거라는 마음이었어요. 어차피 싸워야만 하는 적이고, 이길 수 없을지를 고민하는 것 자체를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죠.]
‘처음에 그랬다는 것은, 나중에 생각이 바뀌었다는 건가요?’
[예.]
이네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은 서글픈 얼굴로 말했다.
[전투는 순조로웠어요. 이대로 계속하면 이길 거라는 희망을 가졌죠. 하지만 악마는 우리의 희망을 정확히 꿰뚫었어요.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시험했죠. 그리고…….]
‘동료들이 배신했군요.’
[예.]
악마는 강력한 일격을 퍼부었다.
존재 자체가 소멸되어 버릴 정도로 강한 공격을.
누군가는 그 일격을 받아내야 했다.
하지만 동료들은 자신의 존재가 모두에게 잊힐 거라는 공포를 이겨낼 수 없었다.
그들은 교활하게도 가장 굳세고 선한 이네스의 등을 찔렀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제압하고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네스는 그러지 않았다.
누군가는 감당해야 할 일이고, 기왕이면 자신이 하길 원했다.
그녀는 동료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배신당했을 때는 저도 사람인지라 마음이 아프더군요. 하지만 결국, 제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충분히 강해서 악마에게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니까요.]
‘이네스 님 탓이 아니었어요.’
이안의 위로에 이네스는 말없이 맑은 미소를 지었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표정이었다.
잠시 끊어진 대화를 이네스가 다시 이었다.
[악마의 힘을 정통으로 받아내 제 영혼은 갈라지고, 존재는 소멸하고 있었어요. 저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더군요.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아니면 과연 누가 저 악마를 벨 수 있을까. 저는 동료들을 떠올렸어요. 그리고 생각했죠. 아. 내가 아니면 안 되겠구나. 하고.]
그건 냉철한 판단일 수도 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녀가 동료들을 믿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 대악마는 사람의 시선으로 가늠할 수 없는 존재. 제가 아니라도 동료들이 악마를 무찌른다는 가능성도 분명 있었죠. 하지만 저는 동료들을 믿지 못했어요. 실은 우리들의 유대는……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거겠죠. 하지만 덕분에 저는 모든 힘을 모아 끝내 악마를 베어낼 수 있었어요.]
동료를 믿지 못하기에 스스로 해야만 한다는 강한 책임감에 사로잡혔다.
그렇기에 이네스는 영혼이 조각나는 와중에도 검을 들었다.
그리고 악마를 내리쳤다.
책임감.
이네스의 검이 악마에게 닿을 수 있었던 건 바로 광기에 가까운 그 책임감 덕이었다.
‘하지만 저는 이네스 님처럼 할 수는 없어요. 그 정도의 책임감도 업고요.’
[맞아요. 이안과 저는 다르죠. 하지만 지금껏 제가 봐온 이안이라면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믿어요.]
‘이네스 님…….’
진심 어린 격려에 이안은 깊은 감사를 느꼈다.
하지만 불안감은 여전했다.
여전히 뇌리에는 악마의 모습이 박여 있었다.
그 무정한 눈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안을 보았지만 별로 신경조차 쓰지 않던 그 모습을.
그 눈빛 앞에서는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노력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건 계획의 실패를 의미한다.
이안의 계획은 게임에서와는 달리, 더 강해진 힘으로 악마가 힘을 발휘하기 전에 처치하는 것이다.
확실히.
이안은 게임에서보다 훨씬 성장했다. 하지만 악마를 보자마자 그는 느꼈다.
‘이걸로는 한참 모자라. 악마를 압도할 수 없어. 그렇다면…….’
대악마를 상대로 다섯이 싸우면 한 명은 반드시 죽는다.
게임에서도. 이 세상에서도 반드시 지켜진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스텔. 플로라. 우마딜로. 레아. 그리고 이안 중 한 명은 반드시 희생해야 한다.
그때가 되면 이안은 선택을 내려야 한다. 어떤 선택을 내릴까.
그런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아 악마를 만난 이후 계속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아니. 내가 지레 겁먹은 거야. 나는 충분히 강해졌어. 악마가 힘을 쓰기 전에 베어낼 수 있어. 반드시.’
이안은 그렇게 끊임없이 되뇌었다.
어떻게든 믿어볼 작정이었다.
이곳은 믿음이 곧 힘이 되는 세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