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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217화 (218/222)

217. 생각의 시간 (2)

플로라는 방 한편에 쭈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대악마와 마주한 이후 그녀 역시 이안만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악마를 마주친 순간 그녀는 허무함을 느꼈다.

피에람 가문의 천재. 역대 최고의 화염 마법사. 그런 칭호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악마 앞에서 플로라는 한낱 인간일 뿐이었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저도 모르게 약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혹여나 누가 들었을까. 플로라는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얼굴을 묻었다.

악마의 시선이 잊히지 않는다.

당장에라도 죽음의 위기를 맞이할 것처럼 심장이 쿵쿵 뛰었다.

눈을 감자 예전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선조의 이야기를 들으며 꿈을 키우던 어릴 적.

스스로를 한껏 뽐내던 코르디스 시절.

피에람 가문에서 선조와 마주한 일.

그 이후 동료들과 함께한 모험들.

돌이켜 보면 대부분은 이안과 관련된 일이었다.

“이안.”

플로라는 그 이름을 입에서 작게 굴려보았다.

그러자 마음을 옥죄던 공포가 거짓말처럼 씻겨 내려갔다.

“아.”

플로라는 떠올렸다.

코르디스에서 모두가 자신을 의심할 때, 이안만은 자신을 믿어주었던 일을.

만약 그때 이안이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분명 꺾여 버렸을 것이다.

그게 플로라는 너무나 고마웠다.

이안이 자신을 구해내고 선조와 함께 싸워, 새로운 꿈을 만들어준 일도 기억났다.

이안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플로라는 없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안에게는 고마운 일뿐이다.

처음에는 조금 재수 없고 거슬렸지만, 어쩌면 처음으로 친구라고 부를 만한 존재.

그리고 플로라는 깨달았다.

자신이 이안을 많이 신뢰하고, 의지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 감정은 단지 동료나 친구 사이의 우정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까보다 거세게 뛰는 심장과 빨개진 볼이 그걸 증명했다.

지금 이 감정을 이안에게 고백할까?

“아니야.”

플로라는 고개를 저었다.

타이밍이 너무 나빴다.

지금은 다른 무엇보다 싸움에 집중해야 할 때.

딴 생각은 금물이다.

그렇기에 플로라는 결심했다.

“이 싸움이 끝나면…….”

반드시 마음을 전하겠노라고.

단지 용기가 없어 뒤로 미뤘다는 것을, 플로라는 끝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

이안은 딱딱하게 얼어붙은 바다 위에 서 있었다.

성주가 휘몰아치는 눈보라 너머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바다가 어는 속도가 빠릅니다. 이대로라면 얼마 안 가 악마들이 건너올 겁니다.”

“…….”

이안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큼 살을 에는 추위가 계속 된다면, 바다가 완전히 얼어버리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이안이 물었다.

“지원군은 좀 왔습니까?”

“병력들이 조금씩 계속 오고는 있지만 본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날씨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 듯합니다.”

살벌하게 내리는 눈에 길이 막혔다. 이런 날씨에는 보급도 어렵고, 행군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피해를 생각 안 하고 과감히 이동한다면 어떻게든 이곳에 당도할 수는 있겠지만, 조금이라도 이익을 보기 위해 이기적으로 굴던 왕국들이다.

그들이 그렇게 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최악의 상황에는 저희끼리 악마를 맞아야 할 수도 있겠군요.”

성주가 물었다.

“예. 그렇겠군요. 그러면 요새에 들어가 맞이할 겁니까? 아니면 힘들더라도 연안을 사수할 겁니까?”

이곳 연안은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 덕분에 바다로 통하는 입구가 매우 좁았다.

이곳에 전쟁 대비를 한 것도 바로 그런 지형적 이점 때문이다.

문제는 현재로서는 병력이 부족하다는 것인데…….

“저는 웬만하면 여기서 버텨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새에 들어가면 당장 성벽 때문에 안전은 하겠지만, 뒤에 있을 지원군과 연계하기가 힘들어질 테니까요. 당장 편하자고 훗날 더 힘들어지는 길을 선택하는 셈이에요.”

“알았습니다. 병사들이 두려워하겠지만, 그건 제가 잘 해결하겠습니다.”

시원시원한 태도에 이안은 성주를 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반대는 안 하시는 겁니까?”

“저야 이안 님께서 하신 말들을 따를 뿐입니다. 성공하면 좋은 것이고, 안 되면 뭐. 저희 운이 거기까지인 것이겠죠.”

성주가 이번에도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그런 성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안이 물었다.

“성주님은 두렵지 않습니까?”

“두렵지 않냐고요?”

“예. 우리가 상대하려는 적은 강합니다. 아마 싸운다면 살아남는 사람보다 죽는 사람이 더 많겠죠. 그런 적들과 남들보다 앞서서 싸워야 하는데, 두렵지 않은가 해서요.”

“흠…….”

성주는 덥수룩한 수염을 오른손으로 쓰다듬었다. 무언가를 생각할 때 나오는 성주의 버릇인 듯했다.

잠시 고민하던 성주가 입을 열었다.

“글쎄요. 딱히 두려운 것 같지는 않군요.”

“그렇습니까?”

“예. 저희 가문에서는 대대로 이곳에서 전쟁을 준비하고, 악마들을 막아내는 일을 맡아왔습니다. 제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리고 그 위에 선조들도 짊어져 왔던 숭고한 의무지요. 이 일이 저에게는 농부가 농사를 짓고, 어부가 물고기를 잡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인 겁니다.”

이안은 성주의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했다.

성주가 이어 말했다.

“물론 죽음은 영 유쾌하지 못한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실패해서 대륙이 엉망이 될 수도 있죠. 하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최선을 다했다면. 설령 결과가 따라주지 않는다 해도 저는 제 삶에 만족할 겁니다. 삶에 만족한다면, 두려울 일도 없겠죠.”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으로 됐다라…….”

참 부러운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었다.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이안은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사고방식이기도 했다.

이안이 성주의 말을 곱씹고 있던 그때.

정찰을 맡은 병사 하나가 달려왔다.

“헉. 헉. 성주님!”

“무슨 일인가?”

급하게 뛰어왔는지 가쁜 숨을 고르던 병사가 다급하게 말했다.

“바다가 생각보다 더 빠르게 얼고 있습니다! 이제는 저 멀리 악마들이 보일 정도입니다!”

“젠장. 이건 너무 빠르잖아!”

성주가 곧바로 물었다.

“악마의 군세를 확인했나? 그 규모가 어떻지?”

“아직 거리가 멀어서 정확한 수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새까맣게 뭉친 괴수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쯧.”

작게 혀를 찬 성주가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 하던 작업에 박차를 가하라! 이르면 사흘 안에 악마들이 몰려올 것이다!”

“옙!”

명령을 내린 성주는 이번에는 이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곳은 제가 맡겠습니다. 이안 님도 이안 님만의 준비를 해주십시오.”

“……네.”

이안은 곧장 성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이제 며칠 안에 악마의 군세가 몰려들 것이라는 소식에 요새 안은 소란스러웠다.

“버, 벌써 악마가 온다는데?”

“뭐? 지금 병력도 다 안 왔잖아! 지원군은 언제 오는데?”

“그걸 아무도 모른대. 어쩌면 지원군이 안 올 수도 있어. 날씨가 이렇잖아. 우리는 미끼로 던져놓고 후방에서 막을 생각일 수도 있지. 그러면 우리는 개죽음인 거야.”

“하, 하지만 영웅님들이…….”

“멍청아! 영웅들은 싸우는 척하다가 적당히 도망치겠지.”

떠들던 병사들은 지나가는 이안을 보더니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병사들이 공포에 떨고 있어.’

악마와 싸운단 심리적인 두려움.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지원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들의 마음을 몰아붙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날씨 때문에 사실상 탈영이 불가능하다는 점일까.

‘레아가 너무 늦기 전에 와줘야 할 것 같은데.’

일단 레아 쪽으로 소식은 전해두었다.

하지만 사흘이라는 시간은 계획보다 더 빠듯하다.

레아가 도착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며, 몇 명이나 이곳에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급하게 행군하고 온 만큼, 병력의 체력도 많이 소모되어 있을 것이다.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해야 할 일을 하고, 최선을 다한다.”

작게 중얼거린 이안은 숙소로 가 동료들을 찾았다.

마침 동료들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이안이 들어서자 플로라가 벌떡 일어섰다.

“이안! 얘기 들었어! 곧 악마들이 온다며!”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사흘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어찌 될지 모르니 미리 대기는 하고 있어야 해. 그러니 다들 준비해.”

“아, 응!”

“알았다 이안.”

플로라는 허둥지둥하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고, 우마딜로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스텔만이 멍하니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뭐 준비할 거 없어?”

“응.”

“하나도 없어? 좀 고민해봐.”

스텔은 로브의 품을 슬쩍 어루만졌다.

성서가 있었고, 교단의 상징이 있었다.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 스텔이 말했다.

“……준비 끝.”

“그래. 최대한 없이 사는 게 너희 종파 교리였지. 너답다.”

“……응!”

딱히 칭찬하는 말도 아니었지만 스텔은 왜인지 기뻐했다.

그 모습에 이안이 쓴웃음을 짓는 사이, 플로라와 우마딜로가 금방 돌아왔다.

우마딜로의 손에는 늘 쓰던 지팡이와 손도끼가 들려 있었다.

그것 외에는 작은 가방을 허리에 매달았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플로라는 옷을 갈아입었다. 좀 더 전투에 적합하면서도 화려한 옷이었다.

“큰 싸움을 하면, 당연히 그에 걸맞는 복장을 해야 하지 않겠어?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텐데, 플로라 피에람이 후줄근하게 입었다는 오명을 남게 할 수는 없지.”

“그래. 너도 참 너답다.”

“뭐야 그거. 칭찬 맞아?”

불퉁하게 쳐다보는 플로라를 무시하며 이안은 대충 동료들을 둘러봤다.

“확실히. 마지막이라 그런지 별로 챙길 게 없나 보네.”

“잡다하게 가지고 다녀봐야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식탁을 가리켰다.

“그럼 식사나 하자. 마지막이니만큼 원 없이 먹어보자고. 술도 마시고.”

“그래도 괜찮나?”

“성주가 말했어. 나는 나만의 준비를 하라고. 너희들이랑 같이 밥도 먹고, 술도 좀 마셔야 마음이 좀 진정될 것 같아.”

계속해서 마음을 괴롭히던 공포를 분명 동료들도 느끼고 있을 거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홀로 삭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함께 나누고 얘기하다 보면, 분명 훨씬 괜찮아질 것이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이안은 마지막으로 동료들과 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그게 이안이 마지막 싸움. 그리고 이별을 준비하는 방식이었다.

***

별의 가장 북쪽.

찬 바람이 몰아치는 얼음 섬.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몰려드는 이 불길한 공간에 사람들은 지옥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지금 그 지옥 앞에 악마의 군세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서 있었다.

하나하나가 악몽에 나올까 두려운 끔찍한 괴수들이다.

그들은 질서 정연하게 서서 그들의 주인이 명령을 내려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최초의 악마이자 모든 악한 것들의 아버지. 대악마는 그런 괴수들을 보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마침내 때가 되었다.”

대악마는 천천히. 하지만 우아하게 손을 들며 말했다. 그 손끝은 남쪽을 가리켰다.

“가라. 가서 어둠이 빛을 집어삼키러 왔음을 알려라. 대륙의 인간들에게 영원한 밤을 선사해주어라.”

우어어어어!

하늘을 향해 일제히 울부짖은 괴물들이 천천히 전진을 시작했다.

군세가 움직이자 마치 새까만 파도가 일렁이는 것과 같이 보였다.

주인의 명령을 받은 이들은 계속해 전진할 것이다.

대륙을 모조리 불태우고 마지막 남은 인간까지 숨을 거둘 그날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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