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결실
아군은 얼어붙은 바다 위에 진형을 잡고 서 있었다.
연안의 좁은 입구를 단단히 막아선 모양새였다.
창을 쥐고 선 한 병사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시발. 우라질. 존나게 무섭네. 3년 전에 돌아가신 엄마가 보고 싶어.”
“시끄러워. 정신 안 차리면 곧 네 엄마를 보게 될 거다 이 새끼야.”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바다 건너편에서 어떤 괴물들이 몰려올지. 오히려 실체가 보이지 않기에 더더욱 두려웠다.
게다가 아직 지원군이 도착하지 않았다. 이쪽의 수가 적었다.
성주가 혀를 차며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끼리 싸워야 할 것 같습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형은 이쪽이 유리하니, 지원군이 올 때까지 최대한 버텨보죠.”
이안은 동료들과 함께 진형의 선두에 섰다.
성주는 뒤에 있으라고 권고했지만, 사기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었다.
거센 추위와 두려움 때문에 병사들은 잔뜩 위축되어 있었다.
이안은 일부러 의연하게 서서, 저 눈보라 너머를 응시했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보초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왔습니다! 놈들이 왔어요!”
그 짧은 문장에 병사들의 긴장이 바짝 올랐다.
동시에 이안은 성검을 들어 하늘을 향해 뻗었다. 그리고 호크를 소환해 일부러 이안의 주위를 환하게 비추었다.
이제는 완전체가 되어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성검이 호크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어두컴컴한 눈보라 속에서 흩날리는 빛무리.
그 극적인 연출은 병사들을 압도했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이안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안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빛을 쐬었다.
신화에서나 나올법한 모습에 병사들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이안을 응시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들이 지금,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것을.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던 두려움이 슬며시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들어차는 것은 흥분과 용기.
그리고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 모두의 마음이 적절히 들떴다고 판단한 이안이 입을 열었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힘 있는 목소리는 모두의 마음을 잡아끌었다.
“나는 신께 선택받아 악마를 처단할 사명을 부여받은 영웅이자 죽지 않는 불사신이다. 저 앞에 어떤 괴물이 오든 나를 믿고 끝까지 싸워라. 그리하면 승리를 안겨주겠다. 그대들의 이름은 대륙을 구한 용사로서 영원토록 기억될 것이다.”
허세 섞인 말과 이안조차 확신할 수 없는 약속은 그도 내뱉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어려운 싸움이 될 거라고. 위험할 거라고 솔직히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병사들을 격려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안이 선언에 병사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길 수 있어.”
“우리가 막아내는 거야.”
병사들은 이안을 믿는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이안을 믿고 이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일을 그르치면 저들은 이안을 원망하겠지.
엄청난 중압감이 이안의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내색할 수는 없다.
이안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전방을 응시했다.
그 강직한 태도에 병사들도 소리 높여 환호하기보다는 조용히 의지를 다잡았다.
주위에는 다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소리만이 들렸다.
내려앉은 정적 속에서 놈들이 접근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이안이었다.
이안이 중얼거렸다.
“왔군.”
그 말을 하고 나서 한 박자 뒤에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두웅―!
마치 거대한 북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사방에 퍼져나갔다.
절로 척추가 곧추서고, 소름이 돋을 정도로 불길한 소리이기도 했다.
두웅! 두웅!
북소리가 간격을 두고 이어졌다.
동시에 병사들도 보기 시작했다. 눈보라 저 너머에서 파도가 일렁였다.
진짜 파도는 아니다. 단지, 괴물들이 너무 많아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꿀꺽.
정적 속에서 누군가가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기껏 북돋운 용기가 다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둥! 둥! 둥! 둥!
북소리가 더 빨라졌다. 북소리에 맞춰 악마의 군세도 빨라졌다.
군세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는데, 그들이 발을 구르는 소리가 지면을 울렸다.
그 진동이 전해져, 가만히 서 있는데도 몸이 뒤흔들릴 정도였다.
아예 얼음이 부서져 그대로 바다에 빠져 버리면 좋으련만.
추운 날씨에 꽁꽁 언 바다는 괴수들의 요란한 전진에도 금조차 가지 않았다.
성주는 굳은 얼굴로 손을 들어 올렸다.
마법사들이 마법을 준비하고, 궁수들이 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적이 가까워졌다.
이제는 놈들의 흉측하고 혐오스러운 외모가 선명히 보였다.
악마의 군세는 소름 끼칠 정도로 차분하게 전진했다.
그들은 두려움이 없었다. 두려워하는 건 인간들뿐이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성주는 긴장한 채 날카로운 눈으로 거리를 가늠했다.
거리가 중요했다.
충분히 가깝지 않으면, 마법을 날려봤자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때. 한 마법사가 결국, 공포와 초조함을 이겨내지 못했다.
“으, 으아아악!”
비명을 지른 마법사는 준비하던 바위 마법을 적들에게 던졌다.
그리고 그걸 신호로, 마법 폭격과 화살들이 적을 향해 퍼부어졌다.
“이런 멍청한 새끼들! 멈춰!”
성주가 다급히 외쳤지만, 혼란스러운 전장에서는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마법사들은 공포를 잊기 위해 계속해 마법을 날렸다.
마법과 화살에 얻어맞은 괴수들이 바닥에 엎어졌다.
하지만 거리가 거리인 만큼, 기대보다 효과가 미비했다.
악마의 군세는 반격 없이 그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들은 기다렸다.
그리고 마법사들이 지쳐서 이내 마법 폭격이 뜸해졌을 때.
놈들의 대장격으로 보이는 괴수가 울부짖었다.
“우어어어어!”
그걸 신호로 군세가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 마법이 필요했던 것인데, 정작 지금 그 마법이 없다.
이안이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플로라. 화려하게 부탁해. 여기서 사기가 꺾이면 안 돼.”
“응. 맡겨둬.”
소매를 걷어붙인 플로라가 양손에 불덩이를 만들어냈다.
불덩이가 순식간에 크기를 불렸고, 플로라는 이내 양손을 모아 불덩이를 합쳤다.
거기까지 이르는 데에 사용한 시간은 찰나.
플로라는 망설임 없이 거대한 불덩이를 달려오는 괴수들의 한복판으로 던졌다.
번쩍!
섬광이 뿜어지며 주위의 모든 소음을 먹어치웠다.
무음 속에서 거대한 불꽃이 피어났고, 뒤늦게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꽈르릉!
터져 나간 불꽃은 그대로 양옆으로 길게 뻗어 나갔다.
하늘마저 불태우는 불꽃의 장벽.
그 장벽에 닿은 괴수들은 예외 없이 불타 사라졌다.
“끼에에엑!”
“꺄아아아악!”
한번 돌진을 시작한 군세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뒤에서 밀치는 힘으로 인해 괴수들은 계속해서 플로라의 불꽃으로 뛰어들었다.
불꽃은 그런 괴수들을 흔적도 없이 먹어치웠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병사들이 멍하니 서 있었다.
저 불꽃의 장벽은 그들의 상식을 아득히 웃도는 마법이었다.
이안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이 늘었어.’
게임에서보다 강해진 건 이안 만이 아니다.
분명. 동료들도 정해진 것보다 더 강한 실력을 가졌다.
플로라도 본인의 성취가 기쁜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하하. 이게 피에람의 저력이야! 더 놀라워해도 좋다고?”
“잘했어. 하지만 너무 무리는 하지 마. 싸움은 기니까.”
“그러려던 참이야.”
플로라가 마법에 들이는 집중을 거둬들이자, 불꽃의 장벽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매캐한 연기와 고기가 타는 냄새가 자욱하게 풍겼다.
불꽃이 약해지자 적은 동료의 시체를 짓밟고 다시 돌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까 전과 비교해 그 기세가 꺾인 건 명확했다.
두려움에 떨던 아군도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모두 준비해라!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을 사수하는 거다!”
“예!”
방패수들이 거대한 방패를 단단히 고정하고, 그 뒤의 병사들이 창을 겨눴다.
이내 군세의 선두와 아군의 방패수들이 맞붙었다.
쿵!
“끄악!”
“꺼어억!”
“바로 빈자리 메워!”
충돌로 인한 충격을 버텨내지 못한 방패수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대기하고 있던 다른 이들이 재빨리 방패를 들고 자리를 메웠다.
괴수들은 대열을 뚫기 위해 방패수에게 그 흉한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몇몇은 괴력을 이용해 방패째로 뺏어 들려는 시도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뒤에 있던 창병들이 일제히 창을 찔렀다.
“캬아아악!”
연금술 시약이나 성수 따위가 발린 창끝에 찔리자, 괴수들이 고통어린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숨을 골랐으면 다시 마법을 준비하라!”
병사들이 시간을 버는 동안.
마법사들이 다시 여력을 되찾았다.
그들은 일제히 주문을 준비했고, 이내 괴수들을 향해 마법을 퍼부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마법 폭격이 괴수들의 한 가운데를 강타했다.
괴수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사기가 오른 병사들은 놀랄 정도로 잘 싸웠다.
가끔 강한 개체가 돌진해 대열이 무너질 뻔한 적도 있었지만, 그럴때는 스텔과 우마딜로가 나서서 처리했다,
그리고 이안은…… 악마들의 한복판에서 날뛰었다.
“캬아아악! 저놈을 죽여라! 기분 나쁜 놈이다!”
“그래. 말을 할 줄 아는 거 보면 너도 제법 높은 놈인가 보지?”
악마의 군세는 대부분 지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괴수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개중에는 영리하고 강한 개체도 있었다.
그들이 군세의 자잘한 지휘를 맡고 있었고, 군세의 저 뒤에는 지휘관으로 보이는 악마들도 눈에 들어왔다.
대악마만큼은 아니어도 강한 기운을 흩뿌리는 악마.
그런 적들이 바로 이안이 상대해야 할 이들이었다.
이안은 악마의 군세에서 한가운데에서 성검을 휘둘렀다.
강해질 대로 강해진 이안의 움직임은 더는 괴수들 따위가 어떻게 해볼 수준이 아니었다.
이안은 강한 개체를 찾아 거침없이 움직였다. 그가 지나간 곳에는 토막난 괴수들의 시체만이 남았다.
지휘를 맡은 괴수들이 죽자 군세도 전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못하였다.
보다 못한 악마 하나가 이안 앞에 내려섰다.
3미터는 족히 넘어갈 체구에 박쥐 같은 날개를 가진 악마였다.
악마가 외쳤다.
“건방진 인간아. 네 마음속 두려움이 나에게는 보인…… 아?”
악마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목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어느새 다가온 이안은 성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악마를 상대로는 그 어느 명검 못지않은 성검이 순식간에 악마의 몸을 여러 조각으로 토막 내었다.
마지막으로 이안은 검을 위로 뻗어 악마의 머리마저 반으로 가른 뒤, 무심하게 말했다.
“악마치고는 너무 약해.”
이안은 다음 상대를 찾아 움직였고, 그때마다 검을 휘둘렀다.
지휘관을 잃은 괴수들은 이내 본능대로 행동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병사들의 부담이 크게 줄었다.
아군은 놀라울 만치 잘 싸웠다.
사상자와 부상자의 숫자도 처치한 괴수에 비하면 미미한 정도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괴수의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다는 것.
한 무리의 괴수들을 무찌르면 이내 똑같은 숫자의 괴수들이 뒤에서 몰려왔다.
끝도 없는 괴수의 파도.
아무리 잘 싸운다고 해도 계속 싸우다 보면 인간은 지치고 피로해진다.
병사들이 교대해가며 하루를 꼬박 싸울 즈음. 그 여파가 여실히 나타났다.
병사들이 지치다 보니 점점 사상자가 늘어났다.
게다가 집중력이 필수인 마법사들에게 무엇보다 치명적인 게 바로 피로였다.
괴수들을 헤집어 놓던 마법들이 점점 뜸해지자, 병사들은 더 멀쩡한 상태의 괴수들과 싸워야 했다.
이따금 플로라가 화염 마법으로 분위기를 환기했지만, 플로라 역시 무한정으로 마법을 난사할 수는 없었다.
‘큰일인데.’
이안은 괴수들 사이에서 분투했다.
하루를 꼬박 싸웠지만 이안은 여전히 쌩쌩했다.
문제는 그가 아무리 활약해도, 압도적인 숫자 앞에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대로 요새로 후퇴해야 하나? 한번 이곳을 내주면 그 뒤에 더 문젠데…….’
갈등이 일었다.
그리고 고민이 깊어질수록, 병사들이 죽어 나갔다.
이제는 예비대까지 합세해 악착같이 싸우고 있지만, 머지않을 때에 한계는 올 것이다.
“쯧.”
작게 혀를 찬 이안은 땅을 힘껏 박차 성주의 옆에 내려섰다.
성주는 커다란 도끼를 붕붕 휘두르며 괴수들을 갈라 버리고 있었다.
이안의 접근에 성주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후우. 후우. 하실 말씀이라도?”
“지금 상황이 어떤 것 같습니까.”
이안의 질문에 성주는 곧바로 답했다.
“안 좋습니다. 병사들이 많이 지쳤어요.”
예상하고 있던 대답에 이안이 물었다.
“여기서는 후퇴하는 게 맞겠죠?”
“그건 이안 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여기서 모두가 죽을 때까지 싸운다고 해도, 저는 분명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안이 결정해야 할 일.
무의식중에 남에게 책임을 넘기려 한 이안은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그래. 내가 선택하고 책임져야지.’
이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 피가 튀고, 비명이 들렸다.
두 다리를 잃은 병사가 어떻게든 기어가 괴수를 베었고, 마법사들은 코피가 터져가면서도 마법을 사용했다.
기사. 마법사. 병사. 귀족. 성직자.
어떤 위치에 있든 모두가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악마를 막아내기 위해.
대륙을 지켜내기 위해.
자신의 가족, 혹은 소중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그 처절한 모습에 이안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이안은 숨을 힘껏 들이켰다.
“모두 요새로 후…….”
그때였다.
빠아아앙―.
갑작스럽게 들린 뿔피리 소리가 이안의 말을 가로막았다.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병력들.
그 선두에 선 레아의 의기양양한 얼굴이 보였다.
“…….”
이안은 말을 잃고, 멍하니 뒤쪽을 쳐다보았다.
정말로 신이 도운 걸까.
아니면 기적이라는 게 정말로 존재하는 걸까.
절묘한 타이밍에 지원군이. 지원군이 도착했다!
그것도 이안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의 대병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