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결실(2)
“지원군이다! 지원군이 왔다!”
“이제 우린 살았어!”
환희가 퍼져나갔다.
병사들은 기뻐했고, 성주 역시 한시름 놓았다는 듯. 이안에게 말했다.
“아슬아슬했습니다. 역시, 이곳에서 버티길 잘했군요.”
다만. 이안으로서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이런 악조건 속에서 이렇게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것도 저렇게 많은 숫자가!
기적. 기적이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빠아아아앙!
뿔피리 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그걸 신호로 지원군이 이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
사람들의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괴수들의 울부짖음조차 묻혀 버릴 정도의 기세였다.
가장 먼저 도착한 건 말을 탄 레아와 제국의 기사들이었다.
두꺼운 창을 든 기사들은 괴수들을 향해 곧장 돌진해, 적의 대열을 말 그대로 분쇄해 버렸다.
강력하고 거대한 괴수들조차 힘이 가득 실린 기사들의 기마 돌격에는 버텨낼 수 없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던 이안이 레아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이만한 병력을. 이렇게 빠르게 이끌고 온 겁니까. 대체 무슨 기적을 부렸기에.”
“글쎄요. 저는 별로 한 게 없는데요?”
“예?”
의미심장한 레아의 말에 이안이 얼빠진 얼굴로 되묻던 그때.
다음 이들이 도착했다.
“전사들이여! 선조께 부끄럽지 않은 싸움을 펼쳐라!”
날카로운 인상과 이국적인 이목구비. 두려움을 모르는 맹자들.
그들은 바로 초원에서 온 전사들이었다.
전사들의 선두에 서서 말을 몰아 달려온 거구의 사내가 이안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다! 이안!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전사들을 전부 모아 달려왔다.”
“대칸…….”
“해후는 나중에 푸는 것으로 하지. 몸이 근질근질하군.”
“오랜만이네 이안! 이따 보자고!”
대칸이 앞장서고. 라이젤이 밝게 인사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 뒤로 대칸의 아들딸들과 각 부족의 부족장. 그리고 초원의 전사들이 뒤따랐다.
모두 이안이 아는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말에 탄 채로 각궁을 들어 화살을 메겼다. 그리고 기사들의 돌격으로 엉망이 된 괴수들에게 화살 비를 퍼부었다.
후두둑!
화살에 얻어맞은 괴수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전사들은 이내 활을 내려놓고, 곡도를 들어 미친 듯이 휘둘렀다.
전사들의 날카로운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괴수들의 머리가 이곳저곳을 날았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는 사이. 이어서 다음 부대가 이안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다.”
“오랜만이에요 이안 님!”
하얀 갑옷으로 온몸을 중무장한 성기사.
게르하르트가 특유의 오만한 얼굴로 인사했고, 옆에서는 은신술의 대가. 메리가 반갑게 손을 방방 흔들었다.
게르하르트가 말했다.
“성도에서의 나는 형편 없었다. 많은 무력감을 느꼈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를 거다.”
“……기대할게.”
“음!”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게르하르트와 메리가 앞장서고, 그 뒤를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뒤따랐다.
그들은 이안에게 인사하며 기도를 읊었고, 이안도 그들의 인사를 일일이 받아주어야 했다.
기사와 전사들이 창과 검이었다면 이들은 방패.
대열을 이룬 성기사와 사제들은 차분히 걸어가 괴수들을 묵직하게 분쇄하기 시작했다.
전투 중에도 일절 흥분하지 않으며 경건하게 싸우는 저들의 모습은 과연 신의 종복이라 할만했다.
성직자들 다음으로 곧바로 다음 부대가 도착했다.
선두에 선 건 대머리에 얼굴에 흉터가 많은 중년 사내와 흰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었다.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이안을 보며 말했다.
“이 자식 이거, 안 본 새에 얼굴이 훤해졌네? 영웅은 좋은 것만 먹고 다니나?”
“그러는 너는 여전히 험악한 얼굴이네. 잭. 레이먼도 좋아 보여요.”
이안의 대답에 잭과 레이먼이 미소를 띄웠다.
“허허. 자네 덕분에 코헨은 새 터전에서 발전을 이루고 있다네. 아마 와보면 깜짝 놀랄 거야. 이제 코헨은 예의 그 더럽고 우중충한 곳이 아닌, 맑고 청결한 곳이라네.”
“나중에 꼭 들를게요.”
“약속했네.”
옆에서 잭이 단검을 꺼내 들고 목을 뚜둑― 풀며 말했다.
“위험하다는 얘기 듣고 바로 달려왔다. 식구가 위험에 빠졌다는데, 도우러 와줘야 하지 않겠어?”
“그래. 고맙다.”
“고맙기는. 당연한 일이지.”
씨익 웃은 잭은 이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 뒤로 코헨에서 본 잭의 조직원들과 지하 감옥에서 봤던 죄수들이 지나쳤다.
그들은 이내 품에서 연금술 시약을 꺼내 꿀꺽 삼킨 뒤. 단검을 들고 악마들에게 돌진했다.
방어는 생각하지 않는 오로지 공격 일변도의 단검술.
코헨의 사내들다운 모습이었다.
그 뒤에 온 건 코르디스의 학생들이었다.
마틴 화이트가드가 이안을 지나치며 말했다.
“나는 사람들을 지킬 거야. 형이라면 그렇게 했을 거니까.”
“……예.”
학생들은 지나가며 자신들의 특기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다종다양한 마법과 정령이 전장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 유독 눈에 띄는 검사가 한 명 있었다.
한쪽 팔로 맹렬하게 전장을 누비는 외팔이 검사.
그의 이름이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루크…….”
악마에게 팔을 잃은 소년. 하지만 소년은 아픔을 딛고 일어서, 더 높은 경지에 닿아 있었다.
검을 휘두르던 루크는 이안을 슬쩍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예의 그 독한 느낌이 없었다. 어딘가 후련한 모습.
이안도 마주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지원군은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피에람 가문의 사람들도 합세했고, 숲의 종족들도 이안에게 인사하며 지나갔다.
아이벤의 용병들도. 왕국의 병사들도 악마들을 향해 고함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연신 밀리던 인간들이 드디어 괴수를 몰아내고 있었다.
그 광경에 압도된 이안이 멍하니 있자, 이네스가 말했다.
[아까 지원군이 늦지 않고 도착한 게 기적이라고 생각했죠? 틀렸어요. 봐봐요. 다 이안과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이네스는 적과 싸우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코르디스. 코헨. 대초원. 교단. 피에람. 아이벤. 황궁. 대수림.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서로 한데 뭉쳐, 적을 몰아내고 있었다.
[모두 이안이 도움을 주고, 구해주고, 은혜를 베풀었던 이들이에요. 그렇기에 이런 날씨에, 위험을 감수하고. 목숨을 걸어서라도 무리하게 이곳에 온 거예요. 이안에게 받은 도움을 갚기 위해서요!]
‘돕기 위해서…….’
[그러니 이건 기적도. 우연도. 신이 도운 것도 아니에요. 모든 건 이안이 그동안 한 모든 노력과 남을 위해 행했던 모든 행동들이 필연으로 돌아왔을 뿐이죠. 악마를 상대하고 많이 흔들리는 거 알아요. 하지만 봐요.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죠?]
이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뛰었다. 모두가 이안을 위해 이곳에 달려 와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말로는 다 표현하기 힘든 기분이었다.
그런 이안의 등을 이네스가 가볍게 밀었다.
[가요 이안. 할 일이 있잖아요?]
‘……예!’
씩씩하게 대답한 이안은 땅을 힘껏 박차 전장으로 내려섰다.
그가 내려선 대지의 왼쪽에는 게르하르트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고, 오른쪽에는 대칸이 땅을 부수고 있었다.
대칸이 호탕하게 외쳤다.
“하하! 왔나? 그럼 어디, 그간 얼마나 늘었나 실력을 좀 보여주겠나?”
“꽤 놀랄 겁니다.”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한 이안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이안은 바람이 되어, 전장을 누비기 시작했다.
아까보다도 더 강한 기세. 힘찬 발걸음. 망설임 없는 검격.
이곳에 이안의 적수는 없었다.
“이대로 지옥까지 간다!”
“와아아아!”
이안의 외침에 아군이 호응했다.
그리고 격렬한 싸움이 펼쳐졌다.
상대는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바다를 메울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숫자의 적을 상대로 아군은 용맹하게 싸웠다.
그리고 밀어붙였다. 내몰았다. 악마들을 인간들의 땅에서 몰아냈다!
거센 전투가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졌다.
사람들은 얼어붙은 바다를 전진했고, 적은 쉼 없이 몰려왔다.
하지만 사람들은 멈추지 않았다. 지옥을 향해 계속 진군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언제나 이안과 동료들이 있었다.
어느새 날이 지고, 날이 밝았다.
하늘에는 여전히 먹구름이 잔뜩 낀 채 눈송이를 뿌려대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이안은 적의 저항이 거세지고 있음을 느꼈다.
숫자도 더 많고, 괴수들의 수준도 올랐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음을 이안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이안은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외딴 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 섬을 호위하듯이 빼곡히 지켜선 괴수들도.
지옥.
드디어 지옥의 앞까지 다다랐다.
지옥의 위에는 유독 짙게 깔린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꽈릉! 이따금 붉은 번개가 지상을 향해 낙하했다.
지옥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존재감과 불길한 기분.
절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위험한 냄새에 아군은 주춤했다.
하지만 이내 목적지가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사람들은 사기를 올렸다.
게르하르트가 외쳤다.
“지금부터 우리는 영웅들이 지옥에 다다르는 길을 뚫을 것이다! 용기 있는 자들은 모두 앞으로 나와라!”
게르하르트의 외침에 가장 먼저 응한 건 대칸이었다.
“하. 젊은 친구가 건방지군.”
대칸을 따라 초원의 전사들이 우르르 앞다투어 나섰다.
그 뒤를 이어 각국의 기사들이 합세했고, 코르디스의 학생들도 가담했다.
개중에는 마틴도 있었고, 루크도 있었다.
그들은 쐐기형으로 섰다.
쐐기의 선두에 선 게르하르트가 이안과 동료들을 보았다.
“지옥에 들어가는 건 언제나 다섯 명이어야만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밖에 없어. 그러니 부탁한다. 대륙을 지켜줘. 그리고 반드시 살아 돌아와라. 너는 불사신이잖아?”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도 허리에 찬 검집을 버린 뒤, 힘을 주어 말했다.
“나한테 맡겨.”
시원시원한 대답에 게르하르트가 우렁차게 외쳤다.
“좋아! 가자! 신께서 우리의 싸움을 지켜보신다!”
“선조들도 잊지 마라!”
“어머니 나무도!”
게르하르트가 달려 나가자 대칸과 초원 전사들의 뒤를 이어 숲의 종족들이 달렸다.
그 뒤를 다른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뒤따랐다.
쐐기 형태로 서서 달리는 그들을 막아낼 이는 없었다.
이안과 동료들은 그들의 뚫어놓은 길을 따라 이동했다.
천천히 걷던 플로라가 말했다.
“예전에. 코르디스에서 악마가 강림했을 때도 이런 적이 있었어. 사람들이 한데로 똘똘 뭉쳐, 적들을 뚫고 지나갔었거든.”
“그랬었나?”
레아가 기억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 일도 있었죠.”
플로라가 이어 말했다.
“그때가 유독 기억나. 모두가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이안이 빛의 정령을 두르고 나타났거든.”
“아. 거기서부터는 기억나는 것 같아. 내가 막 정령을 다룰 수 있게 되었을 때지 아마.”
“정말.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추억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플로라가 힘차게 말했다.
“자! 가자! 또다시 기적을 만들어내야 할 때야!”
플로라의 외침에 동료들이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이내 입을 모아 말했다.
“……방금 그건 조금 오그라든다.”
“그러게.”
“……응.”
“저, 저는 좋았어요. 플로라.”
플로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너. 너희들……!”
“방금 그 말, 혹시 역사서에 쓰여질거라 생각하고 미리 준비해온 거야?”
“…….”
정곡을 찌른 모양. 더 놀리는 것도 미안했던 탓에 이안이 말했다.
“그래. 가보자. 얘 말대로 기적 한번 만들어보자고.”
이안이 앞장섰다.
동료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이내 지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