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 *
"수호 씨, 괜찮아요? 10분 넘게 그러고 있어요, 지금. 어디 아파요?"
최수영의 물음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일생일대의 결정을 할 순간이 왔다.
정신 나간 염세주의자 돌아이 친구 놈의 말을 들을 것이냐.
고민하는 와중에도 계속 가치가 하락하고 있는 이 넥시트코인을 당장 팔아버릴 것이냐.
결국 고민을 마친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으아악! 제길! 어차피 이 돈으로도 인생은 안 바뀌어! 겨우 집 한 채 생길 뿐이야!"
"네? 수호 씨 왜 그래요? 진짜 어디 아파요?"
이제는 최수영이 진심으로 걱정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영 씨. 저는 넥시트코인 안 팔고 가지고 갑니다. 내년까지."
"네? 수호 씨 진짜 아픈 거 맞네. 병원 가요, 지금. 내가 데려다줄게요."
"안 아파요. 이 넥시트인가 뭔가에 제 인생을 걸어볼 겁니다. 현실이면 어떻고 메타버스면 어떻고. 어차피 찐하게 살다 가면 그만이죠."
"진짜 안 팔아요? 이 코인?"
"네. 내년까지 일단 가지고 갑니다."
"하하핫. 뭐예요, 수호 씨. 방금 전화로 무슨 고오급 정보라도 얻은 거예요? 치사하네, 정말. 나한텐 말 안 해주고."
"이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 도박이긴 해요. 수영 씨는 계획대로 얼른 팔아요."
"와, 진짜 치사하네? 자기는 가져가면서 나는 팔아라? 좋아요! 나도 가지고 갑니다! 하하핫! 존버 가즈아!"
"존버? 수영 씨 그런 말도 써요?"
"왜요? 존중하며 버티기. 뜻이 좋잖아요."
알고 저러는 거야, 모르고 저러는 거야, 이 이상한 여자는.
나도 지금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지만 이 여자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
이걸 따라온다고?
하긴, 애초에 투자금 1억은 자기한테 없어도 되는 돈이었을 테니.
어쩌면 나보단 최수영이 하는 행동이 지금 더 현실적일 수도 있겠구나.
씁쓸하다.
뭐 원래 내 돈은 아니었지만 이거 내년에 진짜 종잇조각이 되어 버리면 어쩌지…….
* * *
12월 말일이 되었다.
넥시트코인 존중하며 버티기를 통해 이상한 유대감이 생겨버린 최수영과 나는 올해 크리스마스도 함께 보내게 되었다.
크리스마스에 만나 맛있는 것도 먹고 와인도 마시고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뭐 사귀는 사이가 됐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넥시트코인 존버로 인해 둘 사이에 무언가 강력한 전우애 같은 게 생겨나면서 한층 가까워졌을 뿐이다.
11월 즈음 종말론으로 시끌벅적했던 것도 잠시, 다시 일상을 되찾은 세상은 언제나 있었던 연말과 같이 돌아가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별다른 것 없는 12월 마지막 날을 맞이했다.
다만 내 옆에는 최수영이 함께 있었다.
그리고 여기는 한강이 훤히 보이는 워커일 호텔이다.
"수호 씨, 이렇게 단둘이 호텔에 들어와 있으니 기분이 묘하네요, 그쵸. 하하핫."
"아, 네, 네. 코로나가 다시 심해지지만 않았으면 어디 분위기 좋은 와인바에서 새해를 맞이했을 텐데. 지금은 어쩔 수가 없네요. 밖은 또 너무 춥고."
"어쨌든 우리는 2022년 1월 1일 넥시트코인이 어떻게 되는지 함께 지켜봐야 하는 전우니까요! 하하핫!"
"최전우 님, 와인이나 한잔해요."
"김전우 님, 짠!"
2022년 1월 1일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넥시트코인이 어떻게 될지 확인하기 위해 최수영과 나는 2021년의 마지막 날을 함께 하기로 했다.
오늘 오후 넥시트코인의 가격은 1개당 8천 원이 되었다.
하하하.
11월 말에는 52억이었던 내 평가 금액이 오늘은 3억2천만 원이다.
빌어먹을.
그리고 내 옆에서 하하핫을 연발하며 해맑게 2022년을 기다리고 있는 최수영은 5억에 매도하려던 타이밍을 나 때문에 날려 먹고 지금은 평가 금액이 6천만 원이 되었다.
그런데도 뭐 저렇게 하하핫거리는지.
금수저가 좋긴 좋은 건가 보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자정을 5분 남긴 시간이 되었다.
"수호 씨, 이 코인 때문에 한 달 넘게 수호 씨랑 정말 많이 붙어 다녔네요. 오늘도 이렇게 같이 있고."
"그러게요. 수영 씨랑 이렇게 친해질 줄은 정말 몰랐어요. 나랑 태생부터 다른 사람이라고만 생각했거든요."
"이 남자 아직도 수저 타령이네. 그나저나 우리 그냥 친해진 거예요? 그게 다예요?"
최수영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다른 땐 참 똑똑하고 냉철해 보이는데, 이럴 때 보면 또 곰 같고……."
아니, 나는 결코 곰 같은 스타일의 사람이 아니다.
물론 알고 있었다.
나야 뭐 애초부터 최수영에게 호감이 있던 상태였고, 이제는 최수영도 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라는 사실을.
둘 중 누구라도 톡 하고 건드리면 펑 터져버릴 풍선처럼 우리의 썸은 부풀 대로 부풀어 있는 상태였다.
주변 친구들에게 이 썸 이야기를 해주면 다들 당장 붙잡으라고 했다.
내가 어디 가서 이런 부잣집 여자를 만날 수 있겠냐며 이게 바로 인생 역전 기회라고 했다.
하지만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
이 흙수저 인생은 내가 내 힘으로 끝장낼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최수영과 비슷한 수준의 사람이 되었을 때.
그때 더 멋있고 당당하게…….
순간 몰입되어 혼자 프러포즈부터 자녀 계획까지 세우고 있는 사이 최수영이 갑자기 내 어깨를 팡팡 때렸다.
"수호 씨! 무슨 생각 해요? 저기 TV 봐요! 카운트다운 곧 시작해요!"
TV에선 아나운서 출신 국내 최고의 MC 김정주가 유려한 말솜씨로 2021년의 마지막을 선포하고 있었다.
- 작년부터 이어진 코로나의 아픔이 극복되기도 전에 지난달부터는 메타버스니 종말이니 하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었죠. 참 말도 많고 탈도 많던 한 해였는데요. 어쨌든 시간은 이렇게 흘러 2022년이 되기까지 채 1분도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자, 이제 올 한해 우리를 힘들게 했던 일들은 모두 떨쳐버리고 새로운 희망의 2022년을 맞이할 시간입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모두 함께 희망찬 새해가 오길 희망하며 저와 함께 카운트다운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자, 10! 9! 8!
뭐가 저리 신났는지 최수영은 두 팔을 뻗어 올리고 큰 소리로 카운트다운을 따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마냥 저렇게 즐기고 있을 마음 상태는 아니었다.
허염환 놈의 말이 틀렸으면 어쩌지?
어차피 처음부터 내 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돈이었는데.
그나마 지금 있는 3억도 새해가 시작됨과 동시에 종잇조각으로 변해 버리겠지.
최수영까지 나 때문에 1억을 날리게 되는 거고.
그런데 또 허염환 놈의 말이 맞으면 어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진짜 메타버스 속 세상이라면?
그럼 내년부터 달라지는 세상은 뭐가 어떻게 달라지는데?
"2! 1! 땡!"
"어?"
TV 화면 속 김정주가 갑자기 사라졌다.
대신 분홍빛 배경 위에 밝은 녹색의 정육면체가 하나 둥둥 떠 있는 화면이 나타났다.
"수호 씨! 이거 봐요!"
최수영이 자신의 휴대폰을 들어 올렸는데 그곳에도 같은 화면이 보였다.
내 휴대폰 화면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저곳을 눌러봐도 휴대폰 화면은 변하지 않았고 심지어 꺼지지도 않았다.
주변을 황급히 둘러보자 거실 뒤편에 있는 전자 액자에도 같은 화면이 떠 있었다.
급히 왼쪽 팔목을 들어 스마트워치를 보았는데 그곳에도 같은 화면.
황급히 창밖을 바라보자 대형 전광판 등 눈에 보이는 모든 영상이 송출되는 기기에 같은 화면이 떠 있었다.
"수호 씨, 설마… 오늘 진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가요?"
갑자기 사방에서 경쾌한 음악이 들려왔다.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음악이 들려왔는데, TV 화면의 그것처럼 소리가 나는 모든 전자기기에서 같은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온몸의 털이 하나하나 곤두서는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그놈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허염환……. 설마……."
잠시 후 마치 뉴스 앵커와도 같은 정돈된 목소리와 말투의 음성이 들려왔다.
- 안녕하세요. '지구 메타버스' 서비스에 약간의 변동 사항이 생겨 알려드립니다. 우선, 너무 놀라거나 동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메타버스 밖에 있는 사용자들과의 연결이 일시에 끊긴다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즉, 여러분이 생각하는 종말은 없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이 '지구 메타버스' 내 모든 콘텐츠를 자유롭게 소비하고 재생산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상이 현재와 똑같이 연결될 것입니다.
많이 놀랐는지 어느새 내 팔짱을 낀 최수영이 겁먹은 눈으로 말했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수호 씨?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잠깐 더 들어보죠. 지금까지 얘기로는 크게 달라지는 게 없을 것 같은데 이렇게 대대적으로 서비스에 대한 공지를 하는 걸 보면 분명 더 전달할 내용이 있을 거예요."
"수호 씨는 이 상황이 놀랍지 않아요? 저는 너무 혼란스러운데, 수호 씨는 굉장히 침착하네요."
최수영이 내 팔을 감고 있는 자신의 팔에 더욱 힘을 주며 의지해 왔다.
물론 나도 혼란스럽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설정의 이야기를 12년 전부터 들어왔다.
이제야 허염환이 이야기했던 메타버스 이론의 퍼즐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염세주의자인 줄 알았더니 진짜 세상의 비밀을 알고 있던 게 맞았구나!'
당장 우리가 살던 세상이 가상 현실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허염환과의 논쟁을 수십 차례 펼쳐온 나는 이 놀라운 세상에 대한 나름의 철학까지 생겨 있는 상태였다.
어쨌든 '나'는 '나'다.
화면의 정육면체에서는 계속 음성이 흘러나왔다.
- 다만 두 가지의 서비스 변경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 '행성073 메타버스'와 '지구 메타버스'와의 결합 서비스가 곧 시작됩니다. 참고로 '지구 메타버스'는 다른 말로 '행성062 메타버스'라고 불립니다. 밸런스가 잘 설계된 '지구 메타버스'와는 달리 '행성073 메타버스'는 식량 자원이 턱없이 부족해져 너무 척박한 행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때문에 비교적 물자와 자원이 풍부한 '지구 메타버스'와 '행성073 메타버스'를 결합하여 이 지구에서 함께 지내는 방안을 마련하였습니다.
다른 메타버스의 사용자 내지 캐릭터들이 대거 지구로 넘어오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로 들려왔다.
왠지 평화적인 방법은 아닐 것 같다는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안 좋은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말은 도대체 어떤 망할 놈이 만든 거지…….
- 둘째, 두 메타버스의 결합 서비스가 시행됨과 함께 '지구 메타버스'의 공식 디지털 통화로 '넥시트코인'이 사용됩니다. 이 '넥시트코인'은 지구의 기존 재화로 얼마든지 거래가 가능합니다. 이미 두 달간의 시범 운영을 거쳐 이 '넥시트코인'이 지구에서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넥시트코인이 새로운 세상의 디지털 통화가 된다는 소문도 사실이었다.
- 오직 이 '넥시트코인'으로만 'N마켓'의 상품 구매가 가능합니다. 넥시트코인은 지구의 재화로 자유롭게 거래가 가능하지만, N마켓에서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넥시트코인을 사용해야 합니다. N마켓은 이 공지가 끝난 후 휴대폰을 확인하시면 첫 화면에 모두 깔려 있을 것입니다. 간단한 개인 인증 절차를 마치면 바로 사용이 가능합니다. 이상 '062-073 행성 결합 상품' 서비스에 대한 공지를 마칩니다.
TV 화면에 다시 김정주 아나운서의 모습이 나타났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유려한 말솜씨를 뽐내던 김정주 아나운서였지만 지금만큼은 마이크를 든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끔뻑끔뻑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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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1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40,000개]
[단가 8,000원]
[평가 금액 3억2천만 원]
12월 31일 최수영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8,130개]
[단가 8,000원]
[평가 금액 6천5백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