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 *
처음 근처에 떨어졌던 외계 원숭이인지 외계 로봇인지 뭔지 모를 놈들에게서는 꽤 멀어졌다.
하지만 또 다른 축구장 조각에서 나온 다양한 모양의 금속 괴물들이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스테인리스 원숭이들에게서 벗어나면서 만약을 대비해 왼손에 들고 있는 휴대폰으로 N마켓의 'WFC' 메뉴에 들어갔다.
'Weapon for Combat(전투용 무기)'.
상황을 보아하니 여차하면 무기라도 하나 사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아, 어제 보니 무기는 엄청 비싼 것도 있던데…….
사더라도 너무 비싸지 않은 것으로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최수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꺅! 수호 씨! 오른쪽!"
잠시 휴대폰에 한눈을 팔고 있다가 최수영의 외침에 급히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소처럼 큰 스테인리스 쥐 한 마리가 커다란 입을 벌리고 나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몸을 틀어 간발의 차이로 커다란 쥐의 이빨을 피해 냈다.
하지만 달리는 것을 멈추자 금세 몇 마리의 쥐가 나를 포위하고 다가왔다.
이미 한참 멀어져서 달리던 최수영도 달리는 것을 멈추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영 씨! 멈추지 말고 달려요!"
최수영에게 소리친 뒤 나는 온 힘을 다해 위로 점프했다.
내 몸은 몇 미터 높이로 붕 뜬 채 포위하고 있는 스테인리스 쥐들의 머리 위를 넘어갔고, 조금 떨어진 곳에 착지한 나는 다시 달리기 위해 허벅지에 힘을 줬다.
"으악!"
그러나 순간 다리 쪽에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과 함께 나는 앞으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내가 착지하는 순간을 노리고 있던 다른 쥐 한 마리가 내 왼쪽 종아리를 물어 버린 것이다.
급히 다른 쪽 다리로 쥐의 머리통을 힘껏 걷어차 보았으나 스테인리스 쥐의 머리는 잠시 휘청할 뿐 물고 있는 내 다리는 놓지 않았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왼손에 들고 있는 휴대폰의 화면을 엄지손가락으로 마구 터치했다.
좀 전에 달리면서 미리 'WFC(전투용 무기)' 메뉴에 들어가 놓았던 덕에 다급한 내 손가락은 무기 하나를 구매하는 데 성공했다.
언제고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 연습을 해두기도 했었고, 또 N마켓의 상품 구매 과정이 워낙 직관적이고 간결했던 덕분이었다.
오른손에 무언가 잡히는 느낌이 드는가 싶더니 가늘고 긴 검 하나가 내 손에 들려있는 것이 보였다.
검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검이 있는 곳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완벽한 검은색의 검이었다.
검의 모양과 색에 감탄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 나는 바로 오른손을 휘둘러 스테인리스 쥐의 머리통을 베어 버렸다.
"어?"
쥐의 머리통을 노리고 검을 휘두르긴 했으나 검이 파고들며 베어졌다기보다는 검이 닿자마자 검이 나아가려던 방향대로 쥐의 머리통이 잘려 나간 느낌이었다.
나는 다친 왼쪽 다리 탓에 무의식적으로 검을 지팡이처럼 이용해 쩔뚝거리며 일어났다.
이 검은 조금 전에는 닿자마자 쥐의 머리통을 잘라버리더니 지금 무의식적으로 짚은 땅에는 또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았다.
쩔뚝거리며 일어나자 이미 주변엔 수많은 스테인리스 쥐가 모여들어 있었다.
하지만 내 손에 들린 검을 두려워하는 듯 쉽사리 달려들진 못하고 있었다.
서로 눈치를 보는 것인지 의사소통을 하는 것인지 자꾸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주변을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쥐들을 보며 나는 검을 양손으로 강하게 꼬나 쥐고 외쳤다.
"그래, 해보자. 이 쥐새끼들아!"
여덟 배 향상된 신체 능력과 이 요상한 까만 검.
이 정도면 저 반짝거리는 스테인리스 냄비 같은 괴물들을 충분히 이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호 씨, 다리!"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최수영이 피가 철철 나는 내 다리를 보며 걱정했다.
"괜찮아요. 잘린 것도 아닌데요, 뭘."
"그런데 저 쥐들이 지금 수호 씨를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글쎄, 잘 모르겠어요. 두려워한다면 달아나야 할 텐데 그러지는 또 않고. 아마 이 검은 무서워도 나는 우스워 보여서 간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요?"
생각해 보니 괘씸하군.
"아무튼 당장 달려들지 않으니 잘 됐어요. 잠깐만 기다려 봐요."
최수영이 자신의 휴대폰을 잠시 만지작거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손에 하얀색 스키 장갑 같은 게 생겨났다.
"그게 뭐예요 갑자기? 스키 장갑?"
"몰라요. 'HT' 메뉴에서 제일 비싼 거 하나 사봤어요, 일단."
'Healing Tool(치료 장비)'이라는 설명이 쓰여 있는 'HT' 메뉴에는 상처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설명의 상품들이 몇 개 있었다.
그런데 그중 제일 비싼 상품은 5,000NXT짜리 무슨 장갑이었던 것 같은데?
"제일 비싼 거? 그 5,000NXT짜리요?"
"네. 그런데 이거 어떻게 쓰는 거지?"
다해서 8,000NXT 정도 가지고 있었을 텐데 5,000NXT짜리 상품을 이렇게 쉽게 사버렸다고?
참 통도 큰 여자였다.
가만, 그런데 내가 들고 있는 이 검은 얼마짜리지?
저 쥐들만 처리하고 바로 확인해 봐야겠다.
그러는 동안 최수영은 장갑 낀 손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내 다리 쪽으로 뻗어보았다.
"어? 된다!"
최수영의 스키 장갑에서 아주 옅은 붉은 색의 빛이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그 빛은 곧 내 왼쪽 다리를 감쌌다.
쥐들을 경계하느라 힐끗힐끗밖에 보지 못했지만 분명 다리에 나 있던 큰 구멍들이 메워지는 것이 보였다.
내 다리가 낫고 있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다급해진 건지 스테인리스 쥐 한 마리가 결국 입을 크게 벌린 채 몸을 날려 왔다.
"기다리고 있었다. 이 쥐새끼들!"
싸움을 즐기진 않았지만 대한민국의 평범한 남중 남고 출신답게 싸워볼 기회는 참 많았다.
중2 때 허염환을 괴롭히던 일진 박영식을 한 방에 보내버린 후로 싸움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축구면 축구, 농구면 농구, 딱히 못하는 운동이 없던 나 김수호가 아닌가!
서걱!
힘껏 내려친 내 검과 부딪힌 금속 쥐는 서걱 소리를 내며 아까 그 쥐처럼 머리통이 반 토막이 나버렸다.
양손에는 무언가를 베었다는 느낌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크게 검을 휘둘렀는데 정작 손에는 아무런 충격이 전해지지 않자 관성에 의해 검이 회전하며 몸이 휘청거렸다.
아직 강화된 신체 능력에 완벽히 적응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 틈을 노린 쥐들이 동시에 덮쳐 들어왔지만 나 역시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직 익숙하진 않지만 어쨌든 여덟 배의 운동 신경과 근력이 생긴 상태.
나는 휘청거리는 몸은 그대로 둔 채 두 팔에 힘을 모아 다시 한번 검의 방향을 틀며 크게 회전시켰다.
첫 번째 쥐를 벤 뒤 바닥으로 내리꽂히고 있던 기다란 검은 다시 원심력을 얻어 물결치듯 위쪽으로 그 방향을 틀었다.
검이 내려쳐지는 빈틈을 노리고 재빨리 달려들었던 쥐들은 갑자기 궤도를 바꾼 검에 부딪히며 그대로 몸통이 두 갈래로 갈라져 버렸다.
신기한 점은 검 끝이 겨우 닿기만 한 쥐도 그대로 반 토막이 나버린다는 것이었다.
검이 깊게 베어져 들어가든 얕게 베어져 들어가든 검에 맞닿은 쥐들은 검이 지나가는 방향대로 그대로 갈라져 나갔다.
"어때요? 좀 하죠? 하하. 저 스뎅 쥐들, 이젠 무섭지 않아요."
"수호 씨, 저도 뭐 도울 일이 있을까요? 잠깐만요."
나는 다시 휴대폰을 톡톡 터치하며 무언가를 찾고 있는 최수영의 손가락을 가만히 잡아 휴대폰에서 떼어놓았다.
"이미 너무 비싼 걸 샀잖아요. 그 장갑 6조 원짜린 거 알아요? 다리 치료해 줘서 고마워요. 이제 나한테 맡겨요."
"6조? 급해서 사긴 했는데 이젠 뭐 현실 감각이 좀 떨어지네요. 6조 원이라니……. 하지만 100조 1,000조가 있으면 뭐 해요, 일단 살아야죠."
"그 살길이란 건 일단 찾은 것 같으니 내 등 뒤에 바싹 붙어 있어요. 내가 은혜를 갚을 시간이에요."
남은 스테인리스 쥐들을 다 처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느낀 점은 저놈들은 평범한 짐승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우수수 썰려 나가는 동족들을 보며 분명 두려움에 떨고 있음에도 마지막 한 마리까지 결코 도망가지 않았다.
아무리 온몸을 단단한 금속으로 두르고 있는 호전적인 짐승이라고 해도 저렇게까지 끝까지 달려드는 건 왠지 자신의 의지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쥐는 심지어 다리를 벌벌 떨면서도 결국엔 나에게 달려들며 최후를 맞이했다.
주변의 쥐들을 모두 처리한 나와 최수영은 근처 큰 건물로 들어가 일단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건물 안까지 스뎅 괴물들이 들어왔는지 건물 1, 2층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비상계단을 통해 4층 정도 올라가자 이곳저곳에 숨어서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비상계단에 털썩 주저앉은 나는 우선 N마켓에 들어가 보았다.
이 새까만 검.
과하게 너무 잘 베어진단 말이야.
게다가 검 끝이 닿기만 해도 그 방향대로 괴수가 반으로 갈라지는 검이라니.
아무래도 너무 과해…….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조심스럽게 구매 내역을 눌렀다.
"아, 씨X."
몇 년 전 나름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부터 이런 욕은 거의 쓰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중고등학생 때나 쓰던 찰진 욕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런 내 모습을 처음 본 최수영이 깜짝 놀라 물었다.
"왜 그래요, 수호 씨? 무슨 일 있어요?"
내 눈동자는 휴대폰에 고정된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구매 상품 : 마그네타 검]
[가격 : 20,000NXT]
[우주의 중성자별 중에서도 가장 밀도가 높고 가장 높은 자기장을 내뿜는 '마그네타 별'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검입니다.]
[마그네타 금속은 내뿜는 자기장이 너무 강해서 반경 수천 킬로미터 내 모든 물질을 찢어 버릴 수 있기 때문에, 이 '마그네타 검'은 안정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만들어졌습니다. 베고자 하는 사용자의 의지가 닿는 물질에만 한정되어 반응합니다.]
설마 어느 미친 사람이 검 하나에 24조 원을 태우겠어 했더니
그게 나였네.
급한 마음에 마구잡이로 'WFC(전투용 무기)' 메뉴의 상품을 클릭하다가 N마켓 통틀어 가장 비싼 상품을 구매한 내 엄지손가락을 이 마그네타 검인가 하는 걸로 잘라버리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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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나고 세상은 다시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뉴스에 의하면 수도방위사령부를 비롯한 인근 군경이 총출동해 서울에 출현한 그 금속 괴물들을 대부분 처리했다고 했다.
하지만 총에 맞아도 바로 죽지 않는 그 괴수들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군인과 경찰들도 목숨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수보다 몇백 배는 많은 일반인이 금속 괴물들에게 처참히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 축구장같이 생긴 비행 물체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났는데, 정확히 집계되진 않았지만 주로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는 어느 전문가의 분석이 있었다.
파키스탄, 중국,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 내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반면 호주나 캐나다 같은 나라에는 비행 물체가 나타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중 특히 중국의 특별 행정구인 마카오는 그 존폐가 위험해질 정도의 피해를 보게 되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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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6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19,702개]
[단가 12억 원]
[평가 금액 23조6천억 원]
1월 6일 최수영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2,850개]
[단가 12억 원]
[평가 금액 3조4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