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 * *
200NXT짜리 동시 통역기를 켜자 놀라운 상황이 벌어졌다.
강철 인간이 내뱉고 있는 말이 마치 더빙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생한 한국어로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소리만 한국어로 변한 것이 아니라 눈앞에 서 있는 강철 인간의 입 모양도 말소리와 딱딱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동시 통역기 덕에 조금 전까지 전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지껄이던 강철 인간이 갑자기 내 앞에서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 꼴이 되었다.
"나는 시엠브레 왕국에서 온 제4 기사단 부단장 아드리안이다. 네가 지구에서 가장 강한 기사인가?"
그런데 뭐지, 동네별로 도장 깨기 하러 다니는 고딩 일진 같은 이 대사는.
어차피 그냥 싸우자는 거면 '동시 통역기' 이거 괜히 샀나.
이 동시 통역 기능이라는 게 엄청 신기하긴 하지만, 이런 대사를 듣고 싶어서 8천억짜리 통역기를 산 건 아니었다.
"나는 너희가 보낸 괴수들을 처리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김수호다. 나는 기사 같은 것도 아니고 가장 강한 것도 아니지만 너희가 보낸 저 스뎅 괴수들은 내가 제일 많이 죽였을걸? 너희는 지금 싸우러 온 거냐? 아니면……."
대화하러 온 거냐.
라는 말이 아직 남았는데 철퇴 두 개를 들고 있던 강철 인간이 갑자기 나를 향해 철퇴를 내리찍으며 소리쳤다.
"현자의 돌의 축복도 받지 못한 천민 같은 꼴을 하고 있는 주제에 건방지구나!"
제법 긴 대사를 치며 철퇴를 휘둘렀음에도 긴 팔 덕인지 금세 철퇴가 내 머리 바로 위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느려.
나는 빠르게 마그네타 검을 휘둘러 내 머리 바로 위까지 내려온 철퇴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쾅! 콰쾅! 쾅!"
깔끔하게 잘려 나간 철퇴의 윗부분이 엄청난 굉음을 내며 내 뒤로 나뒹굴었고 놀란 강철 인간은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나는 왼손에 들고 있던 '동시 통역기'를 대충 코트 옆 주머니에 찔러 넣은 후 다시 말했다.
"나머지 철퇴를 마저 휘두르지 않는 걸 보니 그나마 감각은 좀 있네. 그거까지 휘둘렀으면 넌 바로 죽었다. 자, 이제 내 질문에 대답할 차례다. 너희들은 왜 자꾸 지구에 이상한 짐승들을 보내는 거냐. 본병력은 언제 쳐들어올 계획이지?"
자신을 아드리안이라 소개한 기사가 말했다.
"예리한 검 하나 들었다고 꽤 건방지군. 때가 되면 넘어올 것이다. 지구인들은 우리 불사인들을 결코 상대할 수 없다. 오늘은 네놈을 없애고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이 지역에서의 실적이 영 좋지 못했던 건 네놈 때문이었던 것 같군."
아드리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뒤에 서 있던 강철 인간이 지팡이를 가슴팍 높이로 들어 올리자 지팡이에서 두 갈래의 푸른빛이 나와 앞에 서 있는 두 강철 인간을 감쌌다.
"이번에도 막아봐라!"
철퇴를 든 강철 인간이 남은 철퇴를 내 머리 위로 내려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검을 들어 올릴 틈도 없이 철퇴가 내 머리를 짓이겨 들어올 것 같은 위험한 감각이 느껴졌다.
당황한 나는 얼른 뒤로 점프해 철퇴 공격을 피해 냈고 내가 서 있던 자리는 강철 인간의 철퇴에 의해 경차 한 대는 들어갈 만큼 움푹 패 버렸다.
빨라졌다.
조금 전만 해도 움직임이 너무 훤히 보여 어떤 위협조차 느끼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이번엔 아드리안의 긴 검 끝이 내 복부를 향해 찔러 들어왔다.
나는 얼른 몸을 옆으로 틀며 찔러 들어오던 거대한 검의 옆 날을 마그네타 검으로 베어 버렸다.
검의 3분의 1이 잘려 날아갔으나 아드리안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섰고 뒤이어 바로 두 개의 철퇴가 양옆에서 동시에 내 몸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래도 이번엔 대비를 하고 있던 터라 위로 몸을 날려 두 개의 철퇴를 피해 낸 후 일단 두 강철 인간의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섰다.
가만, 철퇴 하나는 아까 반으로 베어 버렸었는데?
놀랍게도 강철 인간의 양손에는 다시 멀쩡한 철퇴 두 개가 들려있었다.
불길한 직감에 급히 옆에 서 있는 아드리안에게 고개를 돌리자 나를 겨누고 있는 아드리안의 검 끝이 지금 막 다시 생겨나고 있었다.
분명 철퇴쟁이의 첫 번째 공격은 이렇게 빠르지도 않았고 잘려 나간 철퇴가 바로 재생되지도 않았었다.
그렇다면 뒤에서 지팡이로 같은 편에게 푸른빛을 내뿜고 있는 저놈이 문제군.
나는 옆에 있던 자전거 전용 도로 표지판 하나를 뽑아 든 뒤 일부러 지팡이를 든 놈의 머리를 향해 표지판을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깡!
아드리안이 얼른 그자의 앞을 가로막으며 방패로 표지판을 막아 냈다.
역시, 저 뒤에 있는 놈이 서포터이자 약점이군.
"이 실장님."
- 네!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신체 능력 강화 하나씩 더 구매해 주세요. 이제 저놈들 아작을 내버릴 테니까."
- 네? 네!
아, 오랜만에 또 코인 무지하게 쓰네.
하지만 지구인을 우습게 보게 만들 순 없지.
총 일곱 차례의 강화 상품 구매로 이미 신체 능력은 오를 대로 오른 상태였다.
구매할 때마다 신체 능력이 두 배씩 강화되는 상품의 특성상 지금 구매하는 상품은 예전에 네 번째, 다섯 번째 구매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신체 강화 효과를 만들어낼 것이다.
물론 그만큼 들어가는 코인도 엄청나졌다는 게 흠이지만.
"어이, 철퇴쟁이."
양손에 철퇴를 들고 나를 노려보고 있는 강철 인간이 인상을 험하게 구기는 것이 보였다.
"이번엔 네가 막아 봐."
나는 큰 호를 그리며 달려 철퇴쟁이의 왼편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정면으로 들어갔다가는 아드리안이 옆에서 공격해 올 수 있기 때문에 취한 행동이었다.
당황한 철퇴쟁이가 오른팔을 휘둘러 철퇴로 내 앞을 가로막아 보았지만, 그보다 한발 앞서 휘둘러진 마그네타 검에 의해 철퇴의 봉이 반으로 깔끔하게 갈라졌다.
검을 휘두른 방향대로 몸을 한 바퀴 회전하며 앞으로 두 발 더 전진한 나는 마그네타 검을 다시 횡으로 크게 휘둘렀고 내 검은 철퇴쟁이의 오른쪽 무릎을 그대로 베어 버렸다.
그리고 한 바퀴 더.
철퇴를 든 강철 인간은 내 검에 의해 두 무릎이 모두 잘려 나간 채 앞으로 꼬꾸라졌고 나는 그대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맨 뒤에서 지팡이를 들고 있는 강철 인간에게 뛰어들었다.
뒤통수 쪽에서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오는 것을 느낀 나는 재빨리 허리를 숙이며 앞구르기를 했고 그런 내 등 바로 위를 아드리안의 검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간발의 차이로 아드리안의 검을 피해 낸 나는 몸을 다시 일으키며 지팡이를 든 강철 인간을 베어 버리기 위해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자기편에게 이어져 있던 푸른빛이 갑자기 사라지더니 지팡이 끝에서 순식간에 붉은빛의 섬광이 나타나 나에게 쏘아지는 것이 보였다.
"윽!"
다급히 몸을 날려 붉은 섬광을 피해 보았지만 옆구리에 스친 건지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고개를 내려 보니 섬광에 스친 부위의 강화 수트가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있었다.
서포터인 줄 알았더니 딜도 넣는다 이거지?
그런데 지금은 서포팅이 끊긴 거고?
아픈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한 손으로 마그네타 검을 들고 일어난 나는 이번엔 푸른빛과의 연결이 끊긴 아드리안에게 몸을 날렸다.
놀란 아드리안이 급히 방패를 들어 올려 내 공격을 막으려고 했다.
피했어야지.
내 검은 그런 방패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란다.
그리고 지금 넌 너무 느려.
나는 일부러 검을 방패에 깊숙이 박아 넣으며 대각선으로 크게 휘둘렀고 아드리안의 방패와 방패를 들고 있던 왼팔이 한꺼번에 잘려 나갔다.
나는 방패와 팔을 잃은 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아드리안의 목을 그대로 그어 버렸다.
"후우. 힘드네."
이제 한 명 남았다.
지팡이를 들고 있는 강철 인간을 마주 보고서자 지팡이 끝에서 붉은빛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첫 번째는 방심했지만 두 번은 안 맞는다.
그 섬광을 쏘는 순간 넌 죽는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강철 인간도 붉은 섬광을 쉽게 쏘아내진 못하고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리며 곁눈질로 철퇴쟁이를 바라보자 푸른빛이 끊기기 전까지 다리가 재생되고 있었는지 잘린 단면이 매끄럽지 않고 뭉툭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여기 목 날아간 놈은 아드리안이라고 했고. 저 철퇴쟁이는 관심 없고. 넌 이름이 뭐지? 이제 좀 대화할 마음이 생겼냐?"
지팡이를 든 강철 인간이 입을 열었다.
"나는 왕궁 마법사인 벤하민이다. 너는 정말 강한 인간이었군. 게다가 그 검은……. 금속을 나무 자르듯 베어 버리는군. 우리에겐 아주 혹독한 적이 되겠어."
"이렇게까지 우리 지구인들을 괴롭히는 이유가 뭐냐? 시스템 공지대로 여기로 넘어와서 살기라도 할 작정이냐?"
"그렇다. 우리는 영원불멸의 육체를 얻었으나 더 이상 우리 행성에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지구인들에겐 미안하지만 우리는 이 행성에 정착할 계획이다."
"그럼 여기도 결국 너희 행성처럼 되는 거 아니냐? 그럴 거면 그냥 우리끼리라도 잘 살게 놔두지?"
"같은 실수는 두 번 반복하지 않는다. 이곳으로는 일부 계층만 넘어올 계획이다. 강한 인간이여, 나중에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너를 포함한 일부 소수의 지구인도 이곳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원한다면 너희도 우리처럼 영원불멸의 몸을 갖게 해줄 수도 있다."
"양쪽 다 소수만 남아 지구의 자원을 누리고 살자는 그런 말인가?"
"강한 인간, 현명하군. 그렇다. 곧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땐 우리 제안을 신중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아까부터 들려오던 헬리콥터 소리가 점점 머리 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개소리 그만해라. …수영 씨, 내 앞에 보이는 놈 머리통에 화살 몇 방 꽂아줘요."
- 안 그래도 조준하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내 말을 들은 마법사인지 연금술사인지 하는 강철 인간이 급히 붉은 빛을 거둬들이고 헬리콥터 쪽을 향해 지팡이를 들어 올리자 지팡이 앞으로 반투명한 막이 생겨났다.
"그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몸을 날려 화살 공격에 대비하는 강철 인간의 몸을 횡으로 베어 들어갔다.
마그네타 검은 순식간에 벤하민의 몸통을 반으로 갈라버렸고, 뒤늦게 날아온 최수영의 화살이 벤하민의 미간에 정확히 꽂혔으나 이미 벤하민의 몸통은 상하체가 분리된 상태였다.
"철퇴쟁이, 넌 우리랑 함께 돌아가서 얘기 좀 더 하자."
헬기에서 내린 라울이 철퇴 강철 인간을 지키고 서 있는 동안 나머지 세 디펜서들은 마곡 일대에 산개한 괴수들을 빠르게 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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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둔 강철 인간은 심문 내용을 가감 없이 우리 회사와 공유한다는 조건으로 수도방위군에서 인계해 갔다.
나는 처음엔 인계를 거절했으나 오히려 그런 쪽으로는 더 전문인 군에서 데려가는 게 행성073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는 방법일 수 있다는 박강훈의 말에 우리는 그냥 강철 인간을 군에 넘겨주고 강화도로 복귀하기 위해 헬리콥터에 올라탔다.
"미스터 킴, 드디어 지적 생명체가 처음으로 넘어왔군요."
"그러네요, 라울. 앞으로 얼마나 자주, 많이 넘어올진 모르겠지만 만만한 상대는 아닌 것 같아요. 우리도 대비를 단단히 해야겠어요."
최수영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괴수들과 마찬가지로 금속 재질로 되어 있긴 한데 좀 큰 것 빼면 생김새는 우리 인간이랑 똑같네요?"
"네, 수영 씨. 그런데 저놈들 중 하나가 나를 보고 '현자의 돌의 축복도 받지 못한 천민 같은 꼴'을 하고 있다고 했어요. 아마 연금술인가 뭔가로 저렇게 되기 전에는 우리랑 같은 모습이지 않았을까 싶네요."
박강훈이 물었다.
"맙소사! 연금술이라니. 그런 게 정말 있었단 말입니까?"
"어쨌든 시스템의 공지대로라면 저 행성은 우리랑 다른 메타버스 세계인 셈이니 무엇이 있어도 이상하진 않죠. 애초에 금속 괴수들이 쳐들어온 것부터 말이 안 되잖아요?"
"미스터 킴, 그러면 저 금속 인간들도 괴수들처럼 늙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자기들은 영원불멸의 육체를 얻었다고 말했으니 아마 그런 것 같네요. 늙지도 죽지도 않는 게 맞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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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7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14,572개]
[단가 42억 원]
[평가 금액 61조 2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