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 * *
본사로 돌아온 후 그놈들과의 만남을 곱씹으며 머리가 복잡해진 나는 대표실에 가만히 앉아 사색에 잠겼다.
짧았지만 여러모로 사람을 심각하게 만든 만남이었다.
우선, 벤하민이라는 마법사놈이 말한 지구인도 일부만 남아 여기 함께 살자는 제안.
들을 때만 해도 개소리라고 생각했으나 차분히 생각해 보니 지구의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인 제안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인구를 줄이는 대신 권력과 물자를 독점하고 강철로 된 불로장생의 육신을 얻는다?
군침을 흘리는 미친 인간들이 분명히 생길 만한 일이었다.
진시황이나 히틀러가 이 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서로 다른 목적이긴 하겠지만 분명히 저놈들과 손을 잡았겠지.
놈들은 앞으로도 또 나타날 텐데 감춘다고 감출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 이 사실을 세상에 어떻게 알려야 할지 막막해졌다.
이러다 지구인들끼리 전쟁이라도 일어나 세계 3차 대전이라도 발발하면 그거야말로 행성073의 강철 인간들이 가장 바라는 일일 텐데.
두 번째 고민은 신체 능력 강화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지구를 통째로 집어삼키겠다는 강철 인간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마당에 넥시트코인 5천 개를 더 쓴 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이 일은 어디까지나 돈벌이 사업으로 시작되었지만 1년의 활동을 거치면서 이제는 나에게도 중대한 책임감 같은 것이 생긴 상태였다.
사람들의 목숨을 지킨다는 것.
그것은 분명 돈 버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우리 쪽에도 탱커, 근거리 딜러, 원거리 딜러, 힐러가 다 갖춰져 있으니 팀으로 그자들과 맞붙었으면 큰 어려움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게다가 싸움이 길어지면 대한민국 군대도 우리와 함께 싸울 것이다.
하지만 그놈들이 떼로 나타난다면?
그땐 또다시 신체 능력 강화를 구매해야 하나?
이미 8단계까지 구매한 마당에 다음번 '힘, 체력 강화'와 '운동 신경 강화' 상품을 한 번 더 사려면 이제 총 10,240NXT가 필요하다.
현재 내 보유 코인은 14,592개.
상황상 필요하다면 거기까진 망설임 없이 구매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다음은?
다음 상품은 개당 가격이 1만NXT이 넘어간다.
이제 내가 가진 넥시트코인으로는 그다음 강화 상품은 구매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똑똑.
"이혁진입니다."
"네, 실장님 들어오세요."
이혁진 실장이 대표실로 들어왔다.
"무슨 고민 있으십니까, 대표님?"
"아니요. 별일 아니에요."
"표정이 별로 안 좋아 보이십니다. 이번에 또 코인을 많이 사용하신 것 때문에 그러세요?"
"하하하. 어차피 회사가 충분히 운영되고 남을 만큼 채굴은 진행되고 있고 제 월급도 제법 나오니 이제 그런 건 괜찮아요. 그것보단 강철 인간들로 인한 사상자가 없었다는 게 더 중요하죠."
"대표님 좀 달라지셨어요. 여전히 밝으면서도 냉철하시지만 뭐랄까, 언제부턴가 좀 사명감 같은 걸 가지셨다고 해야 할까요."
"80번 넘게 괴수들과 싸우며 수많은 사람들을 구해 냈어요. 눈앞에서 죽는 사람도 많이 봤고요. 내가 살린 사람, 살리지 못한 사람이 계속 늘어날수록 아무래도 마음가짐이 좀 달라지긴 하네요."
"이번 신체 강화 상품 구매 후 몸은 좀 어떠세요?"
"이럴 걸 왜 미리 안 샀나 싶죠, 뭐. 이번 구매로 인한 능력 상승은 좀 엄청나긴 하네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대표님. 미리 사는 것보단 지금 대표님의 구매 방식이 최선이 맞아요."
"구매 시점 기준 두 배가 강화되니까요?"
"네, 맞습니다. 매일 열심히 트레이닝 중이시잖아요. 강화된 신체를 가지고도 훈련을 통해 계속 그 능력을 늘려 갔고, 매번 구매할 때마다 그 시점에서 신체 능력이 두 배가 늘어났을 테니까요."
"힘도 힘이지만 이젠 이 밀폐된 방의 공기 흐름까지 다 느껴질 정도로 감각이 민감해졌긴 합니다. 너무 예민해졌어요. 하하하. 그런데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오신 거 아닌가요?"
"제가 좀 분석을 해본 게 있는데, 이걸 좀 보시죠."
이혁진 실장은 내 앞에 태블릿을 내려놓고 자신이 분석한 자료를 보여주었다.
"제가 프로게이머 출신인 건 아시죠?"
"당연하죠. 제가 직접 스카우트했잖아요. 우리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했어요."
"프로게이머의 입장에서 N마켓의 상품들을 분석해 보았습니다. 제가 게임을 하고 있다는 마음으로요."
이혁진이 보여준 자료는 무기들뿐 아니라 다른 메뉴의 상품들까지, 그 가격과 가치에 대한 나름의 평가를 상세하게 기재한 엑셀 파일이었다.
화려하고 멋진 프레젠테이션 자료는 아니었지만 오래 준비하고 고민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 자료였다.
"N마켓의 상품들은, 이게 게임이라고 치면 아주 밸런스가 잘 설계된 아이템들이에요. 모두 그 가격만큼의 가치를 합니다. 다른 상품들과 비교했을 때 가격 대비 딱히 효율이 떨어지는 상품이 없어요."
나는 책상 옆에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는 마그네타 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있잖아요. 저거. 20,000NXT짜리. 하하하."
"거대한 비행 물체를 단칼에 베어 버리시고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 검일지도 몰라요. 어느 게임이나 가장 비싼 아이템은 그 값어치를 반드시 하거든요."
"게임 아이템 이야기는 흥미롭긴 한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죠?"
"'ETC' 메뉴의 '랜덤박스'요."
"랜덤박스? 그 5,000NXT이나 하는데 뭐가 나올지도 모르는 그 랜덤박스요?"
"네. 상품 설명에 들어가 보면 한 달에 한 개씩 총 여섯 달 동안 랜덤 상품을 제공한다고 되어 있어요. 초회 한정 구매 상품이기도 하죠."
"초회 한정 구매라는 건 한 번밖에 못 산다는 말이죠?"
"아마 그럴 거예요.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이겁니다."
N마켓 앱을 켠 이혁진 실장이 랜덤박스의 가격을 가리켰다.
[가격 : 5,000NXT(50% 할인 중. 할인 전 가격 10,000NXT)]
"50퍼센트 할인. N마켓 전체에 초회 한정 구매 조건이 걸려있는 상품도 이것뿐이고 가격을 할인해 주는 상품도 이것뿐입니다."
"음, 저도 N마켓을 많이 둘러보긴 했지만 듣고 보니 그렇네요. 할인해 주는 상품은 이거밖에 없죠."
"네. 그것도 50퍼센트씩이나. 그렇다면 이 상품은 1만 NXT어치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 게임 상점에서 초회 한정 구매 상품이라는 건 플레이어들의 구매를 꼬드기기 위한 미끼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여러 번 제공하기엔 가격 대비 가치가 너무 높다는 말이기도 하죠."
듣다 보니 맞는 말이긴 한데.
그렇다고 지금 이걸…….
"사자고요? 21조 원짜리 상품을?"
"대표님, 검은 지금 시세로 84조 원입니다."
"그래도 살 땐 24조였어요. 그것도 급해서 실수로 산 거고."
"어쨌든 제 의견은 그렇습니다. 당연히 결정은 대표님께서 하시는 거죠. 하지만 이제부터 정말 중요한 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겠군.
"신체 능력 강화 상품이 너무 비싸져서 이젠 몇 개 더 못 산다는 거?"
"네, 맞습니다. 다음 '힘, 체력 강화'와 '운동 신경 강화'를 사시려면 1만 NXT이 넘게 필요합니다. 그다음 단계는 이제 살 수도 없고요."
"그러니 지금 시점에서 신체 강화 상품 2개를 한 번 더 사는 만큼의 가치를 이 랜덤박스가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말이죠? 5천 NXT이면 구매가 가능하고?"
"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그겁니다."
"하하하하. 대표 개인 자산 21조를 랜덤박스 구매에 사용하라고 권유하는 직원이라니."
"그죠? 어이없어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전직 프로게이머의 입장으로, 지금 상황에선 이제 이 상품이 남은 대안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만약 샀다가 첫 번째 랜덤 상품으로 '젊음 회복'이 툭 튀어나와서 내가 8살이 되면 어쩌시려고요?"
"그럴 리 없습니다. '젊음 회복' 상품의 가격은 5천 NXT로 제가 분석한 가치에 의……."
"알아요, 알아. 농담이에요. 하하하. 어쨌든 좀 생각을 해볼게요. 좋은 조언 감사드려요. 이혁진 실장님이 아니면 우리 회사 누가 저에게 와서 이런 조언을 해주겠어요."
"사실 정보기술팀 김 과장하고도 먼저 얘기해 봤는데 김 과장도 같은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아주 인재가 많은 회사네요. 하하하. 아, 혹시 이걸 구매한 사례가 있나요?"
"열심히 찾아봤지만, 없습니다."
"사면 내가 처음이 되는 건가요."
"메타디펜스도 첫 번째 채굴 회사였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큰 채굴 회사이구요."
"요즘 뭐 스피치 학원 다녀요?"
"죄송합니다. 대표님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다 보니."
"다니는 거 맞네. 스피치 학원. 일단 알겠어요."
* * *
퇴근 후 복잡한 마음을 안고 맥주 몇 캔을 사 들고 오랜만에 어머니와 동생이 있는 안전 가옥으로 향했다.
나를 포함한 네 명의 디펜서는 본사 건물 내 기숙사에 거주하고 있었다.
본사 건물 한편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 기숙사에는 다른 직원들도 원하면 얼마든지 무료로 거주할 수 있었다.
"어머니, 저 왔어요."
"수호 왔니? 아이고 미리 전화라도 하지. 집에 먹을 게 뭐 있나?"
"그냥 된장찌개 같은 거 끓여주세요. 성희는요?"
"방에 있다. 수호야 쟤 좀 말려봐라. 휴학한 다음엔 하루 종일 게임만 해."
"제가 꼼짝 말고 강화도에 있으라고 했으니 어쩔 수 없죠, 뭐. 당분간은 그냥 놔두세요."
"그 디펜서 하는 건 안 힘드니? 엄마는 너 잘못될까 봐 아직도 가슴이 쿵쾅거려서 뉴스도 잘 못 본다."
"너무 걱정 마세요. 서로 등을 맡길 동료들도 있고, 신체 능력을 워낙 키워놔서 위험할 것 같으면 언제든 도망갈 만큼은 돼요."
"그래. 수호 네가 뭐 슈퍼맨 같은 영웅도 아니고 그냥 사업가잖니. 위험할 것 같으면 얼른 도망쳐. 알았지? 지금까지도 충분히 사람들 많이 구해 줬잖아."
"알겠어요. 저 성희한테 가볼게요."
"그래. 2층 올라가 봐라. 엄마는 얼른 저녁 준비해야겠다."
"사람 쓰시고 편히 지내시라니까요, 참. 고집은."
"성희랑 둘이 사는데 무슨 사람을 써. 엄마 혼자 충분하다. 얼른 저녁 준비할 테니까 성희 게임 좀 그만하라고 하고 같이 내려와."
"네."
나는 2층으로 올라가 성희 방문을 노크했다.
"엄마, 왜?"
"오빠 왔다."
"어! 오빠! 들어와."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성희가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야, 인마. 너 뭔 게임을 하는데 매달 카드 값이 몇백씩 나와?"
"어? 왜 이래, 오빠. 이러기야? 여기 갇혀 있는 대신 마음대로 쓰라고 준 카드 아니야?"
"그래. 당분간은 뭐. 근데 요즘은 무슨 게임 하냐?"
"어? 이거 MB게임즈에서 새로 나온 게임인데, 좀 복잡하지만 재밌어."
MB게임즈라면 익히 알고 있는 회사였다.
판교 침공 때 1, 2층 모든 문에 강철 문을 덧대어 괴수들로의 피해를 사전에 막았던 회사.
그 이후 대부분 건물에서 MB게임즈의 방식을 차용해 저층 유리부에 강철 문을 설치하기 시작했었다.
"무슨 게임인데? RPG?"
"응. 그런데 세계관이 엄청 커. 아직 다 공개도 안 됐어."
"야, 너 한 달에 게임에 몇백씩 쓰니까 오빠가 뭐 하나 물어보자."
"뭐?"
"50퍼센트 할인 초회 한정 랜덤박스는 사야 돼, 안 사야 돼?"
"빨리 크려면 무조건 사야지."
"무조건?"
"응. 왜?"
무조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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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7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14,572개]
[단가 42억 원]
[평가 금액 61조 2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