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 * *
오랜만의 가족 식사를 마친 후 3층 거실에 앉아 조용히 캔맥주와 하몽을 즐겼다.
성희에게 맥주 안줏거리 할 거 뭐 있냐고 물어보니 2층 개인 냉장고에서 베요타 100퍼센트 하몽을 꺼내 주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맥주를 홀짝이고 있는데 성희가 치즈와 와인을 들고 올라왔다.
"오빠, 같이 마셔."
"게임 안 하냐?"
"안 그래도 지금 바쁜데 오빠 본지도 오랜만이라 잠깐 껐어."
"너 그 와인도 비싸 보인다."
"어떻게 알았지? 헤헤헤. 부자 오빠가 생겨서 씀씀이가 좀 커졌어."
"잘했어. 기왕 먹을 거면 좋은 거 먹어."
"오빠 무슨 고민 있어? 표정이 별론데."
"뉴스 안 봤냐? 오빠 오늘 외계인 만나고 왔어."
"대박."
"안 봤네. 너 오빠가 뭐 하는 사람인지는 알긴 하지?"
"그림자 검객 님."
"미친."
"헤헤. 사실 뉴스 봤어. 오빠 영상도 매일 보고. 근데 화면 속 저 사람이 우리 오빠라는 게 아직도 실감이 안 나. 지금도 찐따 같이 혼자 소파에서 맥주나 마시고 있는데."
"야, 내가 엄청 잘나가진 않았어도 찐따였던 적은 없었지."
"그래, 뭐. 그건 인정. 언니랑은 요즘 어떻게 돼가?"
"언니?"
"수영 언니."
"뭔 소리야. 직장 동료야."
"개솔."
"죽는다, 너. 시비 걸 거면 내려가."
성희가 나한테도 와인을 한 잔 따라주며 물었다.
"오빠, 혹시 그거 때문에 고민이야? 랜덤박스?"
"응?"
"N마켓에서 랜덤박스 살지 말지 고민 중인 거 아니야?"
"뭐 꼭 그것만 고민인 건 아닌데. 그것도 고민이긴 해."
"너무 비싸서 그래? 내가 카드 좀 더 아껴 쓸게. 그거 사."
"농담하는 거지? 네 카드값 아껴서 살 수 있는 거면 벌써 샀어."
"나도 알아. 그냥 사라고 멍청아. 엄마랑 나 걱정하니까 줘 터지고 다니지 말고. 엄마는 오빠 때문에 뉴스도 잘 못 봐. 오빠 영상도 일주일 넘게 지난 것만 찾아보셔."
"안 그래도 그 얘기 하시더라. 뉴스 못 보신다고."
"그러니까 기왕 여기까지 왔으면 더 강해지라고. 그래야 어디 가서 안 얻어맞고 다닐 거 아냐. 이 실장님한테 들어보니 이제 신체 강화도 몇 개 더 못산다며?"
"이 실장님? 이혁진 실장님하고 연락해?"
"응. 매일 톡 하는데?"
"왜?"
"오빠 걱정되니까."
"개소리. 너 이혁진 실장하고 뭐 있지? 둘이 사귀냐?"
"아직."
"아직?"
"헤헤."
"죽는다 너. 서울 못 나가게 했더니 우리 회사 직원이랑 썸을 타?"
"그럼 누구랑 타!"
"돌겠네, 진짜. 연락처는 또 언제 주고받은 거야?"
"오빠가 예전에 집에 데려왔었잖아."
"그때? 작년 초에 한번 잠깐 데려왔었는데, 그때?"
"잔소리할 거면 나 내려갈래."
"어머니도 아셔?"
"응. 마음에 쏙 드신대."
"돌겠네, 진짜."
"이 실장님도 오빠 걱정 엄청 많이 해."
그건 그렇지.
그러니 그런 정성스러운 자료를 들고 와서 말도 안 되는 상품을 구매하자는 제안을 했겠지.
N마켓 전체 상품의 가격과 가치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비교해 놓은 그 투박한 엑셀 파일은 조사에만 일주일은 걸렸을 것 같은 자료였다.
전 세계의 N마켓 상품 구매 관련 내용을 모두 찾아서 비교해 본 것 같던데.
가족들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도 그렇고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많구나.
머리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입에서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진지하게 만날 거냐, 두 사람은?"
"어휴, 뭐래 꼰대냐. 그냥 연락만 하는 사이야."
"이혁진 실장님이 아까워서 그래."
이번에도 마음과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당연히 내 동생이 아깝지.
"아! 됐어. 꺼져! 랜덤박스인가 뭔가는 사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살게, 그건."
"응?"
"산다고. 랜덤박스."
* * *
다음 날 아침, 디펜서들과 이혁진 전략실장, 황동민 개발실장과 함께 회의실에 모였다.
"이 실장님의 제안대로 랜덤박스를 사볼까 합니다."
황동민 개발실장이 가장 먼저 놀라 물었다.
"랜덤박스요? 이 실장님이 요 며칠 입에 달고 다니던 그거? 대표님께 결국 보고드린 거예요?"
"네……. 구매하시는 게 어떻겠냐고 어제 보고드렸어요."
"오, 미스터 킴. 나도 그 상품 너무 궁금했는데. 얼른 사 봐요."
"네, 지금 구매합니다. 오랜만에 제 휴대폰으로 한번 사 볼게요."
항상 이혁진 실장에게 구매를 요청했었는데 오랜만에 내 손으로 직접 N마켓에 들어가 상품을 구매해 보았다.
[상품명 : 랜덤박스]
[가격 : 5,000NXT(50% 할인 중. 할인 전 가격 10,000NXT)]
[구매 시부터 6개월간 한 달에 한 번씩 랜덤 상품이 지급됩니다.]
[초회 한정 구매 상품]
구매 버튼 터치 완료.
"샀어요. 뭘 주나 한번 보죠."
구매하기를 누르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테이블 위에 녹색 상자 하나가 생겨났다.
"어! 이게 랜덤박스인가 봐요? 작년 시스템 공지 때 화면에서 봤던 그 녹색 상자랑 비슷하게 생긴 것 같아요."
"아, 그 시스템 공지 화면이요! 그러네. 그거랑 같은 색이네."
박스 모양을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 최수영과 나를 이혁진 실장이 재촉했다.
"뭐가 들었는지 어서 열어보세요, 대표님."
"네. 열어볼게요."
할인해서 21조, 할인 전 42조 원짜리 녹색 박스의 언박싱이 시작되었다.
"세상에서 제일 비싼 언박싱인 거 같은데, 홍보팀 불러서 영상이라도 찍어서 올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뭐가 나올진 모르겠지만 그냥 우리끼리 비밀 전력으로 해두죠."
박스를 열자 안에는 갈색 가죽장갑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장갑?"
박강훈과 라울이 장갑을 보고 저마다 한마디씩 물었다.
"대표님, 이건 최수영 씨 거와 같은 치료 장갑입니까?"
"막 힘 세지는 그런 장갑일까요? 그런데 미스터 킴의 힘은 이미 충분히 셀 텐데."
하지만 나한테 물어봐야 당연히 나도 처음 본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대표님, 어디 설명 같은 건 없어요?"
박스 안을 살펴보자 간단한 제품 설명서가 들어 있었다.
[마술사의 염동력 장갑]
[세계 최고의 마술사가 되어보세요!]
[이 장갑을 낀 구매자는 간단한 염동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한 손으로 들어 올릴 수 있는 정도의 작은 물체를 손을 대지 않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물빨래 금지]
"마술사의 염…동력 장갑이라네요."
"염동력이요?"
이혁진 실장이 얼른 내 장갑을 뺏어가서 설명을 읽어보려 했으나 N마켓의 상품들이 모두 그렇듯 이혁진 실장은 이 장갑을 들어 올릴 수조차 없었다.
나는 친절히 이혁진 실장의 바로 앞 테이블에 제품 설명서를 놔 주었다.
사용 설명을 읽은 이혁진 실장이 한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리며 말했다.
"맙소사. 내 예상이 맞았어."
"무슨 예상이요? 마술 장갑 같은 게 나올 거라고 이미 예상했어요?"
그런데도 나한테 5,000NXT을 주고 랜덤박스를 사라고 했어?
마술 장갑 같은 게 나올 걸 알고도?
"아닙니다. 그건 아니고요. 뭔가 엄청난 아이템이 나올 줄 알았어요."
"세계 최고의 마술사가 되어보라는 이 장갑이요?"
"저 같은 평범한 사람이 가졌으면 저쪽에 있는 태블릿을 손 안 대고 가져오는 정도로 쓰였겠죠. 아니면 TV쇼에 나가 돈을 벌거나."
이혁진 실장의 설명을 들으며 이혁진 실장 옆에 바싹 앉아 장갑의 사용 설명을 읽던 라울이 테이블을 탕 치며 말했다.
"아! 그렇군요! 이건 미스터 킴이 사용한다면 얘기가 다르지요."
"네, 맞아요. 지금의 대표님이라면, 이 장갑을 사용해서 손도 안 대고 집채만 한 바위도 집어 던질 수 있지 않을까요?"
아,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만한 물체를 손 안 대고 움직일 수 있다는 설명.
내가 지금 한 손으로 들어 올릴 수 있는 정도의 물체라면… 자동차?
"한 손으로 들어 올릴 수 있는 무게 정도를 손 안 대고 움직일 수 있게 해준다……. 이 실장님 말대로면 꽤 강력한 아이템이 될 수도 있겠네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황동민 개발실장이 말했다.
"들어 올리는 무게뿐 아니라 움직이게 하는 힘도 구매자의 힘과 비례한다면……."
황동민은 자신의 팔로 야구공을 던지는 듯한 자세를 몇 번 취해 보며 말을 이었다.
"저나 이 실장님이 이 장갑으로 야구공을 집어 던진다면 그건 그냥 손 안 대고 야구공을 던지는 신기한 마술사가 될 만한 일이겠지만 대표님이 같은 일을 볼링공으로 한다면 그건 그냥 갑자기 날아가는 대포알이 되겠군요."
"일단 모두의 추측이 맞을지 트레이닝 센터에 가서 사용을 한번 해봐야겠어요."
* * *
나는 메타디펜스 본사 오각형 건물 가운데 위치한 3제곱킬로미터 규모의 대형 잔디 트레이닝 센터에서 염동력 장갑의 성능을 테스트해 보았다.
처음엔 좀 어색했으나, 연습이 반복될수록 이혁진 실장과 황동민 실장의 이론이 맞는다는 게 점점 증명되었다.
정확히 재어보진 않았지만 반경 10미터 정도 내의 물건은 무엇이든 이 장갑으로 들어 올려 내 쪽으로 가져오거나 반대 방향으로 집어 던질 수 있었다.
한 손으로 들어 올릴 수 있는 정도의 물체를 움직일 수 있다더니 정말로 자동차를 손도 안 대고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염동력으로 물체를 집어 던지는 힘 또한 직접 손으로 들고 던지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뭐랄까, 눈에 안 보이는 길이 10미터 정도의 새로운 팔이 생긴 듯한 느낌이었다.
고정되어 있는 물체에는 어떻게 적용될까 싶어 트레이닝 센터의 철문에 염동력을 작용시켜 세게 잡아당겨 보았더니 철문이 그대로 벽에서 뜯겨 버렸다.
평범한 사람이 얻었으면 말 그대로 TV쇼에나 나올법한 능력이었지만 '힘, 체력 강화' 상품을 여덟 차례나 구매한 내 손에 들어온 이 장갑의 위력은 전혀 달랐다.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이 염동력으로는 마그네타 검을 마음대로 움직이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직접 집어 들기 전까지는 꼼짝도 하지 않는 마그네타 검은 안타깝게도 염동력으로도 전혀 움직여주지 않았다.
"수호 씨, 정말 엄청난 아이템을 갖게 되었네요."
"그러게요. 이게 여섯 개 중에 한 개라니, 앞으로 남은 다섯 개도 기대가 되네요."
"앗, 너무 기대하지는 말아요, 수호 씨. 말 그대로 랜덤박스잖아요. 하하핫."
"아, 그렇죠. 하하. 괜히 기대했다가 엄청 실망스러운 상품이 나올 지도요."
박강훈이 옆으로 와 대화에 끼어들었다.
"대표님, 드래곤볼에 나오는 그 전투력 측정기 같은 것도 나오는 거 아니에요?"
그게 뭐냐는 표정으로 최수영이 물었다.
"네? 그게 뭐예요, 박 상사님?"
"아, 수영 씨는 잘 몰라요? 뭐, 모를 수 있지. 대표님은 아시죠?"
나도 모르는데?
"아니요. 그게 뭔가요? 전투력 측정기?"
"아. 드래곤볼 안 봤구나……. 둘 다……."
박강훈이 뒤로 돌아 터덜터덜 라울의 옆으로 다가갔다.
멀리 떨어져서 잘 들리진 않았지만 아마 드래곤볼을 아느냐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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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8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9,572개]
[단가 42억 원]
[평가 금액 40조 2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