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 * *
"뒤에 놈들 쫓아오는 거 보여?"
"아니요.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어요."
"그러면 여기서 방향을 틀어서 지금 온 만큼만 또 뛰자."
소년을 업은 채 잠시 멈춰선 나는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 다시 뛰려고 했다.
"아, 아니요! 왼쪽으로!"
오른쪽이 마을 쪽인가 보군. 여차하면 제가 죽게 생겼는데 마을 사람들을 끔찍이도 생각하네.
"오케이. 왼쪽으로!"
숲 외곽을 따라 십여 분을 더 달리고 나서야 우리는 멈추어 섰다.
"이제 안 따라오겠지?"
"네. 한참 전부터 아예 보이지 않아요. 감사합니다."
"와, 이거 오랜만에 숨이 다 차네."
"저는 폴이에요. 검사님은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나는 김수호."
"킴쏘? 특이한 이름이네요."
"킴 빼고 그냥 수호라고 불러."
"그러고 보니 남반구에서 오셨나 봐요. 남반구에는 검사님처럼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가진 유목민들이 살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굉장히 고급스러운 옷을 입었네요? 남반구는 우리보다 훨씬 살기 척박한 땅이라고 하던데. 거기서 귀족이셨나요? 그리고 어깨 위에 그 작고 귀여운 동물은 뭐예요? 처음 보는 동물이네? 혹시 만지면 무나요? 엄청 귀엽다."
남반구를 언급하는 폴의 말에 특수작전국에서 봤던 테라 행성의 지도가 떠올랐다.
적도보다 약간 위쪽에 가로로 길게 이어진, 지구에 비해선 턱없이 좁은 바다 남쪽에 행성 전체 면적의 절반에 가까운 사막과 돌산 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지구의 서양인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폴과는 달리 남반구에 사는 유목민들은 나와 같은 동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나 보다.
그리고 폴이 남반구에서 왔냐고 하는 걸 보면 다행히 내가 떨어진 곳은 시엠브레 제국과 다섯 왕국이 위치한 북반구인 것 같았다.
"잘 물진 않는데 할퀼 순 있어."
"그런데 남반구에도 이렇게 뛰어난 검사님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어요. 역시 세상은 넓군요. 검사님의 움직임을 보니 검사님도 검기를 사용하실 수 있겠네요? 우리 마을의 매튜 남작님처럼요. 그런데 검사님은 아직 불사인이 아니네요? 아, 남반구에서 넘어온 지 얼마 안 된 건가요? 기사님 정도 실력이면 시엠브레 제국에서 작위를 받고 불사인이 될 수 있을 텐데요. 아까 몬스터들을 베어 넘길 땐 기사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어요."
길이나 좀 물으려고 했는데 엄청나게 말 많은 녀석을 만나버렸다.
뭐, 좀 시끄럽긴 하지만 이것저것 정보를 좀 얻어낼 순 있으려나.
"그래. 일단 그냥 남반구에서 왔다고 치자. 여기서 시엠브레 제국은 얼마나 떨어져 있어? 시엠브레 제국 남부에 있는 빌데르라는 도시는 혹시 알고 있어?"
"역시! 기사 작위를 받으러 가시는 거군요. 멋져요. 검술 실력을 인정받아 시엠브레 제국에서 기사 작위를 받다니. 저도 꼭 그렇게 되고 싶은데 우리 마을 매튜 남작님은 제가 시엠브레 제국에 가지 못하게 하세요. 저뿐만 아니라 우리 마을 사람 그 누구도요. 남작님 말로는 불사인이 되는 건 저주나 다름없대요. 본인은 벌써 몇백 년 전에 불사인이 되셨으면서……."
자신을 폴이라고 소개한 이 녀석.
태어나서 본 사람 중에 말을 가장 빨리하는 녀석이다.
"그래, 말 많은 건 좋아. 덕분에 새로운 정보를 많이 알게 되네? 그런데 폴, 내가 물어본 것들 먼저 대답해 줄 수는 없을까?"
"우리 마을은 시엠브레 제국을 기준으로 가장 서쪽에 있는 키르칸이라는 마을이에요. 여기서 시엠브레 제국까진 꽤 멀죠. 그나마 가장 빠른 길은 라트니아 왕국과 마리노 왕국을 지나서 가는 거예요. 대신 거대한 강을 두 번이나 건너야 하죠. 그리고 빌데르라면 시엠브레의 가장 큰 항구도시 맞죠? 사실 가 본 적은 없어서 이름만 들어봤어요. 아름다운 도시라고 하더라고요. 아, 나도 제국에 가 보고 싶다."
말을 저렇게 많이 내뱉으면서 용케도 내가 물어본 것들은 기억하고 있었군.
"그럼 가장 빠른 방법으로 빌데르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릴까?"
"음, 글쎄요? 워낙 먼 거리라서. 쉬지 않고 간다고 해도 몇 달은 걸릴 것 같은데요? 그런데 사실 그건 불가능해요. 가는 길에 있는 숲마다 몬스터들이 인간의 출입을 금하고 있으니까요. 몬스터를 안 만나려면 사막과 돌산으로만 돌아서 가야 하는 데 그럼 시간이 더 걸릴 거예요. 그리고 또 여기보다 더 큰 숲엔 아까 본 몬스터들보다 훨씬 강한 녀석들도 있대요. 물론 검사님 정도의 실력이면 몬스터들한테 맞아 죽진 않겠지만… 어쨌든 시간이 지체될 건 분명해요."
"아, 그런데 넌 그 위험한 숲에서 혼자 뭘 하고 있었던 거냐? 하마터면 너 죽을 뻔했잖아."
"에베르 꽃을 찾기 위해서예요. 한 번씩 마을 사람들 몰래 에베르 꽃을 찾아 숲에 드나들곤 했는데 오늘은 운이 없었어요. 내가 먼저 몬스터의 기척을 느꼈어야 했는데 말이죠. 에베르 꽃은 잎이 붉은색이고 꽃이 초록색인 신비의 꽃이에요. 사시사철 지지 않고 피어 있지만 요즘은 정말 찾기 어려워져 엄청 귀한 꽃이 되었죠."
아, 뭐 병든 아버지나 어머니를 위해 신비의 꽃을 찾아 죽음을 무릅쓰고 숲에 들어온 소년의 이야기 그런 건가.
뻔한 스토리지만 그래도 용감하고 기특한 녀석이군.
"어때요, 기사님? 얘기만 들어도 근사한 꽃일 것 같죠? 그 꽃을 루시아에게 주면 아마 제 마음을 받아주겠죠? 내 목숨을 걸고 구해 온 신비의 에베르 꽃!"
이건 그냥 정신 나간 놈이구나.
"폴, 잠시 너희 마을에 들려도 될까? 네 말대로 나는 작위를 받으러 시엠브레 제국에 가는 길인데, 북반구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이곳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제국에 가본 적이 있거나 경험이 많은 어른과 대화를 좀 나눠보고 싶은데 말이야. 예를 들면 네가 아까 말했던 매튜 남작님 같은."
"남작님은 지금 마을에 안 계세요. 라트니아 왕국에 식량 원조를 요청하러 가셨거든요. 아! 라트니아는 우리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왕국이에요. 두 달이 다 되어가니 돌아오실 때가 됐긴 했지만 정확히 언제 오실지는 몰라요. 원조를 받아내셨다면 식량을 가득 실은 수레와 함께 돌아오셔야 하니까요. 아, 이번에 남작님이 식량을 얻어오신다면 감자를 구워 먹을 수 있으려나? 지금은 식량이 부족해 무조건 수프를 끓여서 먹고 있거든요. 하지만 기사님이 우리 마을에 오는 건 대환영이에요. 어서 가요! 마을 사람들도 좋아할 거예요."
어휴, 하나를 물으면 열을 내뱉는 녀석이다.
"고마워. 그럼 이제 마을로 가자."
나는 마을에 도착하기 전까진 폴에게 되도록 말을 걸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 * *
폴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키르칸이라는 마을은 굉장히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을의 모습이 마치 TV에서 보던 마야 문명 관광지 위에 새로운 건물들을 지어놓은 모양새랄까.
그리고 마을이라길래 한 백여 명 모여 사는 시골 마을을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새로 지은 건물들이 흔적만 남아 있는 원래 터보다 훨씬 작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그런 마을이었다.
폴의 집에 들어가자 감자를 삶는 듯한 냄새가 코를 간지럽혀왔다.
그러고 보니 이미 저녁 시간이 지났는데 이 행성에 도착한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집에 들어온 폴이 주방으로 뛰어가며 소리쳤다.
"어머니! 거실로 나와보세요! 숲에서 남반구에서 오신 검사님을 만났어요. 이름은 수호예요."
"뭐라고? 폴! 혼자 숲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잖니!"
"아차차. 괜한 소리를. 어쨌든 이분은 제 생명의 은인 수호라고 해요. 시엠브레 제국에 가서 검술을 인정받아 기사 작위를 받으시려는 모양이에요. 이 분 몸이 호리호리하긴 해도 검술이 엄청나다고요!"
뭐? 호리호리? 내가 요 몇 년간 운동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재킷을 걸치고 있어서 티가 안 나나 본데 막상 내 실전 근육을 보면…….
"폴! 너 이 자식 또 숲에 다녀온 게냐?"
걸걸한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키가 2미터는 되어 보이고 대흉근 한쪽이 내 몸통만 한 사내가 웃통을 벗은 채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나를 발견하곤 성큼성큼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불쑥 내민 손의 손가락 두 개가 내 손바닥 크기만 했다.
"안녕하시오! 나는 폴 아버지 파커라고 하오. 우리 폴을 구해 주셨다니 정말 고맙소. 저놈이 혼자 숲에 가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도통 들어먹지를 않아서. 아무튼 잘 오셨소. 누추하지만 편히 쉬다 가시오. 배고플 텐데 식사도 하시고. 여보! 식사 준비는 다 되었소?"
아, 이래서 나보고 호리호리하다고 한 거구나.
"다 됐어요. 주방으로 가요. 우리 손님도 시장하실 텐데 이리 오세요. 그런데 우리 폴이랑 몇 살 차이 안 나 보이는데 혼자 북반구까지 온 거예요? 기사 작위를 받으러? 어린 나이에 대단하네."
"그러게! 수호, 몇 살이에요? 몇 살인데 벌써 그렇게 강할 수 있죠? 나는 벌써 열여섯인데 아직 저 숲의 몬스터 열 마리도 못 해치워요."
"스물일곱."
만 나이다.
한국 나이로는 스물아홉.
여긴 한국이 아니니 두 살이라도 줄여봐야지.
"에? 스물일곱? 나랑 몇 살 차이 안 나는 줄 알았는데?"
"어머, 수호 님. 그렇게 나이가 많았어요? 폴이랑 친구라고 해도 믿겠어요."
"하하하! 이 친구, 나랑 다섯 살 차이밖에 안 나네! 폴 친구가 아니라 내 친구였네! 하하하!"
파커가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에 크고 두꺼운 팔을 턱 올렸다.
"자, 식사하면서 남반구 얘기 좀 들려주시오. 말로만 들었지, 가본 적이 있어야지. 거긴 정말 사막밖에 없소?"
응? 거긴 나도 가본 적이 없는데.
이거 참, 이야기를 어디까지 지어내야 하나?
삼면이 바다이고 국토의 칠 할이 숲인 나라에서 왔다고 할 순 없고.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사막뿐이죠, 뭐. 아하하."
다행히 그때 식탁 위에 저녁 식사가 놓였다.
각자 하나씩 나눠준 나무로 된 커다란 그릇에는 뽀얀 수프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수프 외에 다른 음식 접시는 더 이상 식탁 위에 올라오지 않았다.
한입 떠먹어보자 감자도 고구마도 아닌 그 중간 어디의 맛이 나는 수프였다.
땅이 이렇게 척박하니 구황작물 외에는 먹을 걸 구하는 게 쉽지 않겠지.
이 사람들은 매일 이런 걸 먹고 사는 건가.
"와, 맛있네요. 이건 감자수프인가요? 남반구에선 이런 음식조차 구하기가 힘들어서……."
나름대로 고마움의 표현을 한다고 꺼낸 말인데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술술 나와버렸다.
"에휴, 그래서 이렇게 마르고 어려 보이나 보다. 더 있으니 많이 먹어요. 응?"
어제저녁으로 뉴욕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포터하우스를 먹었는데 지금은 감자죽도 못 먹어 덜 자란 사람이 되어버렸다.
"네, 그런가 봐요. 파커 씨 몸을 보니 역시 사람은 잘 먹어야 하는군요. 감사합니다."
아주머니의 솜씨가 좋은 건지 어쨌든 이 알 수 없는 구황작물 수프는 그래도 제법 맛이 좋았다.
폴의 가족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식사하고 있는데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꽝이가 갑자기 일어나 문 앞으로 가더니 귀를 수평으로 내리고 하악질을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밖이 좀 소란스러워진 것 같았다.
"어째 밖이 좀 소란스러운 거 같지 않아? 폴, 좀 나가봐라."
폴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거실로 나가려는 순간 집 문이 벌컥 열리며 다급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커! 몬스터가, 몬스터가 떼 지어서 마을로 쳐들어왔어!"
"뭐야? 몬스터가 마을에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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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6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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