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 라트니아 왕국 】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럼 이제 떠나보겠습니다."
"아니네. 우리가 고마웠네. 자네가 온 뒤로 마을에 활기가 돌아."
"그야 아직도 가죽을 다 못 벗겼으니까요. 하하."
"그건 그렇지. 하지만 누구 하나 일이 많다고 불평하는 주민은 없다네. 다 자네에게 고마워하고 있지."
"얼마 머물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다시 들르고 싶네요."
"언제든지 환영일세. 부디 몸조심하고. 아, 그리고 이 서신을 가져가게. 내가 이래 봬도 라트니아 왕족들과 친분이 좀 있네. 내 인장을 찍은 서신이니 라트니아 왕궁에 가서 이걸 보여주면 자네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낌없이 지원해 줄 것이야."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곳은 이곳 변방과는 달라.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마을에서 했던 그런 일을 거기서도 벌인다면 단번에 제국에 소문이 퍼질걸세."
"네. 조언해 주신대로 남반구에서 온 칼 좀 쓰는 사내 정도로만 처신하죠."
"나가세. 자네와 함께 마리노 왕국까지 동행해 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네. 표면적으로는 자네와 함께 시엠브레의 기사 시험을 보러 가는 지원자들일세. 물론 그들은 마리노 왕국에서 기사 시험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올 계획이지. 제국 안까지 동행해 주지 못하는 점 이해해 주게나."
"아닙니다. 거기까지 신경 써주시는 것도 너무 감사드립니다. 사실 이것도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고 도와주신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저를 돕는다는 건 시엠브레에 반역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자네에겐 미안하지만 여차하면 다 잡아떼고 마을로 돌아오라 일렀네. 하하하."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냥 남반구에서 넘어온 기사 지망생인 줄 알았다고 하십시오."
마을 남부 광장에 나오자 얼굴이 익숙한 소년 한 명과 갓 성년이 지나 보이는 청년 두 명이 여행 준비를 마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폴?"
"수호! 헤헤."
"너도 동행자야?"
"당연하죠! 누가 봐도 이 마을에서 기사 시험을 보러 가기 제일 적당한 사람은 나인걸요!"
"뭐야, 너 아버지랑 마을 임원들에게 허락 못 받아서 못 간다고 했잖아."
"어젯밤에 극적인 협상이 이루어졌죠."
폴의 아버지 파커가 폴의 뒤통수를 한 대 갈기며 앞으로 나와 말했다.
"극적인 협상은 무슨! 망할 놈……. 수호, 이놈이 이번에 자기를 안 보내주면 죽을 때까지 말썽을 부릴 것이고 이번 한 번만 수호와 여행을 떠나게 해주면 얌전히 가업을 잇겠다고 사흘 내내 떼를 썼다오. 내 마지못해 허락할 수밖에 없었지만 수호가 이놈과 함께 가기 싫다면 이놈도 더 떼를 쓸 수 없겠지. 어떻소? 이놈과 함께 떠나도 괜찮겠소?"
난처한 질문이군.
"물어볼 필요도 없다니까요! 수호가 날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그렇죠? 같이 갈 거죠?"
폴이 펄쩍펄쩍 뛰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귀에 대고,
"제발. 제발 나 좀 이 지루한 마을에서 몇 달만이라도 꺼내주세요. 제발."
하아…….
"저는 상관없습니다. 폴이 정 원한다면 함께 떠나도록 하죠. 무사히 잘 돌려보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휴. 저놈이 무사히 못 올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마을 영웅님께 폐를 끼칠까 봐 그러죠."
* * *
마을을 벗어난 우리는 사막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폴이 에릭에게 물었다.
"에릭! 라트니아엔 정말 기사들이 많이 있어요?"
"그럼, 라트니아는 엄연한 왕국인걸. 정식 기사 작위를 받은 기사들로 이루어진 기사단이 두 개나 있어."
"와, 그럼 다들 우리 매튜 남작님처럼 불사인이에요?"
"그렇진 않아. 시엠브레에서 기사 작위를 받아 파견 나온 기사들은 불사인이지만, 라트니아 왕궁에서 작위를 받은 기사들은 우리 같은 일반인이야."
에릭은 이미 매튜 남작과 함께 라트니아 왕국에 여러 번 다녀온 경험이 있을 정도로 마을에서 신망받는 똑 부러지는 청년이었다.
갈색 머리를 하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가진 폴과는 달리 에릭은 금발 머리에 각지고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마치 잘생긴 할리우드 배우를 보는 듯한 외모를 가진 검사였다.
그리고 내 옆에는 자신을 소개할 때 몇 마디 꺼낸 것 말고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은 레온이라는 청년이 묵묵히 길을 걷고 있었다.
마법사가 많지 않은 키르칸에서 독학으로 마법을 공부했다는 레온은 폴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과묵한 마법사 지망생이었다.
어려서부터 책에 빠져 책만 읽다가 마법에 심취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다른 키르칸 사람들과 비교하면 유독 마르고 왜소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까진 불평 한마디 없이 잘 따라오고 있지만 이 사막 한가운데서 언제 갑자기 픽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몸이었다.
"에릭, 이 길 따라가면 언제 마을이 나온다고?"
"오늘은 길에서 야영해야 할 거고, 내일 밤이 되기 전엔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작은 마을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묵을 여관 정도는 있어요."
아무래도 사막길에 들어서고부터 아무 말 없이 계속 땅만 보고 걷고 있는 레온이 신경 쓰였다.
"레온, 괜찮아? 고개 좀 들어. 힘들다고 그렇게 바닥만 보고 걸으면 더 힘들어. 형이 행군 많이 해봐서 알아."
"네? 아, 저 하나도 안 힘들어요."
"너 지금 땅만 보며 멍하니 걷고 있는 게 곧 쓰러질 사람처럼 보인다니까?"
"아,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해요. 힘들어서가 아니라 어제 읽은 책 내용을 되새기고 있어서 그런 거예요."
"책을 되새기고 있다고?"
"네. 걷는 동안은 책을 못 보잖아요. 그래서 어제 읽어둔 책들 내용을 차례차례 다시 떠올리고 있어요. 그럼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발견하기도 하고, 더 오래 기억하기도 좋고요."
"오늘 걷는 내내 그러고 있었던 거야?"
"네."
에릭과 함께 저 앞에 걷고 있던 폴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냥 두세요, 수호. 레온은 어렸을 때부터 저랬어요. 책을 읽고 있거나, 멍하니 있거나 둘 중 하나죠. 레온은 멍하게 있을 때 뭐 하냐고 물어보면 항상 책 내용을 떠올리는 중이라고 하는데 사실 저는 믿지 않아요. 어떻게 한 번 읽은 책 내용을 다음 날 하나하나 떠올릴 수 있겠어요? 아마 그냥 멍때리는 건데 무안해서 저렇게 말하는 걸 거예요. 그렇지, 레온? 솔직하게 말해 봐."
"쥐방울만 한 놈. 조용히 해. 마법을 독학하는 게 뭐 쉬운 건 줄 알아?"
"쥐방울? 푸하하. 레온, 일 년만 더 있으면 이제 내가 레온보다 더 커질걸? 그때 가서 누가 쥐방울인지 대보자고. 그리고 그 마법이란 건 언제까지 공부만 할 건데? 아직 기본적인 마법 하나 쓸 줄 모르잖아. 마을 사람 아무도 레온이 마법을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없다는데?"
"…기초를 탄탄하게 다지고 있을 뿐이야!"
둘의 대화를 듣던 에릭이 다가와 폴의 머리통을 휘갈겼다.
"레온이 너보다 네 살이나 많은데 언제까지 그렇게 놀려댈 거야! 레온은 너와 달리 이제 성인이라고!"
"아, 왜 때려요. 알았어요, 알았어. 그럼 레온이 마법을 쓰게 되는 날부터 내가 깍듯이 형님으로 모실게요. 그럼 되죠? 우리 키르칸의 모든 성인은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요. 하지만 레온은 아직 직업도 없고 마법사도 아니잖아요?"
"으! 입만 살아가지고! 아무튼 적당히 해! 레온, 너도 그렇게 당하지만 말고 좀 뭐라고 해. 네가 물러 터졌으니 폴이 저러는 거 아냐."
"내버려 둬. 뭐 다 맞는 말인걸."
매튜, 마을 임원님들.
동행에 적당한 인물들을 뽑아주신다면서요.
이게 최선입니까.
* * *
다음 날 저녁이 되자 사막 한가운데 에릭의 말대로 마을이 하나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곧장 여관으로 들어가 방 하나를 예약하고 저녁 식사를 주문했다.
키르칸의 10분의 1도 안 되는 크기의 마을임에도 놀랍게도 이 여관에서는 고기 요리를 주문할 수 있었다.
좀 비싸긴 했지만 아직 여비는 충분했다.
"에릭, 이 마을은 키르칸보다 더 황폐한 곳에 있는 것 같은데도 고기 요리를 파네?"
"여긴 서부와 중부를 잇는 관문 같은 마을이에요. 그래서 용병이나 모험가들이 많이 드나들다 보니 그들이 이 여관에 고기를 팔곤 한다고 들었어요. 지난번 남작님과 왔을 땐 고기가 없었는데 오늘은 운이 좋았네요. 마침 모험가들이 이 마을에 들렀나 봐요."
용병과 모험가들이 이 마을에 와있다는 건 에릭의 설명이 없어도 이미 알 수 있었다.
여관 1층 식당은 이미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만석이었는데, 조금만 더 늦게 도착했더라면 식사 자리도 방도 못 구할 뻔했다.
그때 등에 기이한 모양의 거대한 검을 멘 우람한 사내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특이한 모습에 몇몇 테이블에서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붉은 머리에 저 무식하게 넓은 검… 지금 들어온 사람, 용병 알렉스 아니야?"
"뭐? 용병 알렉스까지 이 사냥에 참여한다고? 이번 사냥은 정말 규모가 보통이 아닌가 보네."
이름을 좀 떨친 용병인지 여기저기서 그를 알아보는 가운데 그 사내는 식당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성큼성큼 우리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왔다.
그리곤 누가 봐도 우리 일행의 리더처럼 보이는 에릭에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시오. 나는 '홀로 떠도는 용병' 알렉스라고 하오. 북서부에선 꽤 유명한데 표정을 보니 날 모르는 모양이군. 어쨌든 이쪽 테이블이 그나마 좀 비어 있어서 그런데 합석을 좀 해도 되겠소?"
에릭이 내 눈치를 보았고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에릭에게 말을 걸어왔던 사내가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 금발 검사님이 아니라 이쪽 분이 리더인 모양이군. 나이도 어리고 남반구인인 듯한데 제법 한가락 하시는 모양이오?"
"리더도 아니고 한가락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제가 나이가 제일 많으니 제 의견을 물은 것뿐이에요."
"아 그렇소? 그러고 보니 남반구 인들은 제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게 특징이지. 오랜만에 남반구인을 보다 보니 깜빡했소. 어쨌든 허락해 주셨으니 합석을 좀 하겠소."
자신을 알렉스라고 소개한 사내는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랗고 기이한 검을 테이블에 걸쳐두고 내 옆자리에 앉았다.
"주문은 하셨소? 사흘을 노숙하며 뛰어왔더니 배가 등에 붙을 지경이군. 이봐, 주인장! 여기 이분들이 시킨 음식 그대로 한 상 더 주시게!"
식당이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주문을 마친 데릭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좀 많이 먹는 편이오. 하하."
잠시 후 우리 식탁 위에는 구운 고기와 고기를 넣은 수프가 8인분 차려졌다.
"멧돼지 요리로구만. 누가 꽤 큰 놈을 잡아 온 모양이지?"
자기 몫의 4인분 중 절반가량을 순식간에 해치운 알렉스가 우리에게 물었다.
"보아하니 용병은 아닌 것 같고. 모험가들이오? 당신들도 산티아고 공작의 몬스터 토벌대에 참가하러 라트니아 왕국에 가는 길이오?"
알렉스의 물음에 폴이 답했다.
"토벌대요? 우린 그런 데 참가하러 가는 중은 아니고, 시엠브레 제국에 기사 시험을 보러 가는 길이에요. 라트니아 왕국도 들를 계획이지만 그냥 지나는 길일 뿐이죠."
"작위를 받아 불사인이라도 되려고 하시는 건가? 하하하. 그런데 요즘 시험 난이도가 많이 높아졌다고 들었소. 점점 더 아무에게나 작위를 내주지 않고 있지. 아무튼 잘해 보시오. 하하하."
"우리 실력을 보고 나면 그런 말은 못 할걸요, 특히 여기 수호는……."
쓸데없는 소리를 떠들려는 폴의 말을 에릭이 끊었다.
"그런데 알렉스, 산티아고 공작이라면 라트니아 왕국에서 왕 다음으로 큰 세력을 가진 귀족 아닙니까? 그가 왜 용병을 모으고 있나요?"
"뭐 왕국 서쪽 숲 몬스터를 완벽히 토벌할 계획이라고 하던데 참가 보수가 꽤 쏠쏠하여 보다시피 수많은 사람이 라트니아 왕국으로 가고 있는 길이지. 아마 당신들 빼면 여기 있는 사람 대부분이 그 토벌대에 참가하러 가는 길일 거요.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참가 자격을 얻을 수 있을지는 가 봐야 알겠지만."
* * *
4월 30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17,20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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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금액 82조 6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