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 * *
"그런데 알렉스."
"수호, 말씀하시오."
"사흘 전 자신을 소개할 땐 '홀로 떠도는 용병, 알렉스'라고 소개하지 않았어요?"
"그렇소. 실력이 워낙 뛰어나 굳이 팀으로 움직이지 않고도 한 번 맡은 의뢰는 실패하는 법이 없다고 하여 붙여진 별명이지."
"그런데 왜 삼 일 내내 우리를 따라오는 건가요? 홀로 떠돌지 않고."
"말하지 않았소. 나도 라트니아 왕국에 가는 길이라고."
"토벌대인지 뭔지에 참가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고 굳이 이른 새벽부터 출발한 우리를 따라오는 이유가 뭐냐고요. 여관에서 들어보니 토벌대 참가 일정은 아직 여유가 있다던데요."
"말하지 않았소. 나는 홀로 떠도는 용병이라고. 토벌대에 참가하는 사람들과 굳이 같이 움직일 필요는 없지."
"그러니까, 저도 묻잖아요. 홀로 떠도는 용병인데 왜 사흘 동안이나 우리를 따라오고 있냐고요."
"첫 번째는 나도 그날 새벽에 우연히 눈이 떠졌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우리가 가는 방향이 같기 때문이고, 세 번째는 그날 아침에 수호 당신이 애써 숨기고 있는 그 검술 실력을 봐버렸기 때문이오."
사흘 전 마을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막길을 헤매는 몬스터 열댓 마리를 상대했었는데 그때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전혀 의외의 곳에서 몬스터를 맞닥뜨린 상황이었는데, 나중에 들은 알렉스와 에릭의 설명에 의하면 숲에서 만난 인간을 쫓던 몬스터가 길을 잃고 사막을 헤매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
어쨌든 그 몬스터들을 상대하면서 매튜 남작의 조언대로 그럭저럭 검 좀 쓰는 남반구인을 흉내 내고 있었는데 몬스터 한 놈이 폴의 뒤통수를 노리는 것을 보고 검의 속도를 한 번 끌어올렸던 게 이 작자의 눈에 발각되었던 모양이다
"귀신은 속여도 나 알렉스는 속일 수 없지. 무슨 사연이 있어 검술 실력을 숨기고 다니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신들을 따라다니면 재밌는 일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소. 어차피 라트니아 왕국에 도착하면 나는 산티아고 공작에게 갈 계획이니 그때까진 좀 같이 다닙시다. 그쪽 일행은 왕궁에 들렀다가 바로 떠날 거라고 하지 않았소."
뭐, 가는 길이 같으니 같이 가는 것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알렉스가 매일 열 번도 넘게 대련을 하자고 청해 오는 것이 문제였다.
오랜만에 자기 피를 끓게 하는 무인을 만났다나.
"좋아요. 같이 가는 건 좋으니 그럼 이제 대련해 보자는 말은 제발 그만 하세요."
나는 무인이 아니다.
필요할 땐 언제든 마그네타 검을 빼 들 용의가 있었지만, 무슨 힘겨루기 같은 것을 하기 위해 대련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쳇. 알겠소. 남자가 쪼잔하기는. 그 검 한 번 맞대는 게 뭐 그리 무섭다고 그렇게 피하는 거요."
"알렉스, 일부러 자극하려고 그렇게 말하는 거 다 압니다."
"들켰군."
그때 폴이 자신의 허리춤에서 낡은 검을 꺼내 들더니 알렉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알렉스! 저요! 저랑 하자니까요? 알렉스야말로 저와 붙어보는 게 무서운 거죠? 왜 안 한다는 수호랑은 그렇게 대련하고 싶어 하면서 나, '키르칸의 떠오르는 젊은 검사' 폴이 친히 대련해 주겠다는데 왜 그건 거절하는 거죠?"
"비켜라. 하급 몬스터에게 뒤통수나 내주는 어린애랑은 안 싸운다."
"어린애 아니라고요! 그리고 수호가 도와주지 않았어도 내가 처리할 수 있었다니까요!"
"아무튼 검 집어넣어라. 얻어맞기 싫으면."
"쳇."
"그런데 수호, 산티아고 공작의 몬스터 토벌대엔 정말 참가하지 않을 생각이오? 기여도에 따라 꽤 큰 보상이 있을 거라던데? 이 일행이 토벌대에 참가한다면 나도 이번엔 당신들과 팀으로 참가할 생각도 있소만."
이 얘기도 사흘째 매일 듣고 있다.
꽤 집요한 인간이네.
"그건 홀로 떠도는 용병 알렉스 씨 홀로 참가하세요. 저희는 별로 관심 없습니다."
"듣기론 젊은 왕자도 참가한다고 하는데 어쩌면 왕가의 마음에 들어 라트니아에서 한자리를 꿰찰 수도 있는 기회요."
"글쎄 관심 없대도요."
순간 에릭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왕자님이 참가하신다고요?"
"뭐,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들었소. 왜? 그럼 이제 좀 참가할 마음이 생기시는가? 에릭 이 친구, 그렇게 안 보였는데 출세욕이 있는 친구였구먼."
"그런 게 아니라……."
잠시 망설이던 에릭은 나에게 다가와 가만히 말을 걸어왔다.
"수호, 잠깐 따로 이야기 좀 할 수 있어요?"
"응. 어렵지 않지. 저쪽으로 잠깐 갈까?"
일행에게서 어느 정도 떨어지자 에릭이 말문을 열었다.
"그… 몬스터 토벌대에 우리도 참가하면 안 될까요? 수호가 빌데르로 바삐 가야 하는 건 알지만, 참가한다고 해도 일정이 이삼 일 정도 늦어지는 정도일 테니까요."
"갑자기 거긴 왜 참가하겠다는 거야? 진짜로 너 왕자인가 하는 사람한테 잘 보여 키르칸으로 안 돌아갈 계획이야?"
"그런 게 아니고요. 짧게 얘기하자면, 라트니아의 왕자님이 지금 위험한 것 같아요."
"왜?"
"몇 달 전 매튜 남작님과 라트니아에 방문했을 때 들은 얘긴데, 곧 산티아고 공작의 첫째 아들과 라트니아의 공주님이 결혼식을 올리게 될 거예요."
"그건 좋은 소식 아니야?"
"산티아고는 라트니아의 제1 공작이에요. 왕족 다음으로 높은 권세를 가지고 있죠. 하지만 그는 거기서 만족할 사람이 아니에요. 더 큰 야망을 품고 있어요. 아마 이번 혼사를 통해 라트니아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들 거예요. 이건 매튜 남작님의 의견이니 믿으셔도 돼요."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그거랑 이번 사냥이랑 무슨 연관이 있는데?"
"공작이 자신의 아들과 공주를 결혼시키고 나면 이제 그의 앞을 가로막을 권력을 가진 사람은 왕밖에 남지 않죠. 하지만 라트니아의 왕께선 지금 몸 상태가 좋지 않으세요. 하루가 다르게 건강이 나빠지고 있어요."
"그럼 혹시 라트니아에 왕자가 한 명이야?"
"네."
"그럼 그 왕자가 죽으면 다음 왕이 될 사람은……."
"공주님이 여왕님이 되시겠죠."
"공작은 여왕님의 시아버지가 되는 거고?"
"네……. 그리고 나중에 공주님이 아들을 낳게 되시면 공작은 왕의 할아버지가 되죠. 물론 그 전에 다른 귀족들이 힘을 모아 다른 왕가의 혈통을 왕으로 추대할 순 있겠지만 이미 산티아고의 세력이 워낙 막강하기 때문에 그건 어려울 거예요."
"자연스럽게 라트니아의 1인자 가문이 되는 거군."
"왕자님만 없앨 수 있다면 이제 스스로 왕족이 되는 거죠."
"그래서 네 생각엔 지금 왕자님이 위험하다? 이번 몬스터 사냥 중에 살해당할 수 있다?"
"네.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에요."
"나야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왕이 누가 되든 별 상관은 없는데. 그 방법은 좀 마음에 안 들긴 하네. 토벌대에 참여하면 일정이 얼마나 늦어지지?"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말씀드렸다시피 이삼 일 정도?"
"매튜 남작과 너의 의견에 따르면 라트니아 왕국의 왕족은 좋은 사람들이고?"
"물론이죠. 라트니아의 왕족은 매튜 남작님만큼이나 백성들을 끔찍하게 아끼는 분들이에요."
"좋아. 토벌대에 참여해서 왕자라는 사람을 구해 보자. 이건 어디까지나 에릭 네 부탁이기 때문에 들어주는 거야. 대신 일정이 사흘 넘게 지체되어선 안 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수호!"
에릭이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대신 저기 저 빨간 머리 용병한테는 그냥 네 출세를 위해 토벌대에 참가한다고 해. 이런 일은 많은 사람에게 알릴수록 복잡해져."
"네! 알겠어요!"
저 멀리서 폴의 외침이 들려왔다.
"뭐예요! 둘이 무슨 비밀 얘기하는 거예요! 나한테도 알려줘요!"
일행에게로 돌아간 우리는 공작의 몬스터 토벌대에 참가할 것임을 알렸다.
처음에 폴은 에릭에게 출세에 눈이 멀어 키르칸을 버린 배신자라고 소리소리를 치며 달려들었지만, 에릭은 폴에게도 굳이 자초지종을 해명하지 않았다.
다만 폴이 배신자라는 단어를 입에 스무 번쯤 담았을 때 에릭은 폴의 머리통을 거세게 갈기며 '너도 틈만 나면 시엠브레에 가서 기사 작위를 받을 거라고 떠들고 다녔잖아!'라고 소리쳤다.
* * *
일주일간의 사막 노숙 생활을 한 끝에 우리는 해변에 있는 두 번째 마을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할 마음에 들뜬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여관부터 찾았다.
여기까지 오는 중간에 길 잃은 몬스터도 또 만나고 사막 강도단도 두 차례나 만났지만, 그때마다 나를 흘낏흘낏 보는 알렉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나는 검도 빼 들지 않은 채 싸움을 관망했다.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언제든 나설 생각이었으나 생각보다 알렉스와 에릭의 무력이 상당했다.
수많은 전투 경험을 가진 알렉스가 지금은 에릭보다 몇 수 위였지만, 에릭 역시 이렇게 몇 년만 더 훈련하고 경험을 쌓는다면 검술로는 알렉스에게 크게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반면 조용한 마법사 지망생 레온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뒤에서 멈칫거리며 몇 차례 마법을 사용해 보려고 하다가 이내 포기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매번 싸움이 끝나고 난 뒤 자신의 무용담을 가장 길게 늘어놓는 건 단연 폴이었다.
"그 강도놈이 들고 있던 무식한 망치랑 내 검이 부딪쳤다간 검이 남아나질 않겠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검을 뽑지도 않은 채 그놈의 망치질을 세 번이나 맨몸으로 피해 낸 뒤 몸을 굴려 결국 그놈의 사각지대로 들어섰죠. 이때다! 한 저는 검을 촥! 빼 들곤 놈의 허벅지를 그대로 그어버린 거예요. 수호,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수호는 다 봤죠? 내 날카로운 공격에 그놈 허벅지에서 피가 터져 나오는걸."
잘 봤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강도의 거대한 망치를 겨우겨우 피하면서도 그 긴박한 와중에 중간중간 나에게 도와달라는 눈빛까지 보내는 모습을.
어찌나 바닥을 데굴데굴 잘 구르던지 강도는 결국 제 발에 제가 걸려 중심을 잃고 넘어졌지.
그리고 폴 너는 넘어진 강도의 허벅지를 입으로 물어뜯었고…….
"응, 잘 봤다. 대단하던데? 피가 아주 분수처럼 터져 나오더라."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레온이 물었다.
"그런데 수호. 제가 볼 땐 좀 위험한 상황도 몇 번 있었는데 왜 끝까지 나서지 않은 거죠?"
여전히 말수가 적었지만 그래도 같이 다닌 지 열흘이 되어가자 이따금 말을 걸어오는 레온이었다.
"내 눈엔 크게 위험해 보이진 않던데? 그러는 넌? 매번 뒤에서 마법을 준비하는 것 같던데 왜 쓰지 않았어?"
"그, 그건……. 혹시라도 우리 편이 다칠까 봐."
"꼭 공격 마법 말고도 우리 편을 서포트하는 마법도 있지 않아? 내가 본 마법사들은 기사들 뒤에서 서포트 마법을 많이 쓰던데."
"아… 재생과 버프 마법은 불사인에게나 걸어줄 수 있는 마법이에요. 일반인에게는 소용없어요."
"아, 그런 거야? 나는 몰랐지. 내가 붙어 본건 대부분 불사인이었으니."
순간 알렉스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크게 내더니 나를 지목하며 말했다.
"이봐, 이봐. 내가 분명 실력을 숨기고 있다고 했지? 수호, 불사인들과도 많이 붙어본 것이오? 어땠소? 이겼소? 이겼으니 이렇게 멀쩡히 돌아다니는 거겠지. 그 버프 마법이라는 게 걸린 불사인 기사는 그렇게 빠르다던데, 어떻소? 상대할 만하오?"
아, 젠장.
말실수했네.
이걸로 또 며칠을 시달리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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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7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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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금액 82조 9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