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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 코인재벌-54화 (54/200)

54화

* * *

"내가 몬테넬 문자는 잘 몰라서. 그 남반구인 궁사랑 시엠브레 불사인 궁사가 출전하는 가문이 어디 어디야?"

"아, 렉스 너 몬테넬 문자는 모르냐? 말은 유창하게 잘하길래 읽을 수도 있는 줄 알았지."

이들은 내가 자신들의 언어를 잘 말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나는 아직도 여기 인간들이 나에게 유창한 한국어를 하는 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의 입 모양까지 바꿔서 보이게 만드는 이 동시통역기의 능력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문자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고, 나는 여기선 까막눈이었다.

"멍청아! 말은 조금씩만 다르지 다들 비슷비슷하잖아. 하지만 문자는 완전 다르다고. 내가 알려줄게, 렉스."

"뭐야! 너 왜 계속 나한테는 뭐라고만 하고 렉스한테만 그렇게 친절한 거야!"

"렉스는 박력 있고 낭만적이잖아. 얼굴도 하얗고."

"뭐? 박력은 내가 더 있지! 그리고 사내가 얼굴이 하얘서 어디다 써!"

"알았으니 좀 닥쳐. 렉스한테 대진표 설명해 주게."

필라르는 나에게 대진표를 천천히 읽어주었고, 잠시 씩씩거리던 세르히오는 감자구이 꼬치를 우적우적 먹기 시작했다.

"…그래서, 샤넬이 참가하는 가문은 콘티넬이고 어제 저 도박쟁이가 말한 대로 불사인이 참가한다는 가문은 시오넬 가문이야. 여기엔 참가자 이름만 쓰여 있으니 시오넬의 용병이 시엠브레에서 온 불사인이라는 건 사람들은 모르겠지."

감자구이 꼬치를 먹던 세르히오가 그새 기분이 풀린 듯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하하. 하지만 여기 대진표 콘티넬 가문 아래에는 그 남반구인 궁사의 이름이 떡하니 적혀있으니 다들 콘티넬에 걸겠지. 하하. 시오넬에 건 나는 곧 부자가 된다."

갑자기 필라르가 세르히오의 등짝을 짝 소리가 나게 후려치며 물었다.

"뭐? 부자? 너 여기에 얼마나 건 거야? 어젠 본전만 찾겠다며!"

"이렇게 확실한 정보가 있는데 어떻게 본전만 찾아. 좀 더 걸었지."

"너… 이 화상아! 그래서 돈은 언제 모아!"

"내 돈 잃는데 네가 왜 더 열을 내는데 필라르."

"그, 그야."

그때, 장내를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으로 목소리를 키운 듯 대형 경기장 전체에 울려 퍼질 만한 크기의 목소리였다.

- 지금부터 가문 대항전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든 경기는 가문별로 네 명의 선수가 출전합니다. 총 여덟 가문이 가문의 명예를 걸고 대결하게 되며, 곧 치러질 제1경기에서 네 가문이 탈락합니다. 첫 번째 경기는 멧돼지 잡기입니다.

"와아아아!"

사회자가 경기 이름을 밝히자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세르히오, 이 사람들 왜 이래? 멧돼지 잡기가 무슨 경기길래 이렇게 환호성을 지르는 거야?"

"렉스, 오늘 저녁엔 돼지고기랑 술 먹자! 내가 돈 따서 고기 살게."

"그러니까 무슨 경기냐고."

고기 먹을 생각에 흥분한 세르히오 대신 필라르가 경기 방식에 대한 설명에 나섰다.

"한 가문씩 나와 오른쪽 끝 단상 위에 설 거고, 대회장 왼쪽 끝에서는 굶주린 멧돼지들이 서른 마리씩 나올 거야. 그럼 가문 대표로 나온 네 명은 화살로 멧돼지들을 잡아야 하는데, 그동안 멧돼지가 이동한 거리로 승부를 겨루는 경기야. 가장 많이 달려든 멧돼지가 쓰러진 지점이 궁사들이 선 단상에서 멀수록 높은 점수를 받지."

"먹을 식량도 부족한 땅에서 하기엔 좀 낭비인 경기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번엔 세르히오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 반대야, 렉스. 이건 매일 감자나 먹는 사람들을 위해 일부러 열리는 경기야. 이 경기를 위해 몬테넬에서는 일 년 넘게 군사들까지 동원해 큰 숲의 외곽을 돌며 멧돼지를 생포한다고. 그리곤 오늘 이 경기에서 풀린 멧돼지들을 남은 대회 기간 동안 사람들이 먹고 즐길 수 있도록 아주 싼값에 내놓지. 하하하."

세르히오는 입맛을 한번 다진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부턴 어느 술집을 가도 돼지 요리가 준비되어 있을 거야. 이렇게 싼값에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건 4년에 한 번 활쏘기 대회가 열릴 때뿐이라고."

"음, 그렇게 들으니 굉장히 좋은 경기 방식이네?"

"그렇지! 그러니 오늘도 우리랑 술 한잔할 거지? 고기 요리에다가. 오늘은 내가 산다니까. 하하하."

"글쎄. 모르겠네. 어쩌면 오늘 떠나야 할 수도 있어서."

"떠난다고? 갑자기? 왜? 이 대회 보러 온 거 아니었어?"

"필라르한텐 이야기했는데, 너희 둘만 알고 있어. 샤넬이 내 여자 친구야. 난 샤넬을 만나면 이곳을 바로 떠날 거고."

잠시 침묵하던 세르히오가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푸하하! 농담이 많이 늘었네, 렉스. 저렇게 대단한 궁사가 네 여자 친구라고? 뭣보다 어제 필라르 말 못 들었어? 그녀는 세바니아 왕자가 이미 찜했대도?"

"호호호. 그런 건 상관없대. 세르히오, 너랑은 참 다르지? 아, 너무 낭만적이야."

"응? 뭐야 지금? 그럼 진짜야? 내 재산 절반을 날리게 만든 그 여자가 렉스 네 애인이라고?"

"응. 미안하게 됐네. 그런데 어쩌냐? 너 남은 그 재산도 오늘 다 날릴지도 모르는데. 내 여자 친구는 세계, 아니 남반구에서 활을 제일 잘 쏘거든."

"후후. 네 애인이라고 하니 미안하지만, 오늘은 힘들 거다. 어디 경기를 한번 보자고."

떠드는 사이 첫 번째 가문의 선수 네 명이 준비를 마치고 단상에 올라섰다.

- 자, 제1경기 첫 번째 시합, 기뮤넬 가문의 경기가 시작됩니다!

"와아아아!"

경기장 왼쪽 끝의 철문이 열리더니 성난 멧돼지 서른 마리가 경기장으로 뛰어 들어와 입에서 침을 줄줄 흘리며 곧장 궁사들이 있는 단상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피융, 핑.

궁사들은 서둘러 멧돼지들을 향해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멧돼지들의 가죽이 두꺼운 탓인지 조금이라도 빗맞은 화살은 멧돼지에게 꽂히지 않고 튕겨 나갔다.

게다가 멧돼지들이 달리는 속도도 생각보다 빨라 보였다.

"이야, 이거 쉽지 않은 경기네? 멧돼지가 엄청나게 빨라."

"멧돼지가 단상에 도착할 때까지 다 못 잡는 경우도 종종 있어."

"그럼 어떻게 되는데?"

"육탄전이지, 뭐."

"누가 안 도와줘?"

"응. 저 단상에 선 이상 알아서 멧돼지를 다 해치워야 해."

그러고 보니 궁사들의 뒤편엔 만약을 대비한 창과 검이 놓여 있었다.

첫 번째 가문은 멧돼지가 단상에 닿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마지막 멧돼지를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두 번째로 시오넬 가문이 단상 위에 올랐다.

단상 위에 오른 네 명 중 한 명은 세르히오의 말대로 거대한 강철 인간이었고, 그의 모습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멧돼지들이 뛰어나오자 불사인은 천천히 자신의 거대한 활을 들어 올렸다.

다른 궁사 셋이 연신 시위를 당겼다 놓는 것을 반복하는 와중에도 가만히 활을 들고 있던 불사인이 어느 순간 시위를 놓자 강력한 파공음과 함께 거대한 화살이 멧돼지들에게로 향했다.

쐐애애액.

퍽, 퍽, 퍽, 퍽.

불사인의 화살은 멧돼지 네 마리를 꿰뚫고도 그 힘을 잃지 않고 그대로 날아가 대회장 반대편에 그대로 꽂혔다.

"우와아아!"

불사인의 퍼포먼스에 관중들이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환호를 보낸 건, 내 옆에 앉아 있는 세르히오였다.

"으어어우아아아! 난 이제 부자다!"

부끄러움은 나와 필라르의 몫이었다.

불사인의 다음 화살은 멧돼지 세 마리를 꿰뚫었고, 잠시 후 멧돼지들은 경기장의 3분의 1도 채 지나지 못하고 모두 쓰러져버렸다.

가장 앞에 있던 멧돼지가 있던 위치에 시오넬의 붉은 깃발이 꽂혔다.

이후 네 가문이 더 나와 실력을 겨루었고, 그때까지 시오넬 가문의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일곱 번째 가문으로 콘티넬 가문이 호명되었다.

필라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렉스! 샤넬 나온다!"

콘티넬 가문의 궁사 네 명이 단상 위에 오르자 세르히오가 계속해서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치며 물었다.

"맞아? 맞냐고. 맞아? 네 애인이야? 아, 맞냐고 아니냐고!"

"…응. 맞아."

단상 위에는 누가 봐도 튀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최수영이 서 있었다.

"샤넬! 샤넬! 샤넬!"

관중석에선 연신 샤넬을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수영은 관중들의 환호에 대답하듯 사방을 돌며 손을 높이 들어 흔들어 보였다.

"와아아아!"

"미친……. 저건 지금까지 본 중에 제일 관종 짓이야."

나는 이번 시합만 끝나면 바로 내려가서 최수영을 조용히 잡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와우. 저렇게 인기 많은 여자가 네 애인이라니. 렉스, 아주 다시 보이는데? 대단해. 어제까진 내 돈만 뜯어가는 악마 같은 여자로만 보였는데 오늘 보니 꽤 예쁘네?"

세르히오는 필라르의 표정이 점점 살벌해지는 것이 안 보이는지 연신 떠들어댔다.

"하하하. 예쁘긴 하지만 오늘은 이기지 못할 거야. 아까 멧돼지 네 마리 꿰뚫어버리는 불사인 화살 봤지?"

"응. 나도 봤지. 근데 샤넬도 봤을 거야. 내가 아는 샤넬이라면 아마……."

"아마?"

"멧돼지들이 나오자마자 다섯 마리를 꿰뚫으려고 할걸?"

"오. 그래?"

잠시 후 철문이 열리며 멧돼지들이 뛰어나왔고, 최수영은 손가락 사이사이마다 하나씩 총 네 개의 화살을 끼워 시위에 메긴 후 45도 각도로 들어 올렸다.

"저걸 한꺼번에 쏠 생각인가? 저것도 대단하긴 하지만, 어쨌든 손가락 사이사이에 낀 화살은 네 개뿐인데? 손가락이 다섯 개니 한 번에 저 이상 시위를 메길 순 없겠지."

"불사인의 퍼포먼스를 봤으면 절대 저기서 만족할 여자가 아니야."

피융.

네 개의 화살이 동시에 하늘로 솟아오르고 몇 초 뒤, 최수영은 재빨리 화살 한 개를 더 시위에 메겼다가 일직선으로 강하게 쏘아 보냈다.

다시 몇 초 후.

"와아아아아!"

경기장이 떠날듯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위쪽으로 쏜 네 발의 화살과 나중에 일직선으로 강하게 쏜 화살이 거의 동시에 다섯 마리의 멧돼지를 쓰러뜨린 것이다.

여유 있는 표정으로 감자를 먹던 세르히오의 입이 떡 벌어지며 감자가 땅으로 떨어졌다.

"저… 저 정도였다고?"

"어제까지 어땠는진 모르겠지만 아마 오늘처럼 도발한 상대는 없었던 거겠지."

"남반구인들이 원래 이렇게 호전적이던가? 렉스, 너도 그래?"

"저 여자는 호전적인 게 아니라, 자기한테 올 관심을 뺏기는 게 싫었던 거야."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단하군. 네 애인."

그 후로도 최수영은 계속해서 한 번에 두세 마리씩 멧돼지를 쓰러뜨렸고, 4분의 1지점을 지나기도 전에 서른 마리의 멧돼지는 모두 쓰러졌다.

제1경기는 최수영이 포함되어 있는 콘티넬 가문이 1위로 통과했고, 하위 네 개 가문은 그대로 탈락했다.

이제는 최수영을 붙잡아 이곳을 떠날 시간이다.

"얘들아, 나 저 밑에 좀 다녀올게. 여기 있어."

필라르가 물었다.

"애인에게 가는 거야?"

"응."

세르히오가 뭔가 아쉬운 듯 말했다.

"찾으면 바로 떠날 거야? 세바니아 왕자의 눈을 피해 사랑의 도피?"

"바로 떠날 계획이긴 한데 그 세바니아 왕자 때문은 아니라니까. 그놈 면상은 내가 한번 보고 떠날 거야. 떠나기 전에 데리고 이리 와서 너희들하고 인사시키고 싶긴 하지만 샤넬이 너무 유명해져서 그게 가능할진 모르겠네."

필라르가 내 등을 떠밀었다.

"어쨌든 어서 가봐, 렉스."

나는 서둘러 관중석을 떠나 선수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을 향했다.

* * *

5월 18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17,480개]

[단가 49억 원]

[평가 금액 85조 6천억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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