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 * *
"저기, 세르히오. 고기는 내가 살게."
"……."
"괜찮아, 세르히오?"
"악마. 렉스 네 애인은 악마야. 내 전 재산을 털어간 지옥에서 온 악마!"
필라르가 잔뜩 웅크리고 있는 세르히오의 등을 걷어차며 소리쳤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많이 걸으래! 내가! 적당히 하랬지!"
"내 돈……. 내 돈……."
"필라르, 세르히오. 난 이제 가서 샤넬 데리고 올게. 세르히오, 괜찮지? 집에 먼저 가 있어. 집으로 갈게. 고기랑 술 많이 사서 갈게."
필라르에게 걷어차이고도 웅크린 자세 그대로 있던 세르히오가 나를 불렀다.
"렉스."
"응?"
"술 많이 사와."
"응."
"고기도."
"알았어."
필라르와 세르히오를 먼저 보내고 콘티넬 가문의 대기 천막으로 내려가자 아까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천막으로 겨우 한 발 한 발 향하고 있는데 뒤쪽이 소란스러워지다가 곧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을 비키시오! 길을 터시오! 세바니아 제2왕자님 지나가십니다!"
세바니아 제2왕자님이라는 말에 뒤를 돌아보자 사람들을 밀치며 길을 트고 있는 근위병 뒤쪽으로 붉은빛의 화려한 장식을 한 말 위에 마찬가지로 붉은빛의 머리 색을 한 왕자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저놈이 그놈이군.
안 그래도 떠나기 전에 면상 한 번 보려고 했었는데 마침 와줬네.
나는 내 여자 친구를 찜했다던 건방진 놈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얼굴에 욕심이 더덕더덕 붙어 있는 생김새였다.
마음 같아선 몇 대 패주고 다신 애인 있는 여자를 건드리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고 떠나고 싶지만, 지금은 이미 최수영이 너무 많이 노출된 상황이니 되도록 조용히 떠나는 방향을 선택해야 했다.
저놈이 먼저 시비를 걸어 오지만 않으면 말이다.
일단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고자 왕자가 가고 나면 최수영을 데리고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때.
"나의 사랑, 샤넬. 밖으로 나와 보시오. 세바니아의 왕자, 나 파블로가 그대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선물을 가지고 왔소."
거슬리지만, 참자.
나는 지구를 지키러 여기에 온 거잖아.
책임감이 막중하다고.
"……."
천막 안이 조용하자 파블로 왕자는 말에서 내려 천막 가까이 다가갔다.
"이리 나와 보시오. 마침 여기 많은 군중이 모여 있군. 이들 앞에서 나 파블로는 오늘 그대에게 청혼할 것이오."
참자. 욕심 많은 정신병자일 뿐이야.
그때 천막이 촤악 걷히더니 최수영이 화난 얼굴로 걸어 나왔다.
"오, 나오셨소?"
"이봐요, 파블로 왕자님. 나는 애인이 있다니까요? 사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알아요? 아주 핫할 때라고요, 지금."
"하하하. 본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나 내 그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워낙 넓기에 그 정도 과오는 용서해 주겠소. 지난날의 실수는 묻어둘 테니 이제 나의 청혼을 받아들이시오."
"아오! 답답해. 용서를 구하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 나는 당신 만날 생각이 요만큼도 없다고요!"
"후우, 활 쏘는 모습만큼이나 도전적이고 당당한 그대의 모습에 이끌린 건 사실이나 이 이상 선을 넘는다면 나도 마냥 이렇게 참고 있을 수는 없소. 오늘은 내 숙소에 가서 이야기를 나눕시다."
파블로 왕자가 최수영의 손목을 낚아채려고 하는 찰나, 나의 손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싫다잖아."
"감히 건방지게 짐의 몸에 손을 대다니!"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보던 파블로 왕자는 잠시 후 피식 웃더니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섰다.
"오늘 샤넬의 친오빠가 나타났다는 소문은 들었다. 바로 당신이군."
손가락을 하나 펼쳐 내 눈앞에 가져다 댄 파블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감히 짐의 몸에 손을 대다니. 내 피앙세의 친오빠이니 이번 한 번만 참겠다. 다시는 이런 경솔한 행동은 하지 말도록."
"나 친오빠 아닌데?"
"뭐라? 이 건방진 놈. 그럼 방금 네놈의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너는 누구냐?"
"나는 남반구에서 온 용병 렉스다. 저기 서 있는 샤넬의 핫한 애인이지."
"그랬군. 그랬던 거였어. 네놈이 샤넬의 애인이로구나. 나에게 들킬 것이 두려워 친오빠 행세를 한 거였군."
"오빠 행세를 한 적도 없고 널 두려워한 적도 없다. 물론 널 피해서 몰래 빠져나가려고 하긴 했었는데, 이젠 생각이 바뀌었다. 어디서 감히 내 여자 손목을 낚아채서 끌고 가려고 해!"
"건방진 놈! 여봐라! 이놈을 당장 포박하여 무릎 꿇려라!"
파블로의 외침에 주변에 있던 근위병 여섯이 동시에 나에게 다가왔다.
검조차 빼지 않는 것을 보니 나 한 명쯤은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검도 빼지 않고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근위병들 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가장 먼저 손을 뻗어오는 근위병 팔의 상박과 하박을 동시에 잡아 관절 반대 방향으로 그대로 꺾어버렸다.
"으악!"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팔이 거꾸로 꺾여버린 근위병은 그대로 팔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놀란 나머지 근위병들이 동시에 달려들었지만 나는 메타디펜스의 트레이닝 센터에서 검술만 연마한 것이 아니었다.
급히 휘둘러오는 근위병의 주먹을 더킹으로 피해 낸 후 한껏 숙였던 허리의 힘을 이용해 짧은 주먹으로 놈의 복부를 강타했다.
강철로 된 갑옷이 움푹 들어가며 근위병은 한참을 뒤로 밀려나더니 쓰러졌다.
나머지 근위병들이 급하게 검을 빼 들고 나를 찌르거나 베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검을 뽑지 않은 채 그들의 검을 피해 내며 놈들에게 몸통의 회전을 이용한 간결하지만 강력한 주먹을 꽂아 넣었다.
트레이닝센터로 홍수완 선생님을 모셔 사사한 복싱 기술이었다.
"어쩌지? 네 근위병 다 쓰러졌는데."
"하하하. 몸통을 쓸 줄 아는 게 네놈이 어디서 격투술을 제법 익혀왔구나. 내 오늘 이 자리에서 진정한 격투술이 무엇인지 보여주겠다. 건방진 놈. 오늘의 일을 지옥에서 후회해라."
"나는 뭐 죽일 생각까진 없으니 넌 집에 가서 후회해라."
순간 파블로의 몸이 좌우로 움직이는 듯하다가 흐릿하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엄청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놈의 발차기가 내 왼쪽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고, 나는 팔을 올려 발차기를 막아냈다.
콰앙.
엄청난 소리와 함께 나와 파블로는 동시에 반대로 두세 발 밀려났다.
몸이 밀릴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굉장한 파괴력이었다.
다시 스텝을 가다듬고 있는 놈의 발을 보자 푸르스름한 빛이 둘려 있는 것이 보였다.
'검기 비슷한 걸 팔다리에 두른 건가?'
"제법이다만, 언제까지 막을 수 있는지 보자!"
놈의 신형이 다시 시야에서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이번엔 내 눈은 놈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고, 왼쪽에서 주먹을 뻗어오는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틀어 주먹을 피해 내고 그대로 손목과 옷깃을 붙잡아 엎어치기로 놈의 몸을 넘겨버렸다.
퍽!
그대로 척추부터 땅에 메다 꽂혀야 정상인데 그 짧은 순간 놈은 낙법을 사용해 충격을 줄여냈다.
"너도 제법이네? 낙법을 쳐?"
서둘러 일어난 파블로 왕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건방진 놈!"
붉으락푸르락 한 얼굴로 파블로가 다시 내게 공격해 왔다.
"처음엔 좀 당황했는데, 시야의 사각을 이용할 뿐 너무 느려. 이제 다 보인다고."
파블로는 내력이라는 걸 몸의 움직임을 강화하는 데 이용하는지 굉장히 빠른 움직임과 강한 파괴력을 갖춘 공격을 펼쳤지만, 이제 움직임이 훤히 보이기 시작한 이상 더 이상 힘들여 그 공격들을 막을 필요는 없었다.
아래에서 위로 치고 올라오는 놈의 주먹을 가볍게 피해낸 뒤 가드가 풀려 비어 있는 놈의 볼에 싸대기를 한 대 날렸다.
짜악.
놈의 볼이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
"이노옴!"
뺨에 전해지는 충격이 꽤 얼얼할 텐데도 파블로는 바로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돌려차기를 시도했고, 나는 그 공격도 가볍게 흘려낸 뒤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놈의 반대쪽 뺨에 싸대기를 한 대 더 날렸다.
짜악.
"으윽!"
나는 휘청거리는 놈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워 죽지 않을 정도로 놈의 뺨을 날렸다.
짜악.
"남자 친구가."
짜악.
"있다잖아."
짜악.
"그리고 너같이 생긴 애."
짜악.
"싫다잖아."
짜악.
"근데 왜 자꾸."
짜악.
"와서 치근덕거리는 거야."
구경하던 모든 사람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놀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고, 콘티넬 가문의 대기 천막 주변에는 짜악 소리만 계속 울려 퍼졌다.
"그… 그망! 그망해!"
"뭐? 똑바로 말해."
짜악.
"머, 멍처! 그망하아오!"
"그만 때려?"
짜악.
파블로가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잡고 있던 놈의 멱살을 놓자 퉁퉁 부어오른 얼굴을 한 파블로가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끙끙거렸다.
그제야 최수영이 내 곁에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응?"
"시엠브레가 우리 온 거 안다며. 주목을 끌면 안 된다며."
"그랬지."
"근데 이게 뭐야. 오빠 지금 왕국 하나를 통째로 적으로 돌린 것 같은데."
"그러게."
"그리고 보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당장 며칠 후면 북반구 전체에 소문 퍼지겠다."
나는 웅크린 채 바닥에 누워 울고 있는 파블로의 퉁퉁 부은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도 어떡해. 이렇게 못생긴 놈한테 널 뺏길 순 없잖아."
"그건 그래."
"들어가서 옷 갈아입고 소피아랑 인사하고 나와. 빨리 여길 뜨자. 아, 네 짐은 어딨어?"
"다 여기 있어. 챙겨서 나올게. 잠깐만 기다려."
잠시 후 최수영이 손에 치료 장갑을 끼고 나타났다.
"근데 이 사람 치료해 줘야겠지? 무슨 왕자라잖아."
"그냥 내버려 둬. 치료 해주나 마나 다음에 나 보면 죽이려고 들 텐데 뭐."
"그런가? 알았어."
최수영은 치료 장갑을 벗으며 다시 천막으로 들어갔다.
소피아에게 받은 옷인지 귀족 영애나 입을 듯한 고급스러운 재질의 투피스를 챙겨입고 나온 최수영과 함께 나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이야, 이 옷은 뭐야? 뭐 비단 같은 건가?"
"하하핫. 오빠 나 원래 금수저잖아. 여기 평민들이 입는 그런 딱딱한 옷은 입을 수 없어."
"나 입고 있는 이런 거?"
"…응. 오빠야말로 그런 옷은 어디서 구했냐. 어휴, 색깔 봐."
"야, 모험가가 다 이렇게 입고 다니는 거지."
"오빠가 모험가야?"
"일단 여기선 그래. 하하. 가방 이리 줘. 오빠가 들어줄게."
"오, 매너남."
나는 귀족 영애의 비단옷과 어울리지 않는 최수영의 배낭을 받아들고 정령의 마법 주머니에 쏙 넣었다.
"어? 뭐야 이거? 어떻게 들어갔어? 오빠 여기 와서 마법 배웠어?"
"아니. 이번 네 번째 랜덤박스 아이템이야. 정령의 마법 주머니."
"오, 대박 신기해."
나는 세르히오가 알려준 대로 어둑어둑해진 인적 드문 길을 한참을 빙빙 돌아 세르히오의 집에 도착했다.
"세르히오, 나 왔어."
세르히오가 문을 열고 다급히 우리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어서 와, 내 친구 렉스. 그리고 내 전 재산을 털어간 지옥에서 온 궁사님."
세르히오의 뒤에서 필라르가 나타나 세르히오의 뒤통수를 한 대 갈겼다.
"네 재산은 네가 말아먹은 거라니까! 누구 탓을 해 지금. 어서 오세요. 나는 렉스의 친구 필라르라고 해요. 반가워요. 샤넬."
세르히오가 내 손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것을 보고 실망한 눈으로 물었다.
"고기랑 술 안 사 왔어, 렉스?"
"아니야. 사 왔어."
나는 정령의 마법 주머니에 손을 넣어 이리저리 휘젓다가 커다란 술병 네 개와 종이에 포장된 큼지막한 돼지고기를 꺼냈다.
"이거면 충분하지?"
"응, 충분해. 필라르도 오면서 먹을걸 사 왔으니까. 자, 지하실로 어서 내려가자."
"지하실? 주방이 아니고?"
"렉스, 지금 네 소문 다 퍼졌어. 세바니아에서 온 기사들과 몬테넬의 기사들까지 다 널 찾고 있다고. 세바니아 왕자를 아주 감자 으깨듯 으깨놨다며?"
필라르가 말을 보탰다.
"그래서 우리 불 다 끄고 오늘 밤은 지하실에 있어야 할 것 같아. 집마다 돌아다니며 너희를 찾고 있거든. 우리랑 같이 지하에 있다가 새벽에 조금 잠잠해지면 그때 빠져나가."
"고마워. 세르히오, 필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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