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 도적단 독수리 발톱 】
"렉스, 이제 나가도 될 거 같다. 수색도 멈춘 것 같고 여기저기 좀 물어보니 너희가 이미 도시를 빠져나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동트기 직전, 세르히오가 밖으로 나가 상황을 살펴봐 주고 돌아왔다.
"고마워, 세르히오."
"아니야. 친구한테 이 정도쯤은. 더 밝아지기 전에 어서 떠나."
"렉스, 샤넬. 가다가 이거 먹어. 도시락 좀 싸봤어."
"고마워, 필라르."
"만난 지 이틀밖에 안 됐는데 왜 이렇게 아쉽지. 나중에 몬테넬에 꼭 놀러 와."
"솔직히 약속은 못 하겠네. 하지만 혹시라도 몬테넬에 다시 오면, 그땐 세르히오와 필라르를 꼭 만나러 올게."
"그래. 어서 가, 어서."
세르히오가 나와 최수영의 등을 떠밀며 문밖으로 안내했다.
"더 밝아지면 다시 본격적으로 수색을 할 것 같으니까 빨리 가. 해가 더 뜨기 전에 최대한 멀리 가."
"알았어. 우리 간다. 잘 있어. 아! 그리고 필라르, 인제 그만 세르히오 마음 받아 줘. 싫어서 안 받아 주는 것도 아니잖아. 더 시간 끌어봐야 너희만 손해야. 내가 그랬거든."
"뭐, 뭐야? 내가 이 녀석 마음을 왜!"
"하하하. 진짜 간다, 안녕!"
* * *
"수영아, 화살에 마나를 싣는 건 어디서 배웠어?"
"소피아의 아버지한테 배웠지. 몬테넬 최고의 궁사이시래."
"대단하네. 나도 검기라는 걸 좀 배워보려고 했는데 쉽지 않던데."
"당연하지! 검기는 아예 다른 거잖아. 오빠 잘 모르는구나?"
"나는 검기에 관한 얘기밖에 듣지 못해서."
"주변의 마나를 화살에 잠깐 덧씌워 쏘는 기술이랑 몸 안의 내력을 발현시켜 그 형태를 유지하는 기술은 아예 다른 거라고 들었어."
"그래?"
"뭐 그렇다나 봐. 소피아 아버지한테 배운 대로 좀 집중해 보니 며칠 안 걸리던데? 검에 내력을 실어서 유지하는 게 훨씬 어렵다고 하더라고."
"그렇구나. 어쨌든 대단해. 그런 걸 그렇게 금방 배워서 써먹다니."
"나야 뭐 워낙 뭐든 잘하니까. 하하핫."
우리는 무사히 몬테넬 왕국을 빠져나와 이런저런 잡담을 하며 라트니아로 가는 대로를 걷고 있었다.
"…진짜 N마켓은 되잖아? 이 앱은 애초에 지구의 통신망을 쓰는 것도 아니었나 보네."
"응. N마켓에서 동시통역기 못 샀으면 난 벙어리처럼 지낼 뻔했지 뭐야. 그런데 오빠, 이거 뭐야? 코인이 왜 이렇게 늘었어? 만칠천 개가 넘네?"
"응. 여기 온 첫날 몬스터를 천 마리 정도 잡았어."
"대박. 역시 이 남자, 돈 욕심 많네."
"어쩔 수 없었어. 몬스터들이 마을로 쳐들어왔다고."
"아, 그랬어? 어쨌든 되는 거 확인했으면 얼른 휴대폰 꺼, 오빠. 배터리 닳잖아."
"응 알았어. 꼭 필요할 때만 켜야겠네."
"만칠천 개면… 80조 원도 넘잖아?"
"그야 지구에 돌아갔을 때 이야기지. 그러니까 이제 우리 둘 다 더는 소란 피우지 말고 조용히 빌데르로 가자. 거기서 동료들을 만나고 큐브를 조작하는 것만 신경 쓰는 거야. 그래야 지구도 지키고 우리도 돌아가지."
"그러네. 근데 다들 살아 있을까? 제이슨 대위님, 콜슨 중위님."
"그 두 명도 보통 사람은 아니잖아. 무사할 거야. 곧 빌데르에서 만날 수 있겠지. 어쩌면 우리보단 좀 늦을지도 모르지만."
"왜?"
"탈출 캡슐 공간이 부족해서 슈퍼 솔저 수트를 따로 탈출시키더라고. 그 두 명은 아마 그것부터 찾아서 올 거야. 그게 있어야 큐브를 조작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오빠, 혹시……."
"응?"
"뉴욕에 가기 전에 한국에서 술 먹다가 한 말 진심이야?"
"무슨 말?"
"정 안되면 큐브를 부숴버리기라도 하겠다고."
"그땐 술도 마셨고 감정이 좀 격했었지. 그걸 부수면 어떡해. 너랑 같이 한국에 돌아가야지."
"그래. 한국에 돌아가야지. 근데 말이야, 정말 정말 어쩔 수 없을 땐……. 그냥 부숴버려. 그러라고 오빠 따라온 거니까."
"그러라고 따라왔다니?"
"정 안되면 여기서라도 같이 살아야 할 거 아니야. 오빠만 이런 황량한 곳에 있게 할 순 없잖아?"
"하하하, 뭐야. 나랑 여기서 살려고 따라왔다고?"
"아! 쫌! 그게 아니라……. 정 어쩔 수 없을 때 말이야. 지구에 있는 사람들이라도 안전하게 지내게 해줘야지. 우리 가족들, 친구들, 회사 직원들."
나는 최수영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고 그녀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수영아, 주례 보실 분은 정했어. 키르칸의 매튜 남작님이라고, 나이가 400살이 넘으셨는데……."
"아! 쫌!"
* * *
"안녕하세요! 수호, 정말 일행을 만나서 데리고 왔네요? 몬테넬은 어땠어요? 거기도 여기 라트니아처럼 커다란 왕궁이 있나요? 활쏘기 대회는요? 재밌었어요? 아! 제 소개를 할게요. 저는 키르칸의 젊은 검사……."
"네가 폴이구나?"
"어? 어떻게 아셨어요?"
"오면서 렉스한테 이야기 들었어. 여태껏 만난 사람 중에 말이 제일 빠른 아이라더니 정말이네?"
"네? 아이라뇨! 저도 이제 다 컸다고요! 그런데 렉스가 누구예요? 저는 그런 사람 모르는데?"
나는 우리를 보자마자 속사포같이 말을 쏟아내고 있는 폴을 잠시 진정시키고 사정을 설명했다.
"어. 조금이라도 이목을 덜 끌려고 평범한 이름을 쓰기로 했어. 이제부터 나는 렉스라고 부르고 이쪽은 샤넬, 아니다. 샤넌이라고 불러."
최수영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샤넌? 나는 왜 샤넌이야?"
"샤넬은 이미 너무 유명인이라 안 돼. 그냥 비슷한 거 해."
"뭐, 샤넌도 나름대로 느낌 있네. 오빠가 지었어?"
"필라르가 네 이름 잘 기억 안 난다며 내뱉던 이름 중에 하나야."
"필라르, 세르히오. 엄청나게 밝은 친구들이었어. 잠깐밖에 못 만났지만 벌써 보고 싶네."
에릭이 최수영에게 물었다.
"그럼 몬테넬의 활쏘기 대회에서 이름을 날렸다는 그 남반구 궁사가 샤넌이에요?"
"하하핫. 응, 나야. 몬테넬에선 활쏘기 대회 여신으로 통했지. 아! 얘들아, 이건 비밀이야. 렉스가 나 이제 조용히 지내라고 했거든."
그때 레온이 조심스레 물었다.
"수호, 혹시 그 이름. 알렉스에서 그냥 알만 뺀 거예요?"
"어? 응. 하하하. 갑자기 용병 코스프레를 하려니 딱히 생각나는 이름이 없어서."
그땐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렉스'는 라틴어로 '왕'을 뜻하는 말이었다.
"렉스, 그럼 이제 언제 떠날 거예요?"
"바로 떠나야지. 이제 배 타고 마리노 왕국으로 가는 거지? 에릭, 네가 가서 우리 떠난다고 얘기하고 와."
"안 그래도 렉스 오면 바로 떠날 거라고 말해 뒀어요. 왕자님이 항구까지 타고 가라고 마차도 빌려주셨는걸요."
"마차?"
"네. 짐 챙기는 대로 바로 출발하면 될 것 같아요. 그럼 항구가 있는 마을까지 오늘 저녁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배는 내일 타야겠지만."
에릭은 우리가 바로 출발할 수 있게 이미 준비를 다 마쳐둔 상태였다.
왕자를 지켜주자는 자신의 부탁 때문에 일정이 늦어진 게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고마워, 에릭. 그럼 바로 갈까?"
밖으로 나오자 흰 말 두 마리가 끄는 화려한 마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를 본 폴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우리 이걸 타고 가는 거예요? 우와……, 여태껏 감자 수레나 타본 게 전부인데. 이런 멋진 마차를 타보다니."
* * *
"오늘따라 감자 수레 하나 안 지나가는군."
라트니아 왕궁 동쪽, 왕궁과 동부 항구 도시 사이 어디쯤.
제법 으슥한 길목에 십여 명의 도적단이 매복해 있었다.
"오늘도 허탕 쳤다간 지부장님이 우릴 죽이려고 들 텐데."
"근데 뭐 개미 새끼 하나 안 지나가는 걸 우리보고 어쩌라고? 수도와 항구 사이 여기가 좋은 자리라고 매복을 지시한 건 지부장님이잖아?"
"언제는 그런 게 중요했어? 지부장님에겐 오직 결과가 중요할 뿐이야."
"어! 잠깐! 저기 뭐가 온다."
"오, 보인다. 제법 크고 화려한 마차인데? 왕건이야, 왕건이! 저 말 두 마리만 해도 얼마야?"
"오늘은 두들겨 맞지 않아도 되겠군. 게다가 저 정도 마차면 돈이 될 만한 것들도 많이 실려 있을 거야. 알아서 좀 따로 챙기자고."
"그랬다가 또 걸리면 어쩌려고?"
"조용! 가까이 온다. 뒤에 다른 병력이나 용병이 없는지 잘 살펴봐!"
"아무것도 없이 저 마차 하나인데?"
"좋아. 흐흐흐. 오늘 우리 독수리 발톱 동부지부 회식이구나! 자, 가자!"
화려한 흰색 마차 주변에 별다른 호위 병력이 없음을 확인한 도적단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마차 앞으로 달려들었다.
가장 앞에 선 도적단 독수리 발톱 동부지부 부지부장 이케르는 거대한 도를 마차 쪽으로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우리는 독수리 발톱 도적단의 일원이다! 항구에 가는 모양인데 순순히 가진 것을 모두 내놓는다면 멀쩡한 두 다리로 항구까지 걸어갈 수는 있게 해주겠다!"
호기롭게 소리치는 이케르의 입가에는 감출 수 없는 미소가 맴돌고 있었다.
오늘도 온종일 매복만 하다가 허탕 치고 지부장에게 두들겨 맞는 날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웬 복덩이가 호위 병력도 없이 굴러들어왔다.
기쁜 마음에 한없이 자비로워진 이케르는 마차 안의 사람들이 가진 것을 다 내놓기만 한다면 정말 두 다리 멀쩡히 보내줄 생각이었다.
어제 지부장이 하사한 꽤 마음에 드는 왼팔 갑주를 아직도 시험해 보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뭐 언젠가는 멋지게 쓰일 날이 있을 테니 상관없었다.
그때 마차의 문이 열리며 이제 갓 성인이 되었을 법한 금발의 청년 하나가 밖으로 나왔다.
"사막도 아니고 이제는 왕국 안에서도 도적단이 설쳐대는 것이냐?"
"좋은 길목마다 이미 자리 잡은 놈들이 있어서 말이지. 자, 나머지 놈들도 어서 다 마차에서 내리거라!"
이케르의 외침에 겁을 먹은 것인지 마차에서는 네 명의 사람들이 마저 쭈뼛쭈뼛 내렸다.
비쩍 마른 남반구인 둘, 이제 갓 성인이 되었을 법한 애송이 둘, 어린놈 하나.
"자, 이제 돈 될 만한 것은 다 마차에 넣고 여길 떠나라. 내가 오늘 기분이 좋아 그냥 보내주는 것이다."
그때였다.
남반구인 둘이 무언가 속닥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이케르의 목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크헉!"
순식간의 일이었다.
목에 느껴지는 통증과 함께 이케르는 자신의 발이 공중에 뜨는 것이 느껴졌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시간에 코앞까지 다가온 남반구인 사내가 한 손으로 목을 잡고 들어 올린 것이다.
"크, 크헉! 놔라!"
"너 그 수트 어디서 났냐?"
"수트? 그게 무슨 말이냐!"
"왼팔에 끼고 있는 이 전투 수트 말이야."
남반구인은 이케르가 왼팔에 끼고 있던 갑주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가죽끈으로 조잡하게 왼팔에 고정해 두었던 갑주는 사내의 힘에 그대로 뜯어져 나갔다.
그때 이케르의 오른쪽에 있던 도적 한 명이 커다란 메이스를 남반구인에게 휘둘렀다.
'그래! 이놈의 허리를 당장 짓이겨버려!'
서걱.
"으아악!"
'이건 허리가 짓이겨지는 소리가 아닌데?'
고개를 돌린 이케르의 눈에 팔이 잘린 채 비명을 지르고 있는 부하의 모습이 들어왔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어디서 났냐니까?"
"이… 이건 오다가 주웠다!"
짜악.
이케르의 왼쪽 뺨에 강한 충격이 몰아쳤다.
"다시 묻는다. 이거 어디서 났냐?"
"이, 미친놈! 얘들아! 당장 이놈을 쳐! 뭐 하는 거냐!"
하지만 이케르의 부하들은 움찔움찔 망설일 뿐 쉽사리 남반구인 사내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짜악.
"어디서 났어."
이케르의 입 안에서 뭔가 굴러다니는 것이 느껴졌다.
어금니였다.
"으, 으어. 이거 우리 지부자이. 지부자이 줘써."
"지부장?"
"어. 외팔 오은팔 하나씨 이써는데 지부자이 나 외팔 줘써."
"한쪽 팔씩 나눠 가졌다고? 나머지 파츠는?"
"모, 모라."
"어딨어, 그 지부장."
"마, 말 모태."
짜악.
"크헉!"
세 번째 따귀를 끝으로 이케르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5월 25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17,480개]
[단가 49억 원]
[평가 금액 85조 6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