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 시엠브레 제국 】
"단장님, 저희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정말 따로 챙긴 것이 없단 말이냐? 네놈들이?"
"그렇습니다."
데릭의 표정이 구겨지는 것을 확인한 도적들은 얼른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강철로 된 얼굴도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는데 데릭이 그 얼굴로 인상을 쓸 때면 도적들은 오금이 저리는 것을 느껴야 했다.
"내가 네놈들이 항상 현장에서 따로 돈을 챙기고 있다는 걸 몰랐을 것으로 생각하는 거냐?
"저, 정말 아닙니다!"
"기껏 매번 알면서도 눈감아줬더니만 이제는 네놈들 배포가 커져도 너무 커졌구나! 어서 바른대로 말하지 못해!"
단장 데릭이 앉아 있던 의자의 팔걸이를 쾅 내려치자 돌로 만든 팔걸이가 그대로 박살이 나버렸다.
엎드려있는 네 명의 도적 중 하나가 겁을 먹었는지 우물쭈물하며 제 동료들의 눈치를 보았다.
데릭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우르, 네가 얘기해 봐라."
"그… 죄송합니다! 단장님! 여기 베른 이 녀석이 슬쩍 하자고 하는 바람에!"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불린 베른이 깜짝 놀라 외쳤다.
"무슨 소리야? 너도 같이 챙기자고 했잖아!"
"네가 먼저 챙기자고 한 건 맞잖아!"
"그만!"
데릭의 일갈에 잠시 흥분했던 도적들이 다시 엎드렸다.
"아무리 우리가 도적단이지만 어느 정도 선은 지켜야 할 것 아니냐! 감당도 못 할 걸 챙겨서 뭘 어쩌려고 했던 것이야! 그걸 다 챙겨 따로 도적단이라도 차리려고 한 것이냐?"
"아, 아닙니다! 저희는 그저 비상금을 조금 챙겨 둘 요량으로……."
"그 많은 금화를 비상금으로 챙겨? 마지막 기회다. 우르! 네 놈이 먼저 실토했으니 가서 금화가 든 배낭을 가져와라."
"배낭이요? 저희는 작은 주머니 하나를 슬쩍 한 것밖에 없습니다."
"배낭이든 주머니든 가서 일단 가져와 봐!"
"네! 단장님!"
잠시 후 우르가 제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주머니를 들고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여기 있습니다!"
데릭의 미간이 다시 구겨졌다.
"아직도 나를 속이려고 해?"
겁에 질린 우르가 얼른 다시 엎드리며 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정말 이게 다입니다!"
"정말입니다!"
나머지 녀석들도 연신 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소리쳤다.
'…이 겁많은 녀석들이 이렇게까지 나를 속일 리는 없는데? 그렇다면!'
순간 데릭이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이 남반구인 놈이 수작을 부렸구나! 당장 감옥으로 돌아가자!"
"그럴 필요 없다."
단장실의 커다란 돌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걸어들어왔다.
가늘고 긴 검은색 검을 든 남반구인이었다.
그 뒤로 그의 동료들도 하나둘 따라 들어오기 시작했다.
* * *
단장실에 들어서자 불사인이 도적 몇 명을 추궁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닥엔 에릭의 돈주머니가 떨어져 있었다.
그럼 그렇지.
이렇게 얕은수에 넘어가는 걸 보면 서로에 대한 믿음이 어지간히 없는 모양이다.
"아니, 어떻게?"
"어떻게 나왔냐고? 그 마법이 걸려 있다던 족쇄, 그냥 힘을 좀 주니 부서지던데?"
단장실 안에 있던 도적들이 모두 우리 쪽을 향하며 무기를 빼 들었다.
"이젠 너희들 목숨값을 흥정해 볼까?"
"흥정 같은 소리! 다들 뭐 하고 있는 거냐! 쳐라!"
"너희 도적단 놈들은 하나같이 참 진부하네."
스윽.
빠르지도 힘이 들어가지도 않은 단순한 동작.
마그네타 검이 부채꼴 모양의 호를 그렸다.
검이 그린 작은 부채는 순식간에 검은 물결이 되어 단장실 안에 퍼져 나갔다.
"크헉!"
무기를 들고 있던 도적들의 목이 모두 떨어져 나감과 동시에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던 불사인은 그대로 허리가 두 동강 났다.
"이, 이게 무슨……!"
"오늘부로 너희 닭발 도적단은 해체야. 해체라고 하기도 뭐한가? 다 죽을 테니까."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라! 뭐든! 흥정하자!"
"없어."
"그, 그 갑옷! 그걸 찾고 있지 않았나?"
나는 턱으로 불사인의 뒤편을 가리켰다.
"저 뒤에 걸려 있는 거?"
그때 철제 갑옷이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몇 명의 도적이 다급히 단주실로 들어왔다.
그중 한 놈은 슈퍼 솔저 수트의 하체 파츠를 착용하고 있었다.
서부지부 지부장인 모양이다.
"저기 다리 파츠도 알아서 왔네?"
내 말에 뒤를 돌아본 최수영이 놈들의 미간에 화살을 하나씩 꽂아 넣었다.
"크윽!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냐! 나랑 무슨 악연이 있어서! 도대체 왜!"
"말했잖아. 너와 네 도적단은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고."
"가만두지 않겠다!"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놈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재생 마법을 써 줄 사람이 없으면 넌 곧 죽겠지? 어떻게 할까. 고통을 줄여줄까, 이대로 두고 갈까."
"이 미친 자식!"
나는 천천히 걸어가 놈의 뒤편에 걸려있던 슈퍼 솔저 수트를 집어 들었다.
이로써 수트 하나를 완전히 되찾았다.
"가기 전에 고통을 줄여줄게."
서걱.
단칼에 놈의 목을 베어버린 나는 일행들과 함께 도적단 소굴을 빠져나왔다.
불타고 있는 놈들의 주둔지에서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 폴이 내 앞으로 다가와 뒤로 걸으며 말했다.
"렉스, 연기 정말 끝내주던데요?"
"너, 기절해 있지 않았어?"
"약 기운 때문에 몸을 가누긴 힘들었지만 소리는 다 들렸죠. 진짜 나를 구하기 위해 뭐든지 내줄 것 같은 목소리라 감동할 뻔했어요."
"급하니까 되더라고. 안 그러면 네 목이 날아갈 것 같았으니까."
"히익. 나 진짜 죽을 뻔한 건가?"
"살았으니 됐잖아."
나는 손을 뻗어 폴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은 후 고개를 돌려 에릭에게 물었다.
"에릭, 이제 마리노 왕국으로 가는 배를 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해?"
"이 돌산을 우선 넘고, 동남쪽으로 길을 따라 내려가면 돼요."
아직도 뒤로 걷고 있던 폴이 두 팔을 활짝 펼치며 다시 뒤돌았다.
"아, 내가 도적단을 소탕하다니. 이제 키르칸에 가면 영웅 대접받는 건가?"
"넌 한 게 별로 없잖아?"
"무슨 소리야 레온! 다 같이 한 거지. 그쵸 렉스?"
"어, 그래. 그렇다고 치자."
"빨리 가서 매튜 남작님께 자랑하고 싶다!"
"너 키르칸 돌아가기 싫다며?"
"아! 그렇긴 한데……. 또 돌아가고 싶기도 하고 뭐 그래요. 하하하."
폴의 잔망스러운 말과 행동에 오랜만에 일행들 모두 얼굴에 미소를 품었다.
* * *
이틀을 노숙하며 이동한 끝에 우리는 라트니아 동쪽 항구 도시에 도착했다.
"오빠, 배가 제법 큰데?"
"그러게. 생각보다 크고 화려하네."
최수영과 나는 예상외의 배 크기에 놀랐지만, 우린 놀란 거라고 볼 수도 없었다.
"우와! 와! 진짜 이게 물에 뜬다고? 레온! 이게 진짜 배야? 이렇게 크다니! 레온은 이런 배 본 적 있어? 키르칸 북쪽 언덕보다도 더 큰데? 우리 마을 사람들 전부 탈 수도 있겠어!"
폴은 두 팔을 벌리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큰 배를 처음 본 소감을 떠들어댔다.
폴이 조금 진정됐을 때쯤 승선권을 사러 갔던 에릭이 돌아왔다.
"승선권 겨우 구했어요. 원래 가격보다 다섯 배나 비싼데도 다들 못 사서 난리예요."
"그래? 전쟁 소문 때문에 그런가?"
"맞아요, 렉스. 라트니아 왕국의 돈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은 모두 마리노 왕국이나 시엠브레 제국으로 떠날 모양이에요."
"그런 와중에 승선권은 용케 잘 구해 왔네?"
"왕자님 이름을 좀 팔았죠, 뭐. 허락을 받은 건 아니지만 이 정도는 이해해 주실 거예요. 어서 가요. 배 타려면 바로 가야 해요."
그때 내 앞 공간이 잠시 일그러지며 녹색 상자 하나가 생겨났다.
벌써 한 달이 지났나.
"오빠, 랜덤박스네?"
"응. 여기 와서 벌써 두 번째 랜덤박스야."
"이번엔 뭐가 들었을까?"
"열어봐야 알겠지? 노숙하기 지겨워 죽겠는데 원터치 텐트 같은 거나 하나 나오면 좋겠다. 냉난방 완비."
"오, 대박. 완전 필요."
"애옹."
"수영아, 기억나? 우리 브런치 카페에서 세 번째 박스 열었을 때 꽝이가 쫓아왔던 거."
"응. 회사에 두고 왔는데 갑자기 나타났잖아."
"랜덤박스 열 때마다 꽝이가 관심이 많더라고. 지금도 빤히 보고 있는 거 봐봐."
꽝이가 빨리 열어보라는 듯 발톱을 살짝 세운 앞발로 내 오른팔을 끌어 랜덤박스 위에 올려놓았다.
"어머? 꽝이가 빨리 열라고 하네? 하하핫."
"이런다니까. 하하. 열어볼까?"
이번에도 상자 바깥에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상자 수령 위치가 변경되어 해당 위치에 맞는 랜덤 상품으로 교체됩니다.]
비교적 사람이 적은 곳으로 가 상자를 열어보았다.
"이게 뭐야? 물병이잖아?"
상자에서 물병을 꺼내 보자 안에는 신비로운 색의 액체가 들어 있었다.
반투명한 액체는 어떻게 보면 따뜻한 붉은 계열의 색으로 보이고 또 어떻게 보면 차가운 푸른 빛을 띤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뭘까? 마시는 걸까? 설명서 읽어봐, 오빠."
나는 설명서를 꺼내 최수영이 들을 수 있도록 낮게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정령의 축복 물약. 정령의 축복이 가득 담긴 물입니다. 구매자의 마나 친화력을 대폭 상승시켜 줍니다……."
"네에?"
갑자기 레온이 큰 소리를 내며 내 옆으로 찰싹 달라붙었다.
"마나 친화력을 상승시켜 준다고요? 그런 게 가능해요?"
[상품명 : 정령의 축복 물약]
[정령의 축복이 가득 담긴 물입니다.]
[구매자의 마나 친화력을 대폭 상승시켜 줍니다.]
[물병 안의 물을 지금 마셔보세요!]
[구매자 외에는 이 물을 마셔도 효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물을 마시라는데? 그런데 레온, 마나 친화력이 뭔데 그래?"
"그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거예요. 마나 친화력이 없는 체질이면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이 마나를 전혀 느낄 수도, 활용할 수도 없어요."
"마나 친화력이 높아야 마법을 잘 쓸 수 있는 거야?"
"물론이죠! 하지만 이건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넌 그 친화력이 얼마나 되는데?"
"그… 저도 잘 몰라요. 어렸을 때부터 어렴풋이 내가 마나를 느낄 수 있다고 느껴졌어요. 다른 마을 사람들은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더군요. 그래서 혼자 마법을 공부하기 시작한 거고요."
"레온, 너처럼 열심히 공부만 한다고 다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아니었구나?"
"당연하죠! 책에서 본 바로는 정령의 축복을 받아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체질을 가진 인간은 열 명 중 한 명도 안 된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체질을 타고났다고 해도 마나 친화력은 천차만별이고요."
"타고 난 데다 너처럼 공부도 열심히 해야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거였구나. 뭐 인제 와서 마법을 공부할 생각은 없지만 일단 마셔봐야겠지."
나는 물병에 든 신비한 빛의 액체를 죽 들이켰다.
액체를 마시는 내내 레온이 간절하고 아쉬운 눈으로 액체가 줄어드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미안, 레온. 다른 사람은 마셔도 소용없대."
"아… 네. 어차피 렉스 거잖아요. 얻어 마실 생각은 없었어요."
"근데 아무 느낌도 없는데? 목 넘김이 꽤 상쾌했던 것 말고는."
"뭐야. 오빠, 뭐 달라진 거 없어? 막 대자연의 기가 느껴지고 그러지 않아?"
"응. 잘 모르겠는데?"
"렉스, 우리 일단 배에 타야 해요. 늦었어요."
에릭의 재촉에 우리는 승선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바닷가여서 그런지 시원한 바람이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바닷가라고 바람이 시원하네."
"응? 오빠 무슨 소리야. 습하고 덥기만 한데."
그저 바람처럼 느껴졌던 그것이 마나의 흐름임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었다.
* * *
6월 8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21,490개]
[단가 50억 원]
[평가 금액 107조 4천억 원]
김수호 랜덤박스 아이템 현황 (5/6)
[1회차 : 마술사의 염동력 장갑]
[2회차 : 예민보스 고양이]
[3회차 : 피로회복제 엔캡슐]
[4회차 : 정령의 마법 주머니]
[5회차 : 정령의 축복 물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