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 * *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두 시간 정도를 항해하자 마리노 왕국의 항구 도시가 보이기 시작했다.
"에릭, 저기가 마리노 왕국인가 보구나?"
"저도 가본 적은 없지만 맞을 거예요. 거대한 섬 하나가 마리노 왕국으로 이루어져 있죠."
"라트니아나 몬테넬과는 또 다른 분위기네. 화려하진 않지만 뭔가 여유로워 보이는 도시야."
"섬으로 되어 있어서 다른 나라의 간섭을 적게 받는 나라니까요. 황량한 건 매한가지지만 가장 평화로운 나라라고 할까요. 섬이라 비교적 해상자원도 풍부하고요."
"그렇구나. 그럼 빌데르로 가기 위한 배를 타려면 또 얼마나 가야 해?"
"마리노 왕국 동쪽 끝까지 가야 하니까 지금처럼 걸어가려면 몇 주는 걸리겠죠?"
그렇군.
테라 행성에 온 지 벌써 한 달 하고도 보름이 다 되어간다.
오는 길에 슈퍼 솔저 수트를 찾긴 했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 예상보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항구 도시답게 제법 많은 여관과 식당들이 보였다.
나는 물고기 그림이 그려진 나무판이 걸려있는 제법 괜찮아 보이는 식당으로 일행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오느라 고생했으니까 일단 밥부터 먹자."
"오예! 해산물 식당!"
가격이 꽤 비쌌지만 다섯 명이 충분히 먹을 양의 해산물 요리를 시켜서 일행들과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크, 내가 널 또 만나다니. 반갑다, 새우야."
폴이 새우 머리를 뜯어 양손으로 들고 쪽쪽 빨아먹기 시작했다.
"음? 이건 전에 불에 구워 먹었던 거랑 또 맛이 달라요. 뭐지? 낙타젖에 끓인 건가? 엄청나게 고소해요!"
새우와 크림소스의 조화라니.
이곳 마리노 왕국은 제법 요리에 진심인 사람들이 사는 나라인 것 같았다.
그때 생선요리를 한 입 베어 문 에릭도 깜짝 놀라며 외쳤다.
"이 생선은 겉이 바삭해요! 어떻게 된 거지? 속은 생선 살 맞는데? 게다가 옆에 있는 이 감자도 정말 바삭해요!"
피쉬앤칩스?
이 식당 정말 제법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식사하다가 나는 본격적으로 할 말을 꺼냈다.
"에릭이 말한 대로 여긴 평화로운 왕국이고, 숲이나 사막을 지날 필요도 없이 왕국 안의 대로를 따라 동쪽으로만 가면 되니까 너희는 이제 키르칸으로 돌아가. 여기서 헤어지자."
세 개째 새우 머리를 빨아먹던 폴이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날 바라봤다.
"아니, 왜요? 갑자기 왜 여기서 헤어져요? 동부 항구까지는 같이 가요!"
"나도 너희랑 같이 더 여행하고 싶은데, 우리가 너무 늦어서 그래. 여기부터는 밤에 뛰어서 가려고 하거든. 폴 알지? 형 뛰면 어떻게 되는지."
"그, 그래도……."
"나도 아쉬워. 하지만 여기서 또 몇 주씩 걸어서 동부 항구까지 갈 순 없어."
"그럼 샤넌을 업고 뛰어가겠다는 거예요?"
"샤넌도 꽤 빨라. 같이 뛰어야지."
최수영이 갑자기 팔짱을 끼며 웃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 왜, 나도 업어줘. 응? 예전에 폴 업고 엄청 뛰었다며. 나도 업어줘."
"그땐 몬스터가 쫓아오니까 그랬지!"
"그래서, 업어주기 싫어?"
레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샤넌."
"응? 레온, 왜?"
"그… 렉스 등엔 제가 업혀야 할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저, 키르칸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렉스한텐 이미 말했어요."
폴과 에릭이 깜짝 놀라 레온을 바라보았다.
"뭐? 돌아가지 않아?"
"응. 나 더 이상 키르칸에서 공붓벌레처럼 살고 싶지 않아. 더 큰 세상에서 마법을 배우고 연마할 거야."
"그래서? 지금 렉스와 샤넌을 따라가겠다는 거야?"
"응. 일단은. 그리고 렉스와 샤넌이 할 일을 마치고 떠나고 나면 혼자 여행하며 마법을 연마하다가 내년에 라트니아 왕국의 마법 경진 대회에 참가할 거야."
"뭐야, 애초에 그럴 계획으로 이 동행대에 자원한 거였어?"
"그런 계획도 없었고 애초에 동행대에 자원한 적도 없어. 남작님이 추천해 주셔서 포함된 것뿐이야."
"그런데 왜?"
"렉스와 다니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 키르칸에서 남작님이 구해다 주시는 마법책만 읽고 있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폴과 레온의 대화를 듣던 에릭이 턱을 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님은 라트니아에 가실 때마다 새로 나온 마법 서적이 없는지 물어보고 다니셨었지. 레온 너 가져다주시려고."
"응, 알아. 남작님껜 항상 감사한 마음뿐이야. 하지만 이제는 나도 세상으로 나갈 때가 된 것 같아."
에릭이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주먹으로 자기 손바닥을 탁 내리쳤다.
"내 생각엔, 아무래도 이러라고 남작님께서 널 렉스와 동행하게 만드신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에릭."
대화를 듣고 있던 폴이 떼를 쓰기 시작했다.
"뭐야! 나도! 그럼 나도 여행자 할 거야! 나도 같이 가요, 렉스!"
"폴, 너희 부모님에게 널 무사히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어."
"왜 레온은 데리고 가고 나는 돌려보내는데요! 내가 쓸모없어서예요?"
"급발진하지 마, 폴. 형이 얘기해 줄 게 있어."
"쳇. 뭔데요?"
"라트니아는 마법. 몬테넬은 활. 시엠브레는 연금술. 세바니아는 격투술. 에르갈은 학문."
"갑자기 그게 왜요?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그럼 검술은 어디일까?"
"검술? 그건……."
"키르칸 왕국."
폴은 물론이고 에릭과 레온까지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에릭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키르칸 왕국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입에 올려선 안 돼요, 렉스. 시엠브레 제국에 의해 금지어로 정해진 단어라고요."
"나도 알아. 그런데 난 북반구 사람도 아닌데 뭘. 그리고 실제로 없었던 왕국도 아니잖아."
나는 폴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잘 들어, 폴. 키르칸은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마을이 아니야. 이 행성에서 검술로 가장 유명했던, 그리고 가장 부강했던 왕국이라고."
"……."
"에릭, 폴. 너희들은 돌아가서 매튜 남작님을 도와 다시 키르칸을 일으켜 세워. 마침 숲의 몬스터도 거의 사라졌잖아? 내다 팔 수 있는 몬스터 가죽도 잔뜩 있고. 너희 둘이 바로 키르칸의 미래야."
"가장 부강했던 왕국……."
폴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알았지? 그게 너희 둘의 사명이야."
에릭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한참 동안 먼 산을 바라보았다.
폴은 한동안 상기된 얼굴로 주먹을 꽉 쥐고 무언갈 다짐하는 듯싶더니 잠시 후 다시 새우 머리를 집어 들었다.
에릭과 폴이 결심을 굳힌 것으로 보여, 식당 주인을 불렀다.
"여기 서주 다섯 잔 주세요!"
"렉스? 지금 대낮이에요."
"뭐 어때. 한국에선, 아니 남반구에선 헤어질 때 이렇게 하는 거야."
폴이 손가락을 펼쳐 잠깐 숫자를 세는 것 같더니 나에게 물었다.
"다섯 잔? 렉스, 저도 주는 거예요?"
"아니, 내가 두 잔."
해가 저물 때까지 식당에서 웃고 떠들며 함께 시간을 보낸 후 폴과 에릭에겐 여관을 잡아주고 나와 최수영과 레온은 밤길을 나섰다.
"이제 길에 사람이 거의 없네. 레온, 업혀."
"미안해요, 렉스. 제가 느려서."
"아니야, 괜찮아. 어차피 샤넌 속도에 맞출 거라 나는 하나도 안 힘들어."
"뭐야? 날 무시했다 이거지? 좋아, 어디 한번 달려보자고."
"그래. 하하하. 달려보자."
* * *
"아휴, 밤낮이 바뀌었더니 피부 푸석해진 것 봐. 오빠, 나 얼굴 괜찮아? 엉망이지."
"아니야, 예뻐."
"성의 없는데?"
"음, 며칠째 밤낮이 바뀐 데다가 매일 밤바람을 맞고 달려서 피부가 조금 까칠해지긴 했지만, 그 까칠함도 너의 예쁜 두 눈과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리진 못하네."
"합격."
"그럼 내 얼굴은 어때, 수영아?"
"오빤 지금 완전 거지꼴이 따로 없어."
"…합격."
그때 레온이 언덕 너머를 가리켰다.
"렉스, 저 앞에 바다가 보여요!"
"응? 그러네. 이제 거의 다 왔나 보다. 조금만 더 가면 항구 도시가 나오겠네."
"드디어 오늘 시엠브레로 가게 되겠네요?"
"응. 오래도 걸렸다. 저 항구 도시에 가서 배 먼저 알아본 다음 좀 씻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하자."
"오, 샤워! 나 오늘은 얼굴에 수분세럼이랑 영양크림도 좀 발라야겠어. 너무 오랫동안 방치했어."
"화장품도 가지고 왔어?"
"가지고 왔지. 어떻게 될지 몰라 아껴 쓰고 있지. 오빠도 발라줄게. 피부가 이게 뭐야."
"아니야, 너 아껴 써. 난 괜찮아."
"오빠도 발라. 이런 거지꼴을 한 남친 손잡고 지구에 돌아가고 싶진 않아."
지구 얘기가 나오자 레온이 물었다.
"렉스, 샤넌. 그 지구라는 곳은 정말 그렇게 물도 많고 숲도 많나요?"
"응. 그렇다니까. 저 멀리 우주에서 보면 말이야, 여기 테라랑은 때깔부터 달라. 푸르고 영롱하지."
이곳까지 오면서 낮에 쉴 때 레온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조금 들려주었다.
왜 시엠브레에 가고 있는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레온은 지구에 사막보다 바다가 많다는 이야기와 마법사가 없다는 이야기를 가장 흥미로워했다.
"그런데 왜 지구에선 마법을 연구하지 않죠? 자원이 풍부해서 그런가? 아! 그래서 지구의 정령은 인간에게 마법을 가르쳐주지 않았구나."
"그런 것보단 지구엔 과학이나 공학이 더 먼저 발달했기 때문이야. 여기가 지구였으면 마법 같은 것 없이도 키르칸에서 시엠브레까지 몇 시간이면 날아갈 수 있었다고."
"사람을 수백 명씩 태우고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그 비행기라는 걸로요? 그런데 정말 지구엔 마법사가 한 명도 없어요? 정령도 없었고?"
"응. 나는 못 봤어. 마법사는 없고 마술사라는 직업은 있지. 그런데 그건 그냥 눈속임……."
나와 최수영은 동시에 놀란 눈을 마주쳤다.
"오빠!"
"너도 그 생각했어?"
"우리 이은걸 마술 공연 보고 도저히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잖아."
"그랬지. 어? 설마?"
"응. 그 사람 진짜 마법사가 아닐까?"
"그럼 최연우도?"
레온이 끼어들었다.
"뭐예요? 지구에도 마법사가 있어요?"
"잘 모르겠는데, 어쩌면 있는 것 같기도 해."
"저도 언젠간 가보고 싶어요. 그 지구란 곳."
"나중에 대마법사가 되고 나면 놀러 와."
"헤헤. 정말 그렇게 되면 좋겠어요."
* * *
시엠브레 제국 마법사의 탑.
"대마법사님, 후지로입니다."
"들어오게."
대마법사 사무엘과 기사단장 가엘이 차를 마시고 있는 응접실로 쿠라타니 후지로가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대마법사님. 안녕하십니까, 기사단장님."
"몬테넬에 가고 싶다고 했다지?"
후지로가 불사인이 된 것이 아직도 썩 내키지 않았던 가엘은 인사도 받아 주지 않고 대뜸 질문부터 했다.
"네, 그렇습니다."
"이유는?"
"지구의 정보를 드리는 것 외에도 이제 시엠브레 제국의 일원으로서 공을 세우고 싶습니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고?"
"여전히 저를 못마땅하게 여기시는군요."
"불사인이 되기 위해 제국의 수많은 검사와 마법사들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아는가?"
"제가 그들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네놈 하나 늘었다고 자리가 줄어든 건 아니지만 너 때문에 그들의 노력이 우스워져 버렸다."
"하하. 그만하시게, 기사단장. 후지로를 불사인으로 만든 건 내 결정 아닌가? 꼭 내가 꾸지람을 듣고 있는 기분이군."
"아, 아닙니다. 대마법사님. 저는 그저……."
"기사단장의 마음도 잘 알고 있네. 나도 저자가 곧 숨이 넘어가려고 하지만 않았으면 이런 선택을 하진 않았을 것이야. 하지만 지금 우리가 후지로에게 얼마나 많은 정보를 얻고 있는지 잘 알고 있잖나. 기사단장이 이해해 주게."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가엘이 다시 매서운 눈매로 후지로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털어놔 보아라. 갑자기 왜 전쟁에 참전하겠다는 것이지?"
"그럼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후지로가 품에서 일반인이나 쓸 법한 작은 단검을 꺼냈다.
키가 4미터가 넘는 불사인 후지로가 들고 있자 작은 장난감처럼 보이는 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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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3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21,490개]
[단가 50억 원]
[평가 금액 107조 4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