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 * *
나는 들고 있던 사람을 멀리 집어 던져 버리고 마그네타 검을 뽑아 들었다.
"여기 있는 사람 모두 한 번에 베어버릴 수도 있어. 물러서. 경고는 한 번뿐이야."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스터 킴!"
"라울?"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크게 붕 점프한 라울이 사람들을 넘어 우리 쪽으로 날아왔다.
"미스터 킴! 수영!"
수영이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라울을 맞이했다.
"꺄악! 라울! 반가워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저도요 수영. 몸은 괜찮아요? 미스터 킴은요? 다들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게이트 건너가 어딘지 알 수가 없어서 여기저기 헤매느라 돌아오는 데 꽤 오래 걸렸네요."
"와우, 어서 강화도로 돌아가요. 회사 직원들이 모두 기뻐할 거예요. 미스터 킴 가족들도 매일매일 기다리고 있어요."
"고마워요, 라울. 그런데 이 사람들은 뭔가요? 지금 다 베어버릴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 이들도 우리 회사 같은 채굴 기업이에요. MB게임즈라고, 원래는 게임 회사였는데 게이트가 생기고 난 직후 디펜서를 대대적으로 모집하고 지원해서 2년 만에 국내 최대 채굴 기업이 되었죠."
MB게임즈라면…….
기억난다.
채굴 초창기 판교로 출동했을 때, 유일하게 강철로 저층부 유리와 출입구를 틀어막아 괴수들로부터 건물을 지켜냈던 회사.
당시에도 회사의 대표나 책임자가 뛰어난 혜안(慧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아예 넥시트코인 채굴 기업이 된 모양이다.
"디펜서란 말은 우리 회사에서 처음 만들었는데, 이제 다 같이 쓰네요?"
"네, 뭐. 헌터라고 하기도 하는데 한국에선 디펜서라는 말이 아직 더 널리 쓰여요. 이게 다 미스터 킴 영향이죠."
"그렇군요. 어쨌든 라울이 말이 더 통할 테니 당장 좀 다 비켜서라고 하세요. 제가 이 검 한 자루 들고 여러 행성을 다니다 보니 먼저 이빨을 드러내는 적은 다 베어버리는 습관이 생겨서요."
라울이 저만치에서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사내를 향해 말했다.
"강호석 팀장. 우리 대표님과 서로 오해가 있었던 모양인데, 우린 강화도로 돌아갈 테니 길을 비키세요."
"갑자기 나타나 우리가 장악한 게이트의 몬스터를 빼앗아 간 것도 모자라 날 공격하다니! 메타디펜스의 대표라고 이대로 넘어갈 줄 아시오?"
강호석 팀장이라는 사람이 검을 치켜들고 날 공격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나는 천천히 검을 들어 그의 어깨 근처를 향해 그었다.
스윽.
"커헉!"
검을 들고 있던 강호석의 팔이 잘려 나갔다.
"미스터 킴!"
라울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천천히 강호석에게 걸어갔다.
"치료비는 넉넉히 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리고 다음부턴 누가 정중하게 인사하면 너도 인사부터 해."
"크흑! 어, 어떻게? 그 거리에서?"
"내가 너무 오랜만에 지구에 와서 지금은 바로 강화도로 가고 싶거든. 아까 뭐 우리 회사에 청구한다는 건 메일로 보내. 읽어는 볼 테니까."
최수영이 내 옆으로 와 물었다.
"이 사람, 고쳐 줄까?"
나는 주변을 한번 슥 둘러보았다.
얼핏 보아도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 디펜서들에, 한쪽에 보이는 지휘 본부와 의무실까지.
"내버려 둬. 알아서 하겠지. 이렇게 큰 회사인데 아마 누가 치료 아이템 정도는 가지고 있을 거야."
"그래. 나도 이 사람 별로 마음에 안 들었어. 하하핫."
나는 가만히 최수영의 손을 잡았다.
"어쨌든 겨우 돌아왔다. 강화도로 가자."
"응!"
최수영이 맞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그렇게 2년 만에 돌아온 지구에서 처음 만난 사람의 팔을 잘라버린 나는 최수영의 손을 잡고 레온, 라울과 함께 강화도로 향했다.
* * *
강화도에 가자마자 가족들을 만난 후, 다음 날 아침 일찍 회사로 향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했음에도 비서실장이 대강당에 전 직원을 모아놓고 환영식을 준비해 주었다.
사회를 맡은 인사팀 직원이 나를 단상 위로 불렀다.
"자, 그럼 이제 대표님을 단상 위로 모시겠습니다. 2년간의 모험 끝에 회사로 돌아오신 대표님을 큰 박수로 맞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짝짝짝짝짝.
나는 천천히 단상 위로 올라가 섰다.
"반갑습니다. 생각보다 외근이 길어져 이제야 인사를 드리게 됐습니다. 그동안 우리 메타디펜스를 잘 지켜주시고 이끌어주신 임직원 여러분께 우선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국을 떠나기 전엔 200명이 조금 안 되는 회사였는데 지금은 400명이 넘는 직원들이 대강당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당 안의 마나의 흐름을 통해 어느 쪽에 앉아 있는 직원들이 디펜서인지 대번에 파악되었다.
떠나기 전 라울에게 부탁했던 대로 디펜서를 대폭 확충하다 보니 직원이 늘어난 모양이다.
"학창 시절부터, 나중에 이런 단상에 오르게 되면 꼭 연설은 짧게 하리라 다짐했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부서별 회의 시간을 통해 나누도록 하죠. 그래도 다 모이셨으니까 간단히 한 말씀만 드리고 내려가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인사팀장과 재무팀장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오늘 바로 전 직원에게 특별 보너스를 지급합니다. 그동안 우리 회사를 잘 이끌어주신 데 대한 보답입니다. 보너스는 직급, 직책, 연봉과 관계없이 모두 동일합니다."
보너스 얘기에 모든 직원이 숨죽이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재무팀장님. 오늘 안으로 회사 전 직원에게 보너스 5억씩 지급하세요."
재무팀장의 얼굴이 사색이 되는 것이 보였다.
이번 보너스 지급을 위해 당장 필요한 예산만 2천억 이상.
"이번 보너스는 제 사비로 지급합니다. 이상입니다."
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조용해진 강당 안에는 여기저기서 헛숨을 들이 삼키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때 정보기술팀 김 과장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표님 감사합니다!"
"와아아아아!"
김 과장의 외침을 시작으로 순식간에 대강당이 떠나갈 듯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메타디펜스 최고!"
"5억! 5억이라니!"
"사랑합니다!"
잠시 후 대표실에서 라울, 이혁진 실장과 함께 첫 번째 회의를 시작했다.
"미스터 킴, 수영은 서울 잘 갔대요?"
"네. 잘 도착했다고 연락받았어요. 이번 주는 쭉 가족들과 시간 보내라고 했어요."
"그 레온이라는 분은요?"
"레온이는 지금 회사 도서관에 가 있어요. 볼 책이 아주 많은가 보더군요."
"한글을 읽을 수 있어요?"
"2년 동안 같이 다니면서 가르쳤죠. 뭐, 워낙 똑똑한 친구라 금방 배웠어요."
나와 라울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혁진 실장이 더는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양손에 펜과 노트를 들고 내 쪽으로 상체를 숙여왔다.
내가 입을 열기만 하면 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단어를 받아 적을 기세였다.
"대표님, 그래서 여섯 개 행성을 다 돌아보고 오신 겁니까?"
"하하. 네. 다 다녀왔죠. 그것도 몇 번씩. 여기서 부르는 이름이 블랙 게이트라고 했죠? 도착하는 행성마다 그 블랙 게이트를 찾아 헤매다가 게이트에 들어가고, 또 새로운 행성에 도착하고.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몰라요. 어제 들어보니 제가 마지막으로 있던 곳을 행성 087이라고 부르는 것 같더라고요."
이혁진 실장이 옆에 있던 노트북을 조작하자 대표실 벽면에 각 행성의 이름과 특징을 정리해 놓은 도표가 띄워졌다.
"저 행성 이름들은 시스템에서 알려준 건가요?"
"네. 게이트가 생긴 이후 시스템의 대대적인 공지가 한 번 더 있었습니다."
"내용은요?"
"여섯 개 행성 간에 블랙 게이트와 화이트 게이트가 쌍을 이뤄 무작위로 생성되고 소멸하게 될 것이다. 블랙 게이트는 크기에 따라 주변 공간을 빨아들이며, 흡수된 것들은 다른 행성에 생성된 화이트 게이트로 나오게 된다. 지구인들은 다른 행성의 생명체를 죽이면 넥시트코인을 채굴할 수 있다. 뭐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공지는 못 들었지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다 알게 된 사실이군요. 확률상으로는 오 분의 일인데, 운이 없었던 건지 지구에 돌아오기까지 블랙 게이트를 수십 번은 통과했어요."
"그 오 분의 일은 매번 독립된 확률이니까요. 아! 그리고 N마켓의 상품들도 많이 추가되었습니다."
"그런 것 같더라고요. 수시로 상품이 늘어나는 건 확인했는데, 얼마 안 가 휴대폰이 자연 방전돼버리면서 그 뒤로는 N마켓에 못 들어갔네요."
"외계 행성에서도 N마켓이 작동합니까?"
"네. 어이없지만 작동하더군요."
이번엔 라울이 물었다.
"그럼 미스터 킴, 그건 샀나요? 내구도 강화 상품?"
"그건 뭔가요?"
"'BUPA(Build Up Physical Ability: 신체 능력 강화) 메뉴'에 '신체 내구도 강화' 상품이 새로 생겼어요."
"내구도 강화요?"
"네. '힘, 체력 강화'와 '운동 신경 강화'와 마찬가지로 처음엔 20NXT이었다가 구매 시마다 가격이 두 배로 올라갑니다."
"그럼 살 때마다 신체 내구도가 두 배로 올라가는 거겠네요?"
"네, 맞아요. 샀나요?"
"아니요.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 무슨 금강불괴인가를 완성했다던 땡중하고 맨손 대결을 했을 때 많은 도움이 됐겠네요."
"맨손 대결이요?"
"네. 처음 만났을 때 다리를 잘라버렸다가 수영이가 다시 붙여줬었는데, 맨손으로 꼭 한번 붙자고 얼마나 따라다니던지……. 결국 한 번 붙었네요."
이혁진 실장이 얼른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몇 단계까지 살까요, 대표님?"
"나머지 두 개는 제가 몇 단계까지 샀었죠? 내구도 그것도 그만큼 사세요."
"8단계까지… 어? 9단계까지 사셨네요?"
"아, 네. 일 년 반쯤 전인가? 그 히드라란 놈 처음 만났을 땐 좀 힘들었었어요. 머리통이 세 개라 어찌나 까다롭던지. 그땐 휴대폰이 꺼지기 전이라 신체 강화 상품을 하나씩 더 샀었죠."
"그럼 '신체 내구도 강화'상품도 9단계까지 살까요? 9단계까지 다 사려면 총 10,220NXT입니다."
"네, 사세요. 코인이야 많은데요 뭘."
테라 행성으로 떠나기 전에 1만 개 정도였던 코인은 지금 7만 개가 훌쩍 넘은 상태였다.
게다가 게이트가 활성화되면서 채굴 회사가 많이 생겨서인지 넥시트 코인의 단가도 그때보다 30% 가까이 올라 있었다.
지금 내 코인은 7만 2천 개, 원화 평가 금액은 447조 원이다.
'신체 내구도 강화' 상품을 9단계까지 올리는 데는 63조 원 정도가 드는 셈이지만, 뭐 크게 부담되는 지출은 아니었다.
최수영도 어서 사라고 해야지.
"구매했습니다!"
"네. 다른 두 상품처럼 구매하자마자 뭐 몸에 변화가 느껴지지는 않네요. 효과는 차차 알게 되겠죠. 이 실장님, 그 채굴 회사들 정보 좀 띄워주세요."
"네. 지금 바로 화면에 띄우겠습니다."
화면에 국내 채굴 기업 리스트가 펼쳐졌다.
10개가 넘는 회사의 이름이 보였고, 위쪽 다섯 개 회사에만 붉은색으로 네모 칸이 쳐져 있었다.
"우리 메타디펜스를 포함해 맨 위 다섯 개 기업만이 B급 이상 게이트에 접근금지 라인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수도권에서는 MB, 대성, 메타디펜스가 활동 중이고 나머지 두 기업은 그 외 지방을 주 무대로 활동 중입니다."
"그 아래 나머지 회사들은요?"
"D, C급 게이트를 맡거나, B급 이상 대형 게이트에서는 외곽 지역에 진을 치고 있다가 접근금지 라인을 벗어난 소형 몬스터를 주로 사냥합니다."
"나름 체계가 잡혀 있군요?"
"이것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첫 일 년은 정말 아비규환이었죠. 갑자기 나타난 블랙 게이트는 사람들을 빨아들이지, 화이트 게이트에서는 처음 보는 몬스터나 적들이 튀어나오지.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몬스터 말고 다른 행성 사람들도 제법 튀어나왔을 텐데요?"
"네. 처음엔 외계인들과도 잘 지내보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들을 받아 주면 받아 줄수록 사회 문제가 커졌습니다. 결국은 그들 대다수가 지구에 적응하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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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0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61,887개]
[단가 62억 원]
[평가 금액 383조 7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