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 * *
두 달 후.
필리핀 세부 시티.
나는 최수영, 레온과 함께 세부 시티에 마련된 마법진으로 이동했다.
마법진에서 나오자 바로 앞에 군복을 입은 관계자가 몇 명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당황한 표정을 애써 감추지 않은 채 물었다.
"세 분… 뿐입니까?"
"네. 지금 중동에 발생한 A급 화이트 게이트 때문에 디펜서 세 개 팀이 모두 그곳에 가 있어서요."
"저희 측 게이트도 지금 계속 확장되고 있는 중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어딘가요? 어서 이동하시죠."
"디펜서들은 더 안 오는 겁니까?"
"네. 중동 쪽 게이트가 행성 055와 연결되어 있어서 큰 위험은 없겠지만 규모가 워낙 커 지금도 애를 먹고 있습니다. 조금 전 디펜서 두 개 팀이 추가로 중동으로 떠났습니다."
행성 055는 큐브가 깨진 후 우리가 처음 이동했던 행성이다.
지구의 먼 과거와 같은 모습을 한 행성으로, 인간은 없고 공룡들이 대륙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
일명 '쥬라기 행성'.
행성 055의 가장 강한 몬스터라 봐야 5등급의 티라노사우루스가 끝이지만, 이번 중동 게이트에서는 워낙 많은 수의 공룡 몬스터가 계속 쏟아져나오고 있어 진압에 애를 먹고 있는 상황이다.
"일단 알겠습니다. 어쨌든 대표님이 여기 오셨으니 걱정 없겠죠. 바로 앞에 헬기를 대기시켜놨습니다."
"게이트는 어디에 생겼나요?"
"마나릴리 스트릿입니다. 콜로네이드라는 대형 슈퍼마켓 바로 위에 게이트가 생겨났습니다."
"다운타운인가요? 근처에 사람이 많겠네요. 빨리 가시죠."
"네!"
우리는 필리핀 당국에서 준비해둔 헬기를 타고 세부의 구도심 중 하나인 마나릴리 스트릿으로 향했다.
현장이 가까워지자 커다란 화이트 게이트가 쇼핑센터 위에서 빙빙 돌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게이트에서는 거대한 몬스터들이 튀어나와 주변을 경계하는 경찰과 가드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하필 저것들이네. 행성… 뭐였지?"
"행성 094요."
"역시 레온이가 똑똑해. 그래, 행성 094. 제일 까다로운 놈들이 나와버렸군."
행성 094는 다양한 몬스터와 마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곳이다.
몇 번을 가서 떠돌아보았지만 갈 때마다 새로운 놈들을 발견할 정도로 그 수와 종류가 압도적이었다.
건너편 블랙 게이트가 늪지대에 생긴 건지 늪에 사는 몬스터들이 화이트 게이트로 튀어나와 시내를 헤집고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해 보이는 놈을 가리키며 레온에게 물었다.
"레온, 저거 6등급이지?"
레온은 지구에 오자마자 게이트에서 튀어나오는 다섯 개 행성의 몬스터나 마물에 대한 자료를 싹 읽고 통째로 암기해버렸다.
"네."
"아휴, 처음 봤을 땐 진짜 징그러워서 싸우기도 싫었는데."
내가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아귀의 머리를 한 생선이 주변 자동차와 건물들을 닥치는 대로 물어뜯고 있었다.
몸길이가 20미터도 넘는 놈의 머리와 꼬리는 물고기 모양이었지만 넓고 커다란 어깨에는 튼튼한 앞다리가 두 개 달려 있었다.
온몸은 단단한 비늘로 덮여 있고, 지느러미가 있어야 할 곳엔 지느러미 모양을 한 뾰족한 뿔이 여러 개 나 있었다.
물갈퀴가 달린 앞발과 널찍한 꼬리로 늪지대를 빠르게 이동하며 수백 개의 이빨이 돋아 있는 거대한 입으로 온종일 사냥하고 돌아다니는 저 몬스터는 행성 094의 늪지대에서 최상위 포식자에 속했다.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면 우선 저놈부터 처리해야겠네. 먼저 간다. 헬리콥터 고도 좀 더 낮아지면 천천히 따라와."
아직 헬기는 높은 상공을 날고 있었지만 나는 그대로 헬기에서 뛰어내렸다.
저 밑에 있는 6등급의 앞발 달린 거대 아귀는 계속해서 몸에서 진액을 뿜어낸다.
나머지 대다수의 늪지대 몬스터들도 마찬가지였다.
화이트 게이트 주변의 땅 여기저기가 이미 놈들의 진액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저기에 발을 대고 싶진 않았다.
나는 공중에서 떨어지는 자세 그대로 마그네타 검에 내력을 주입했다.
마그네타 검에서 발현된 검기는 순식간에 그 길이를 늘려나갔다.
아직 놈과 나의 거리는 수백 미터가 떨어져 있었지만, 마그네타 검에서 뻗어져 나온 검은색의 날카로운 검기는 그대로 몬스터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캬아아악!"
물고기 주제에 괴성을 지르며 괴로워하는 몬스터를 빨리 해치우기 위해 나는 검 끝을 살짝 움직였다.
검 끝은 몇 센티미터가량 미세하게 움직였지만, 수백 미터 떨어진 곳까지 뻗어 있는 검기는 그대로 거대한 몬스터의 몸을 두 개로 갈라버렸다.
그렇게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팔 달린 아귀 몬스터를 해치운 뒤 검을 집어넣고 양손으로 마법구를 만들어내었다.
이제 지상까지는 약 백 미터.
순식간에 열 개의 마법구가 생겨나 동시에 지상으로 쏟아져 내려갔고, 염동력 장갑의 움직임에 따라 마법구들은 지상을 휘저으며 몬스터들의 몸에 들어가 박혔다.
펑! 펑!
야구공만 한 마법구는 몬스터의 몸에 박히고 나면 펑 소리와 함께 몬스터의 몸을 터뜨려버렸다.
땅에 떨어지기 직전 염동력으로 바닥을 밀어 충격을 완화해 보았으나 워낙 높은 곳에서 떨어진 탓인지 땅이 푹 팰 정도의 충격과 함께 지상에 내려섰다.
하지만 신체 내구도를 한껏 올려놓은 덕에 다리가 부러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땅에 내려선 후 왼손으로는 마법구를 만들어 날리고 오른손으로는 검기로 몬스터들을 베어버리기를 반복하고 있자 근처 호텔 옥상에서 최수영의 화살이 쏘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곧이어 레온이 발사한 붉은 빛의 마법 공격도 몬스터들을 하나하나 저격하기 시작했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는 모두 정리가 되었다.
이미 멀리 가버린 몬스터가 몇 마리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정도는 필리핀 군대가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가볍게 점프해 최수영과 레온이 있는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땅에 내려가기 싫어서 여기 이러고들 있는 거야?"
"응, 오빠. 저 찐득한 저건 진짜 밟기 싫어."
"저도 그래요, 형. 헤헤. 수영 누나가 새로 사준 이 하얀 운동화에 저놈들 진액을 묻힐 순 없죠."
운동화 더럽히기 싫다고 깔끔을 떠는 걸 보니 레온도 지구인이 다 되어가는 모양이다.
"레온이! 너 그 운동화 깨끗하게 신어. 리미티드 에디션이야!"
"네, 누나."
우리 셋은 호텔 건물 옥상 외벽에 나란히 앉아 오락실에서 슈팅 게임을 하듯 화이트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을 하나씩 저격해 나갔다.
너무 싱겁게 게이트 방어가 끝났지만, 우리가 오지 않았더라면 이 일대는 아까 그 아귀를 닮은 몬스터에게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다.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6등급 정도의 몬스터나 마물은 육군 1개 중대 이상의 포격이나 공군 전투기 편대의 폭격이 있어야 겨우 처리할 수 있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군이 게이트에 빨리 도착한다 한들 민간인을 모두 대피시키기 전엔 무차별 폭격을 퍼부을 수도 없는 일.
이것이 지금의 세상에 디펜서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다.
그리고 메타디펜스는 지금 전 세계 40개 나라의 200여 개 도시와 계약을 맺고 디펜서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수호 형, 이 게이트는 또 얼마나 지속될까요?"
"모르지 뭐. 어쨌든 C급에서 크기가 더 커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으니 이제는 멍청하게 블랙 게이트 주변을 지나가는 몬스터나 드문드문 튀어나오겠지."
블랙 게이트와 화이트 게이트는 두 행성에 짝을 이뤄 동시에 나타나며, 한번 생성된 게이트는 짧으면 하루, 길면 한 달까지 유지되다가 사라진다.
블랙 게이트는 한 번 생기고 나면 일정 크기가 될 때까지 커지면서 주변 공간을 빨아들이기 때문에, 게이트의 지속 시간보다는 크기가 더 중요했다.
지금 이곳 필리핀 세부 화이트 게이트의 크기는 D, C, B, A, S 중 C급.
그리고 중동에서 아직도 공룡을 계속 뱉어내고 있는 게이트는 A급이다.
"게이트는 C급이지만 6등급 몬스터가 하나 나와버렸으니 오빠가 안 왔으면 여긴 정말 큰일 났었겠네."
"그런가? 저 정도는 수영이랑 레온이도 잡을 수 있잖아. 라울이 포함된 디펜서 1팀이 왔어도 잡을 수 있었을걸?"
"하지만 누구도 헬기에서 뛰어내려 땅에 발도 닿기 전에 저걸 잡진 못했겠지."
몬스터 등급은 2022년 지구에 처음 등장했던 금속 원숭이나 금속 쥐를 기준으로 한다.
기준점이 되는 그 몬스터들이 1등급, 그리고 점점 강한 몬스터들이 나타날 때마다 '지구방위위원회'에서는 높은 등급을 부여했다.
지금 가장 높은 등급은 8등급.
지구에 넘어오면서 내가 잡은 그 머리 셋 달린 드래곤 '히드라'가 8등급 몬스터 중 하나에 해당한다.
"오빠, 우리 이제 돌아가도 되지 않아?"
"그럴까? 사람들도 다 피한 것 같고 군부대 방어선도 거의 생겼네."
"수호 형, 중동 화이트 게이트에는 가 보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필요하면 전략기획실에서 이미 요청했겠지. 아무 말 없는 걸 보면 거기도 거의 정리됐을 거야. 일단 한국으로 돌아가자."
나는 관계자를 통해 지급받은 무전기로 헬리콥터를 호출했다.
* * *
며칠 후, 주말을 맞아 오랜만에 가족들과 여유로운 점심 식사 시간을 가졌다.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식탁을 정리하고 어머니는 과일을 준비하고 있는데 거실에 있던 여동생 성희가 소리쳤다.
"오빠! 엄마! 제이미 팰런 투나잇 쇼 지금 한다! 내가 NBC 연결했어!"
"그래? 어서 가자, 수호야."
어머니는 깎다 만 과일을 쟁반째 들고 거실로 나가셨고, 나도 얼른 싱크대에 넣은 식기들에 물을 받은 후 거실로 향했다.
- 안녕하세요! 오늘은 정말 놀라운 게스트와 함께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청년 사업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 오늘의 게스트를 모십니다! 메타디펜스의 대표! 김! 수! 호!
진행자의 소개가 끝나자 방청객들의 열렬한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카메라는 보통 그래왔듯 게스트가 걸어 나올 무대 뒤편으로 앵글을 옮겼다.
하지만 그곳에선 아무도 걸어 나오지 않았다.
- 세계 40개국의 안전을 동시에 책임져주고 있는 남자를 시시하게 스튜디오 뒷길로 걸어 나오게 할 순 없죠! 다시 소개합니다! 지구에서 가장 핫한 남자! 김수호! 그리고 그의 친구, 마법사 레온!
이번 편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게스트 무대가 빙글 돌며 소파를 뒤로 보냈고, 소파 뒤에 있던 마법진이 앞쪽으로 나왔다.
잠시 후, 마법진에서 화려한 빛이 샘솟으며 나와 레온이 스튜디오에 등장했다.
- 와우, 내 쇼에 순간이동을 해서 나타나는 게스트가 찾아오다니. 은퇴한 전임자 제이가 집에서 벽을 치며 후회하고 있겠군요! 환영합니다! 김수호, 그리고 레온.
무대는 다시 제자리로 반 바퀴 회전했고, 나와 레온은 나란히 진행자 옆 게스트 소파에 앉았다.
진행자는 먼저 레온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 제가 상상하던 마법사의 후드는 좀 더 길고, 거칠고, 칙칙한 느낌이었는데요. 간달프의 후드처럼요. 그런데 레온은 지금 슈프림 후드티를 입고 있네요?
- 네. 저희 행성에선 간달프 같은 옷을 입고 다녔는데, 한국에 오니 그런 빈티지 패션은 유행이 지났다고 하더라고요.
즉흥적인 질문이었음에도 꽤 재치 있게 받아치는 레온.
사실 어느 정도 사전에 협의가 이뤄진 질문과 대답이었다.
- 하하하. 유행에 대단히 민감한 마법사이시군요. 쑤호, 이런 쿨한 마법사를 도대체 어떻게 데리고 돌아온 겁니까?
나는 짐짓 어두운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 이 친구가 살던 행성은 정말 척박한 곳이었거든요. 매일매일을 감자수프만 먹으며 살아가고 있었죠.
- 와우, 그랬군요. 그래서요?
- 소고기를 사준다고 꼬셨죠.
방청석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물론 사전에 협의된 질문과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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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6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62,577개]
[단가 64억 원]
[평가 금액 400조 5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