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 대성 그룹 】
일주일 전, 뉴욕 NBC 방송국.
투나잇 쇼 MC 제이미 팰런이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 갔다.
"소고기를 사준다고 하면 마법사를 꼬셔올 수 있다니요. 와우, 레온, 여기 뉴욕에 끝내주는 스테이크 하우스가 엄청 많거든요. 이참에 나와 함께 일해 보는 건 어때요?"
제이미는 레온 쪽으로 상체를 숙이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물론 시청자에게는 충분히 들릴 만한 전문가의 음량 조절이었다.
"경쟁 프로 '더 레이트 쇼' MC를 한번 초청할 테니까, 아까 그 마법진으로 어디 멀리 날려버려요. 할 수 있죠?"
레온이 깜짝 놀라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죄송해요. 저는 웬만하면 마법을 사람 해치는 데 쓰지 않아요."
이번엔 사전에 협의가 이뤄진 질문이 아니었던지라 레온의 입에서 재치 있는 답변 대신 진심이 흘러나왔다.
"오, 이런. 아쉽군요. 더 레이트 쇼 MC 스티븐을 완전히 보내버릴 수 있었는데 말이죠. 하하하하."
다소 분위기를 딱딱하게 만들 수도 있는 레온의 대답이었지만, 제이미는 능숙하게 분위기를 주도했다.
몇 마디의 실없는 대화들이 더 오고 간 후 제이미는 본격적으로 시청자들이 궁금해할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수호, 이제 그 다섯 개의 행성 이야기 좀 해주시죠. 수호는 그 행성들을 모두 돌아본 게 맞죠?"
"네. 게이트를 수십 번도 더 드나들었으니까요."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행성은 어딘가요?"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이라…….
크게 고민할 것도 없었다. 너무나도 인상 깊었던 행성이 하나 있었으니까.
"지구에선 행성 087이라고 부르죠? 그 히드라나 오르토스 같은 그리스 신화 속 몬스터들이 나오는 곳이요."
"아, 그 행성은 잘 알고 있어요. 머리 셋 달린 드래곤이 지구에 처음 나타났을 땐 정말 끔찍했죠. 수호가 보기에도 그곳의 몬스터들이 가장 강한가요?"
"몬스터가 강하기 때문은 아니고, 그 행성이 가장 인상 깊었던 이유는 따로 있어요."
"오, 그게 뭔가요?"
"천동설 아시죠? 지구는 평평하고 하늘이 돈다는."
"알죠! 하하하. 지금도 미국엔 천동설을 믿는 분들이 꽤 있을걸요?"
제이미가 카메라를 향해 한쪽 눈썹을 위로 올리며 진지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방청객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거기가 그래요. 제가 눈으로 확인했어요."
제이미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푸흡. 네?"
"거기서 만난 신관들과 논쟁을 한참 하다가 너무 황당해서 땅끝까지 직접 가보기로 했는데……."
"그랬는데요?"
"그 행성엔 정말 세상 끝이 있더군요.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이에요. 물이 있는 곳은 끝이 없는 폭포이고요."
제이미의 표정에서 당혹감이 느껴졌다.
"그… 진짜로 평평했단 말입니까? 행성 087이?"
"네."
"그럼 거긴 하늘이 도는 거겠네요?"
"그렇죠."
"하하하. 우리 메타디펜스의 대표님은 정말 유머러스하신 분이셨군요. 직원들이 좋아하겠어요."
그래. 농담으로 들릴 만한 이야기겠지.
하지만.
"유머가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지금껏 어떤 대화에서도 능숙하게 분위기를 주도하던 제이미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 정말이요?"
"뭔들 불가능하겠어요. 도시 한복판에 게이트가 나타나는 세상인데요."
"잠깐만. 그럼 우리가 사는 우주와 법칙이 다르잖아요. 게이트는 우주 먼 곳에 있는 행성으로 이어진 게 아니었나요?"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더라고요."
"전혀 다른 우주라니……. 그것도 평평한 행성이 중심에 있는 우주. 이런 젠장. 믿을 수가 없군요."
"그렇죠? 하하하. 우리가 아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여태까지 누가 물어본 적이 없어서 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이제야 하게 됐네요."
혼란스러워하던 제이미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이 얘기를요? 우리 투나잇 쇼에서 처음으로요?"
"네."
제이미는 과장된 몸짓으로 나와 레온을 가리키며 외쳤다.
"여러분! 수호와 레온입니다! 오늘 투나잇 쇼에서 정말 엄청난 이야기들이 쏟아질 것 같군요! 잠시 후에 무대를 옮겨 다시 뵙겠습니다!"
녹화 방송이었음에도 마치 생방송처럼 능숙하게 편집점을 잡아내는 것이 괜히 미국 대표 토크쇼 MC가 아니었다.
잠시 후 우리는 옆 스테이지로 옮겨가 촬영을 재개했다. 최근 2년간 지구에 나타난 몬스터나 마물의 사진이 벽에 한가득 걸려 있었다. 나름 행성별로 나눠서 정렬도 해 놓은 것 같았다. 사진 속 몬스터 중엔 나도 못 본 것들도 제법 있었다.
"수호, 그럼 다른 행성들의 이야기도 좀 해주세요. 인간이 살고 있지 않은 행성은 두 곳이 맞나요?"
나는 먼저 손가락으로 공룡들 사진이 모여 있는 행성 쪽을 가리켰다.
"저기 공룡들이 사는 행성 055랑."
다음은 가장 많은 몬스터 사진이 걸려 있는 행성 쪽을 가리켰다.
"행성 전체가 아비규환인 행성 094요. 이 두 곳에서는 인간을 만나지 못했어요. 나머지 세 곳엔 인간이 살고 있더군요."
"오. 그렇군요. 방금 가리키신 행성 094와 연결된 화이트 게이트에서는 유독 많은 몬스터나 마물이 튀어나오는데, 이유가 있나요?"
"당연합니다. 행성 094에는 몬스터와 마물이 그야말로 바글바글하니까요. 지옥이 있다면 그곳 같을 겁니다. 온종일 몬스터와 마물들이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며 싸우는 행성입니다."
"몬스터 개체 수가 워낙 많아 게이트가 생기면 많이 넘어온다는 말씀이시죠?"
"네, 맞아요. 정말 많아요. 그리고 아직 지구엔 많이 넘어오지 않은 것 같던데. 그 행성에서 정말 위험한 건 저 사진 속 몬스터들이 아니에요. 마물이에요."
제이미가 몇몇 마물 사진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마물이요? 지구에도 몇 차례 건너온 적이 있었습니다. 저기 찍힌 사진도 제법 있죠."
벽에는 키가 큰 놈, 납작한 놈, 날개가 달린 놈 등 제법 여러 마물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다들 조금씩 다른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마물들의 공통점은 기괴한 얼굴과 긴 팔다리였다.
눈동자는 없이 구멍만 뚫려 있는 두 눈 부위와 길게 찢어진 입.
그리고 몸통에 비해 두 배 이상 긴 팔과 다리.
나는 벽을 향해 있던 시선을 다시 제이미에게 돌리며 말했다.
"마물들은 다른 몬스터들과는 달라요. 그들에겐 귀마왕(鬼魔王)이라는 지도자가 있고, 나름의 지휘 체계를 갖추고 있죠. 제법 지능이 있는 놈들이에요. 어떤 놈들은 마음대로 공간을 이동하기도 해요."
"일반적인 몬스터, 그러니까 그냥 단순한 괴물은 아니라는 거네요."
"네, 맞아요."
이후로도 제이미는 행성 049 무림인들에 관한 이야기, 테라 행성에 관한 이야기 등을 다양하게 물어보았다.
"오늘 정말 많은 이야기 감사합니다. 지구의 영웅을 모신 것도 영광인데 게이트 너머 세상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군요."
"아닙니다. 저도 투나잇 쇼에 출연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수호의 생각을 좀 말해 주세요. 이 혼란한 세상을 우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어제 지구방위위원회 회의에서도 똑같은 얘기를 하고 왔는데, 제 생각에 지금 중요한 건 화이트 게이트가 아니라 블랙 게이트예요."
그저 단순한 마무리 멘트 정도를 기대했는지 제이미가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블랙 게이트요?"
"네. 지구에 와보니 화이트 게이트에서 튀어나오는 것들에게만 너무 관심이 몰려 있더라고요. 갑자기 생겨난 블랙 게이트 때문에 다른 행성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 사람들의 숫자도 엄청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렇긴 하죠. 하지만 게이트 반대편이 어딘지 알 방법이 없어 그들을 구해올 방법이……."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나요? 방법이 없으면 찾아야죠. 미국은 외국에 있는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무엇을 설치하죠?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고요."
잠시 고민하던 제이미가 입을 열었다.
"재외 공관(在外公館) 말씀이신가요?"
"맞아요. 블랙 게이트로 빨려 들어간 사람들을 모두 구해 낼 순 없겠지만, 적어도 각 행성에 재외 공관을 설치해 불시에 다른 행성에 떨어져 버린 지구인들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단한 계획이군요……. 하지만 가능할까요?"
"대화가 통하는 행성이라면 외교로 풀어야 할 것이고, 아니라면 어떤 몬스터도 넘볼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어야죠. 적어도 낯선 행성에 떨어진 사람들에게 살아남기 위해 찾아가야 할 목적지라도 줘야 할 것 아닙니까. 지금도 힘들게 어딘가에서 생존하고 있는 지구인들도 있을 테고요."
턱을 괸 제이미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분한 말투로 낮게 중얼거렸다.
"듣고 보니 그렇군요. 맞는 말이에요. 당장 우리 집 앞에 화이트 게이트가 생긴다면 누군가 도와주러 올 거란 희망이라도 있겠지만, 블랙 게이트에 빨려 들어가 다른 행성에 떨어진다면……."
"현재는 아무런 희망이 없죠. 그래서 재외 공관이 필요한 겁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요. 범지구적 차원에서 이 일을 제대로 검토하고 추진한다면, 메타디펜스도 적극적으로 협조할 계획입니다."
"그렇군요. 오늘, 참으로 놀라운 인터뷰였습니다. 자 여러분! 투나잇 쇼에 찾아주신 김수호와 레온에게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저는 투나잇 쇼의 제이미 팰런이었습니다."
* * *
일주일 후, 다시 현재.
서울 종로 대성 그룹 본사 37층.
쾅!
널찍한 집무실 소파에서 TV를 보던 박영식이 티 테이블 위에 있던 서양란 화분을 거칠게 벽에 집어 던졌다.
벽에 부딪힌 화분은 쾅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박영식이 이를 아득 갈았다.
"김수호 저 새끼. 이제 NBC에까지 출연해 아주 영웅 행세하고 자빠졌네. 뭐? 재외 공간? 어딘지도 모르는 외계 행성에?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해야지."
박영식의 맞은편에 앉아서 함께 투나잇 쇼를 시청하던 기획실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재외 공간이 아니고 재외 공관.'
하지만 그는 이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박영식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기획실장! 그 메타디펜스 재무 자료는 구해 왔어?"
'주식회사 재무제표는 기업 홈페이지에서 바로 확인되는데 뭐 그걸 나까지 따로 불러서 구해 오라는 건지, 원.'
기획실장은 이번에도 당연히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네. 여기 구해 왔습니다."
기획실장은 자신의 앞에 있던 노트북으로 메타디펜스 2024년 재무제표 PDF 파일을 열었다.
물론 실무자를 시켜 메타디펜스 홈페이지에 접속해 1분 만에 다운로드한 파일이었다.
노트북 모니터를 본체에서 가볍게 톡 떼어낸 기획실장은 그걸 박영식에게 건넸다.
"역시 우리 기획실장이야. 남의 회사 재무 자료를 이렇게 금방 구해 오다니 말이야."
"…감사합니다."
박영식이 모니터를 잠시 들여다보는 듯하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가 이렇게 복잡해? 뭐 요약본 같은 거 없어? 그래서, 이 회사 이거 재무 상태가 어떻다는 건데?"
'떠다 먹여줘도 먹을 줄을 모르는구나.'
물론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튼실합니다.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 단 1원의 대출도 받지 않았습니다. 어음이나 수표 거래도 없습니다. 재정 관리 역시 투명한 편입니다."
"제기랄. 세금은? 탈세 같은 거 있을 거 아냐?"
"그쪽은 이미 따로 확인해 봤는데, 깨끗합니다."
"병원에 있을 때 아버지가 이미 합의는 봐버렸고. 그때 콩밥을 먹여버렸어야 하는데. 아, 이 새끼 뭐로 엿을 먹이지?"
박영식은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집무 책상에 가서 비서실을 연결했다.
- 네, 사장님.
"채굴사업부 박태열 부장 올라오라고 해."
- 네, 알겠습니다.
* * *
8월 16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62,577개]
[단가 64억 원]
[평가 금액 400조 5천억 원]
게이트로 연결된 여섯 개 행성 현황
[행성 049]
- 무림인들이 사는 작은 행성.
[행성 055]
- 지구의 쥐라기 시대와 유사한 행성.
- 인간은 살지 않음.
- 보고된 가장 강한 몬스터는 5등급 티라노사우루스.
[행성 062]
- 지구.
[행성 073]
- 시엠브레 제국이 있는 테라 행성.
[행성 087]
-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세상과 유사한 행성.
- 신족, 인간, 몬스터가 공존.
- 천동설이 실제인 세상.
- 보고된 가장 강한 몬스터는 8등급(현재 최상급) 히드라.
[행성 094]
- 몬스터가 가장 많은 행성.
- 몬스터, 마물이 공존하는 아비규환.
- 인간은 살지 않음.
- 보고된 가장 강한 몬스터는 7등급 브리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