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 귀마왕 (1) 】
저 멀리 광물 처리 시설 위에 지름이 10미터도 채 되지 않는 D급, 그러니까 가장 낮은 급의 화이트 게이트가 보였다.
D급 게이트는 반대편 블랙 게이트의 흡입력도 낮고 지속 시간도 짧아 큰 위협은 안 되는 게이트였다.
박영식을 놀라게 한 건 게이트의 크기가 아니었다.
그를 놀라게 한 건 바로 게이트에서 나오고 있는 것들.
행성 094에 산다는 각양각색의 마물들이 D급 화이트 게이트에서 계속해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키가 2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마물부터 허리를 숙여야 겨우 게이트를 빠져나올 수 있는 놈들까지.
몇몇 날개가 달린 마물은 날아서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누가 보아도 반대편 블랙 게이트에 휩쓸려 이쪽 화이트 게이트에서 강제로 튕겨 나오는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문을 통과해 이곳으로 넘어오고 있는 듯한 모습.
아직도 게이트 주변의 사람들이 다급히 달아나고 있었지만, 마물들은 그들에게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게이트에서 걸어 나와 넓은 광산에 모여들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게이트를 나와 자리를 잡은 마물들은 일제히 게이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멍하니 마물들이 모이는 것을 바라보던 박영식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쉬이익.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박영식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텁.
"으악!"
거대한 날개를 단 마물 하나가 박영식의 양쪽 어깨를 붙잡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날개 달린 마물은 박영식을 마물들이 모여 있는 곳 중앙에 내려두었다.
박영식이 달아나려고 하자 마물은 거센 두 팔로 그의 어깨를 꽉 눌렀다.
박영식은 겁에 질린 눈으로 주변 마물들을 돌아보았다.
눈이 있어야 할 곳은 구멍만 뻥 뚫려 있었고, 코는 없이 길게 찢어진 입이 보는 사람의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얼굴은 다 비슷하게 생겼지만, 몸의 크기나 체형은 모두가 제각각이었다.
얼굴 생김새 외에 굳이 또 하나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모두 팔다리가 몸통에 비해 굉장히 길다는 것이었다.
이런 마물들 수백 마리가 모여 있자, 놈들에게서 나오는 마기로 인해 주변 공기마저 서늘하게 식어갔다.
"왜, 왜 나만 잡아 온 거야! 아까 다른 사람들 많았잖아! 이거 놔!"
박영식이 어떻게든 빠져나가 보려 발버둥 치는 사이, 게이트에서 마지막 마물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동시에 수백의 마물들이 모두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하는 듯한 행동을 했다.
키는 3미터 남짓. 다른 마물들과는 달리 머리에 큰 뿔이 세 개가 나 있었다.
유독 짙은 마기를 뿜어내는 뿔 달린 마물이 박영식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행성 062의 인간."
분명 한국말은 아니었다. 처음 듣는 언어.
"나는 귀마왕(鬼魔王)이다."
동시통역기도 가지고 있지 않은 박영식이었지만, 그의 머리엔 마물이 하는 말의 의미가 정확히 전달되었다.
알아들을 순 없지만 이해는 할 수 있는 귀마왕의 신비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이 근방에서 네가 가장 강한 기운을 가지고 있더군. 나머진 모두 보잘것없던데, 지구의 인간들은 보통 여기 있던 놈들이나 네놈 정도의 수준인가?"
"무, 무슨 말입니까?"
"우연히 게이트에 빨려 들어가 이곳저곳을 떠돌다 돌아온 부하들이 입을 모아 말하더군. 행성 062가 가장 살기 좋아 보인다고. 너희들 말로 지구라고 했던가?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 정착하기로 했다."
정착이라는 말에 박영식의 목 뒤로 땀이 흘렀다.
지금 지구는 수시로 생겨나는 게이트로도 충분히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 그런데 보기만 해도 오싹한 마물 수백 마리가 지구에 정착하겠다고 작정하고 넘어왔다.
"부하들에게 들어보니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장 강하다던데. 여기서 먼가? 어느 쪽이냐. 안내한다면 특별히 내 첫 번째 인간 부하로 삼아주지."
"미국… 이요?"
"그래. 가장 강한 적부터 깨부수면 나머지는 금방 전의를 상실하는 법이지."
물론 이렇게 마물 수백이 모여 있으니 오금이 저리고 무시무시하기는 했다. 하지만 귀마왕의 입에서 '미국'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박영식의 머리가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고작 이런 마귀들 몇백 마리로 미국을 상대한다고?
내뿜는 마기와 자신감을 보니 이곳 인도네시아 정도는 점령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어쨌든 이들이 넘어온 건 지구에 큰 재앙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미국이라니.
박영식은 순간 너무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내뱉을 뻔했다.
지구는 생각보다 강한 행성이었다. 여러 행성의 위협으로 크고 작은 피해를 보긴 했지만, 지구 자체의 존폐가 위기를 맞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미국이 어딘지 알려드리면 살려주실 겁니까?"
"그래. 살려줄 뿐 아니라 내 첫 번째 지구인 부하로 삼아준다고 했다."
'부하는 무슨. 미국 위치나 대충 알려주고 빨리 도망가자. 뒷일은 미국에서 알아서 하겠지.'
"그게, 여기서 좀 멀긴 한데……."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평소 그렇게 안 돌아가던 박영식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김수호. 그놈에게 복수할 기회가 찾아왔다.
잠시 망설이던 박영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사실 지구에서 가장 강한 자가 살고 있는 곳은 따로 있습니다."
귀마왕이 기다란 허리를 숙여 박영식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래? 그놈이 누구냐. 어디에 있어."
"한국이란 나라의 강화도라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
"거기가 어딘지 정확히 알고 있느냐?"
"네. 제가 사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그래?"
이 무시무시한 놈들을 보내면 한국에 큰 피해가 생길 것이 자명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김수호에게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는 생각만이 박영식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지구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거기 사는 김수호라는 놈을 먼저 처리하셔야 합니다."
귀마왕이 오른손을 들어 펼쳤다.
잠시 후 귀마왕의 손 위에 어두운 기운이 모여들더니 동그란 펜던트 하나가 생겨났다.
기하학적인 무늬가 복잡하게 새겨진 펜던트였다.
귀마왕이 팬던트가 생겨난 손을 박영식에게 내밀었다.
"자, 받아라."
"이게 무엇입니까?"
"이걸 가지고 그자가 있는 곳으로 가거라. 그리고 이 펜던트를 반으로 쪼개라. 그럼 그곳에 우리가 나타날 것이다."
"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말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상관없다. 그곳에 있는 놈들을 모두 죽이고 다시 미국을 찾아가면 그만이니. 네 말이 진실이라면 널 내 부하로 삼아줄 것이고 거짓이라면 찾아내 죽일 것이다."
"결단코 거짓이 아닙니다. 그자가 지구에서 가장 강한 자입니다."
"좋다. 가라, 그곳으로."
박영식의 어깨를 쥐고 있던 날개 달린 마물이 그제야 손의 힘을 풀었다.
그제야 자유로워진 박영식은 뒤도 안 돌아보고 왔던 길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차! 차를 찾아야 해!'
저 앞에 도로변에 세워진 차 한 대가 보였다.
급히 다가가 문을 열어보려 했으나 잠겨 있었다. 문짝이야 뜯어버리면 그만이지만 문이 잠겨 있다면 시동도 안 걸릴 것이다.
그렇게 길이나 주차장에 세워진 차들의 문을 잡아당겨 보기를 여러 번.
딸깍.
트럭 한 대의 문손잡이가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당겨졌다.
얼른 차에 올라타자 다행히 키박스에 열쇠도 꽂혀 있었다.
다급히 시동을 건 박영식이 트럭의 가속 페달을 강하게 밟았다.
"두고 보자, 김수호. 하하하!"
너무 많은 마물을 한꺼번에 접한 탓인지 반쯤 돌아버린 박영식이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박영식은 김수호를 끝장낼 마물들의 모습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룸미러로 뒤를 보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조금 전까지 있었던 다양한 크기의 마물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 많던 마물들이 갑자기 다 어디 간 거야? 꿈인가?"
박영식은 혹시 자신이 뭐에 잠시 홀렸거나 꿈을 꾼 게 아닌가 싶어 다급히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았다.
귀마왕이 건네준 펜던트가 그대로 만져졌다.
"역시 꿈이 아니었어! 하하하!"
* * *
다음날, 메타디펜스 트레이닝 센터.
스피커에서 짧은 경보음이 울렸다. 해외 지원 요청 경보음이었다.
트레이닝 센터 한쪽 벽에 마련된 대형 스크린을 바라보자 전략기획실에서 띄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호주 정부 지원 요청. 퀸즐랜드 주 케언즈에 B급 화이트 게이트 발생. 디펜서 2팀 출동 요망.]
파주 카토블레파스 등장 사건 이후 메타디펜스는 디펜서 조직을 세 개 팀으로 변경해 운영하고 있었다.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조율하긴 했지만 보통 1팀은 라울이, 2팀은 내가, 3팀은 최수영이 맡았다.
무선이어폰을 작동시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혁진 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번엔 대표님께서 2팀과 함께 출장을 다녀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며칠 전 경기도 화성시 게이트 때 1팀이 너무 고생해서요.
"알고 있습니다, 이 실장님. 안 그래도 이번엔 제가 출동하려던 참입니다. 지금 바로 워프실로 이동하죠."
- 네, 대표님.
나는 2팀 팀원들과 함께 워프실로 향했다.
워프실에 도착하자 마법 본부 소속 디펜서들이 마법진 가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법 본부로의 부서 이동 전 친하게 지냈던 디펜서 한 명이 아는 체를 했다.
"이야, 이제 진짜 마법사가 된 거야? 직접 마법진도 가동할 수 있어?"
마법 본부 직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아직 멀었어. 그리고 이 마법진은 이미 기본 설계가 다 되어 있어서 거의 버튼만 누르면 되는 정도야."
"그래? 그럼 그거 나도 작동할 수 있겠네?"
"버튼만 누르는 정도긴 한데, 넌 못해. 하하하. 이래 봬도 마법사만 할 수 있는 거라고."
나와 2팀 디펜서들이 마법진 위에 오르자 마법 본부 직원이 마법진을 가동했다.
언제나처럼 눈부신 빛무리와 함께 우리는 지구 반대편 호주 케언즈에 설치된 마법진에 도착했다.
* * *
같은 시각, 박영식이 탄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린 박영식은 서둘러 택시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너무 많은 마물을 한 번에 접한 탓인지, 눈이 반쯤 풀려있었고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살찐 턱선을 타고 땀방울이 계속 뚝뚝 떨어졌다.
택시 정류장에 도착한 박영식은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마구 밀치며 맨 앞으로 나아갔다.
밀쳐진 사람들이 불쾌한 목소리를 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눈이 마주친 이후엔 누구도 박영식을 제대로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거대한 덩치와 반쯤 풀린 눈. 비 오듯 쏟아지고 있는 땀까지. 정류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지금 저 덩치와 엮여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택시의 뒷문을 열고 거대한 몸을 구겨 넣은 박영식이 입을 열었다.
"가, 강화도. 메타디펜스 본사."
택시 안에 박영식의 땀 냄새가 진득하게 퍼졌다.
택시 기사는 큰 내색 없이 창문을 조금 내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럼 강화도로 바로 갑니다, 손님."
한 시간 후, 택시는 메타디펜스 본사 앞에 도착했다.
"손님, 오만사천육백 원입니다."
"……."
뒷좌석에서 아무 대답도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자 택시 기사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 뭐야! 손님! 손님!"
박영식의 눈은 완전히 뒤로 넘어가 흰자위만 보이는 상태였고, 콧물과 침이 줄줄 흘러 상의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이거? 119를 불러야 하나? 손님! 정신 차려봐요!"
택시 기사가 송풍구에 거치해 두었던 휴대폰을 뽑아들고 119를 부르려는데, 박영식의 눈이 다시 반쯤 돌아왔다.
"손님! 괜찮으세요? 손님!"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상황을 파악하던 박영식은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오만 원권 열댓 장을 앞좌석 팔걸이 위에 턱 내려놨다.
택시 기사는 얼른 지폐를 챙기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손님? 119 불러드려요?"
박영식은 대답 없이 택시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반쯤 뜬 박영식의 눈에 커다랗고 반듯한 메타디펜스 본사 건물이 들어왔다.
"김수호. 개새X."
박영식은 건물 출입구를 향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 * *
10월 14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63,491개]
[단가 64억 원]
[평가 금액 406조 3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