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 * *
옆에 있던 최수영이 깜짝 놀라 물었다.
"오빠, 정말이야? 라울이 당했다고? 그리고 1팀 전부가?"
"응, 우리가 늦었어."
"얘기 듣고 바로 온 건데 어떻게……."
"그만큼 이놈들이 강했다는 거겠지."
"라울……."
최수영의 눈에서 금세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천마를 돌아보았다.
"천마, 여기 출동했던 우리 직원들이 모두 죽었어요. 라울은 저랑 이 활동을 처음 같이 시작한 동료이고요."
"안다. 하지만 저놈은 내 것이다. 저놈을 잡기 위해 지구까지 온 걸 잘 알고 있지 않으냐."
"그 귀마왕인가 하는 놈은 양보할게요. 둘 중 한 놈만 골라요. 무림의 최강자를 무림맹주로 오해한 이놈이랑, 천마 할배를 이길 뻔한 귀마왕이랑."
천마의 눈썹이 꿈틀댔다.
"누가 누굴 이길 뻔해?"
"그러니까요. 그 귀마왕인가 하는 놈을 천마가 맡으라고요. 저 불사인은 저한테 넘겨요. 라울의 복수를 해야 하니까."
잠시 고민하던 천마가 입을 열었다.
"흥, 알았다. 네놈 뜻대로 해라. 대신 저놈에게 다시 한번 전해라. 무림에서 상대했던 자는 내 발끝도 못 따라온다고."
천마는 뒤를 돌아 장로들에게 저리 가자는 손짓을 했다.
천마와 장로들이 멀찌감치 떨어졌다.
"수영아, 너도 가 있어."
"나도 같이 싸울……."
최수영이 말을 하다 말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내 팔을 바라보았다.
"알았어, 오빠. 조심해."
"응."
최수영도 천마 일행이 있는 곳으로 떠나고, 게이트 앞에는 나와 마티아스만 남았다.
"어리석은 놈. 기운을 보니 제법 하는 놈들 같던데, 한꺼번에 덤볐으면 네놈들에게 승산이 있을 수도 있었다."
"네놈의 같잖은 짓거리에 애꿎은 내 동료들이 죽었다."
"그래? 안됐구나. 대신 너도 곧 그들에게 보내주마."
마티아스의 검이 잘게 떨리더니 푸른 빛의 검기가 발현되었다.
확실히 제1 기사단장 가엘의 것보다 더 진하고 긴 검기였다.
3미터에 달하는 긴 검에 그보다 두 배는 긴 검기가 맺혔다.
놈의 팔길이까지 고려하면 공격 범위가 10미터는 쉽게 넘을 것 같았다.
나도 검에 내력을 주입했다.
마티아스가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푸른 검기가 바닥을 쓸며 내 몸을 향해 쏟아져 들어왔다.
검기에 닿는 돌 바닥과 건물 잔해들이 두부 썰리듯 썰려 나갔다.
정말 두부라도 썰고 있는 듯, 긴 검기에 닿는 수많은 장애물에도 공격 속도는 전혀 늦춰지지 않았다.
콰앙!
마티아스의 검기와 마그네타 검에서 발현된 검기가 공중에서 부딪쳤다.
폭탄이 터진 것처럼 주변의 먼지와 잔해들이 순식간에 커다란 원 모양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검술에 미친 자라더니…….'
처음 받아보는 수준의 검격이었다.
손목이 저릿저릿 울려왔다. 가공할 힘이 실린 공격일 뿐 아니라, 최대의 힘으로 받아치지 못하도록 계산되어 들어온 정교한 각도의 공격이기도 했다.
마티아스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다시 반대쪽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버프 마법의 지원을 받고 있지 않음에도 엄청난 속도였다.
나 또한 급히 검을 양손으로 고쳐 쥐고 마나와 내력을 함께 불어넣었다.
콰과과!
마그네타 검에서 용처럼 생긴 검은 기운, 대천흑룡이 뿜어져 나갔다.
순간 마티아스의 검로가 바뀌더니 대천흑룡을 흘려보냈다.
흘려보내? 마그네타 검의 검은 기운을?
물론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대천흑룡을 천마가 정면으로 받아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외부의 힘에 의해 대천흑룡의 경로가 틀어지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조금 전 검기끼리는 그렇게 자신 있게 부딪치더니, 대천흑룡은 보자마자 옆으로 흘려버렸다.
대천흑룡과 부딪혀선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근위대를 다 처리한 후 화가 나서 전력을 다해 쏟아낸 대천흑룡도 가볍게 피해 냈었다.
"그 무시무시한 검은 드래곤은 인정하지. 맞부딪혀 볼 엄두가 나지 않는군. 그 검의 힘인가?"
"그런 건 알 거 없고, 곧 맞부딪히게 될 거야."
"하하하. 좋다. 드디어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났구나."
쾅, 콰앙!
열댓 번의 경합이 오갔다.
반경 백 미터가 넘는 땅이 온통 패였고, 근처의 건물들은 모두 무너져내렸다.
하지만 둘 다 작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상태.
기습적으로 염동력도 한번 사용해 보았는데, 놈은 검기로 염동력을 끊어버렸다.
정말 미친 듯이 발달한 전투 감각이었다.
게다가 커다란 덩치에 맞지 않는 빠른 속도.
힘은 오히려 마티아스 쪽이 한 수 위였다.
이 정도 놈에게 버프 마법이라도 걸려 있었다면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뻔했다.
"이 실장님."
- 네, 대표님!
"신체 강화 상품 세 개 모두 하나씩 더 사세요."
- 지금이요? 10단계를 세 개 사려면 3만 코인이 넘게 필요합니다.
"네, 사세요. 코인은 충분한데 라울의 복수를 시시하게 할 순 없잖아요."
- …알겠습니다. 바로 구매하겠습니다.
마티아스가 의아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혼자 뭐라고 떠드는 것이냐? 너무 강한 상대를 만나 돌아버린 건 아니겠지? 이제 좀 재밌어지려고 하는데 말이야."
이혁진 실장이 신체 능력 강화 상품을 모두 구매한 모양이다.
몸속의 기운이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초창기엔 직접 움직여보기 전까지 몸의 변화를 느끼지 못했었는데, 6단계쯤부터인가 예민해진 감각으로 몸 안의 기운이 달라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는 건 저 미친 듯이 발달한 전투 감각을 가진 놈도 내 몸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겠지.
"어때? 뭐 좀 달라진 것 같지 않아?"
"어떻게 한 것이냐? 갑자기 무슨 기운이……."
"느껴지나 보네. 자, 다시 붙어보자."
타앗.
바닥을 박차고 힘차게 놈에게 달려들었다.
마티아스가 다급히 검을 휘둘러 검기를 쏘아냈다.
아까까진 전력을 다해야 막아낼 수 있는 공격이었는데, 이젠 놈의 검로가 훤히 보였다.
마그네타 검으로 놈의 검기를 살짝 빗겨내며 놈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이제야 놈의 속도가 내 움직임을 못 쫓아오기 시작했다.
30,720NXT.
2년 반 동안의 긴 모험 동안 모은 코인의 절반이 넘는 숫자였다.
지금 시세로 한화 203조.
천마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이 코인을 쓰지 않고도 놈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라울의 복수는 내 손으로 직접 해야 했다.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끊임없이 우리 회사를 지켜준 라울에게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지금은 이것밖에는 없었다.
촤악!
마그네타 검에서 뻗어 나간 검기가 마티아스의 한쪽 무릎을 노리고 들어갔다.
마티아스는 다급히 검을 내려 공격을 막아냈다.
네가 막아내는 건 여기까지.
나는 그대로 양손으로 검을 고쳐 쥐고 다시 반대편 무릎을 향해 대천흑룡을 쏘아냈다.
콰앙!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대천흑룡과 놈의 다리가 부딪쳤다.
신체를 어지간히도 단단하게 단련한 모양인지 대천흑룡도 놈의 강철 다리를 한 번에 끊어내지는 못했다.
마티아스는 대천흑룡에 맞은 왼 다리를 급히 뒤로 들어 올리며 공중제비를 돌았다.
거대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정말 빠른 몸놀림이었다.
내 뒤에 착지한 놈의 다리는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하지만 아직 끊어지진 않은 상태. 마티아스의 대처가 조금만 늦었다면 대천흑룡은 그대로 놈의 다리를 박살 냈을 것이다.
다리를 쩔뚝거리며 선 마티아스가 바로 나에게 검을 찔러 들어왔다. 그 와중에 정말 대단한 몸놀림이었다.
하지만 이젠 느려.
나는 내력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발현시킨 검기로 놈의 검을 내리쳤다.
콰직.
마티아스의 검이 부러지며 맹렬하게 나를 찔러 들어오던 푸른 검기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다시 한번 큰 호를 그린 내 검기는 그대로 마티아스의 오른 손목을 베어버렸다.
쾅.
거대한 검과 오른손이 함께 땅에 떨어졌다.
당황한 마티아스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어, 어찌한 것이냐? 분명 조금 전까지도 이렇게 강하지 않았는데?"
"알 거 없어. 그냥 일 년 넘게 개고생해서 모은 코인 다 밀어 넣은 거야. 라울이 시원시원한 복수 장면을 보고 싶어 할 것 같아서 말이지."
"코인……? 그렇군. 그 후지로라는 자가 모으던 그것이군."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누구?"
"너희 지구에서 온 후지로라는 자 말이다."
"후지로? 일본 육상총대의 쿠라타니 후지로?"
"그런 하찮은 놈의 풀네임까지는 모른다. 그놈이 전쟁을 통해 무슨 코인인가를 모은다고 기사단장 가엘이 불만이 많던데, 이래서 그런 것이었군. 지구인이야말로 위험한 자들이었어."
"후지로가 살아 있다니, 그것도 테라 행성에?"
"네놈과도 인연이 있는 모양이지?"
"있지. 악연.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다더니 거기 가 있었군."
뜻밖에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후지로가 살아 있든, 지구에 있든, 테라에 있든 별로 중요치 않았다.
"이제 그만 죽어라. 마티아스."
내 말을 들은 마티아스가 두 팔을 벌려 자기 몸을 완전히 드러냈다.
"그래, 죽여라. 내가 졌다. 내 인생에 가장 가슴 뛰는 대결이었다. 고맙다."
"미친놈."
아까 확인한 라울의 사체는 허리가 두 동강 난 채였다.
나는 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마그네타 검에는 검기를 발현시키지도 않은 채였다.
마티아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 하는 거냐? 그런 작은 검으로는 날 벨 수……."
마티아스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가볍게 휘두른 마그네타 검이 마티아스의 허리춤에 닿은 순간, 그의 몸은 라울의 것처럼 두 동강이 나버렸다.
쾅.
마티아스의 상체가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정말 대단하군. 지구란 곳은……."
나는 이어폰으로 이혁진 실장을 다시 불렀다.
"이혁진 실장님."
- 네! 대표님.
"바로 본사 직원들 보내서 디펜서 1팀 시체 수습해 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11월인데 여긴 아직도 덥네요."
- 네! 장비들과 디펜서 2팀을 바로 이라크로 보내겠습니다.
"네. 라울은 한국의 겨울을 특히 좋아했으니까요."
- 네?
"아닙니다. 서둘러주세요."
* * *
그날 저녁, 강화도 메타디펜스 본사.
"뭐? 3만 코인을 썼어?"
"응."
"마티아스가 강하긴 강했던 모양이네."
"라울 앞에서 그놈을 겨우겨우 상대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어."
놀란 눈을 했던 최수영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 잘했어. 그런데 오빠 이제 나보다도 코인이 적겠는데?"
"그러게. 이제 3만4천 개밖에 안 남았어."
"뭐야, 아직도 나보다는 많네. 그래도 이제 별로 차이 안 난다. 라울 장례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
"마음 같아선 우리가 치러주고 싶지만, 가족들 의견이 우선이니까. 가족들이 인도로 보내달라면 보내줘야지 뭐."
최수영과 건물 옥상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비서실 직원이 올라왔다.
"대표님."
"네, 말씀하세요."
"라울 이사님의 장례는 가족분들께서 치르겠다고 하십니다. 화장해서 갠지스강에 뿌릴 거라고 하시네요."
"네, 그럼 그래야죠. 최대한 예를 갖춰서 시신을 인도에 있는 가족들에게 인계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비서가 다시 내려갔다.
꾹 참고 있던 눈물이 결국 눈꺼풀을 넘쳐흘렀다.
"내가 괜히 이런 회사를 차린 걸까? 박 상사님에 이어 라울까지."
최수영이 나를 살포시 안아주었다.
침울한 분위기에 옆에 가만히 앉아 있던 꽝이도 등을 슬쩍 내 허리에 가져다 대었다.
"너무 자책하지 마, 오빠. 어쩔 수 없었잖아. 그리고 오빠가 이 회사를 차려서 살린 사람이 지금까지 몇 명인데 그런 소리를 해."
그쳤던 눈이 다시 한 송이 두 송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라울이 참 좋아하던 한국의 눈이었다.
* * *
11월 21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33,961개]
[단가 66억 원]
[평가 금액 224조 1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