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 * *
이후로 우린 중학교 때 있었던 일 같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계속했다.
식사 후 바로 떠난다는 걸 겨우겨우 붙잡아 며칠만 더 머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사는 집으로 허염환을 데려가자 둘은 대번에 허염환을 알아보았다.
"어머, 염환이 아니니? 맞지? 이게 얼마 만이야, 그래."
"염환 오빠? 뭐야, 왜 이렇게 말랐어? 잘 지냈어?"
내 방으로 올라와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은 허염환이 말했다.
"예정에 없이 널 만나버려서 너무 시간이 늦어졌네. 나 빨리 자야 해."
"뭐? 벌써? 아홉 시도 안 됐어. 얘기 좀 더 하다 자. 맥주 한잔할까? 성희가 맛있는 안주 많이 쟁여놓고 먹더라고. 내가 가져올게."
"아니야. 나 이 시간에 할 일이 있어서 얼른 자야 해. 지금도 늦었어. 오늘 고마웠다, 수호야."
"이 시간에 할 일이 있다면서 지금 자야 한다는 건 또 뭔 말이야?"
"그런 게 있어. 오늘 고마웠다, 김수호."
허염환은 허락도 받지 않고 그대로 내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1분도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 잠든 숨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 자식. 오랜만에 나타나서는 더 이상해졌네. 지금 바빠서 얼른 자야 한다는 게 뭔 소리야?"
몰래 도망가지 못하게 허염환을 묶어둘까 하다가, 어차피 내 감각을 뚫고 달아날 순 없다는 생각에 나도 침대 옆 소파에 몸을 뉘었다.
오늘 허염환이 했던 말들을 되짚어보았다.
분명 중학교 때보다 많은 말을 해준 것 같긴 한데, 뭘 망설이는 건지 정작 제대로 말해 준 건 별로 없었다.
고개를 돌려보자 비쩍 마른 허염환의 얼굴이 보였다.
숨소리를 들어보니 깊이도 잠든 것 같았다.
"뭐, 천천히 내일 더 물어보면 되겠지."
나도 천천히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허염환은 사라지고 없었다.
* * *
최수영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보니 없어졌다고?"
"응. 아무리 내가 깊이 잠들었다 해도, 기척도 없이 사라지기는 힘들었을 텐데."
"아, 뭐야. 나도 오빠 친구 허염환 씨 꼭 만나보고 싶었는데.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고."
"나도 어제 이것저것 많이 물어봤는데, 이 녀석 여전히 횡설수설만 하고. 게다가 자꾸 뭘 안 알려주려고 하더라고. 저쪽의 나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나 뭐라나."
"연락처는? 연락처도 안 주고받았어?"
"응. 없대. 진짜 없는지 안 알려주는 건지. 아무튼 알 수 없는 녀석이라니까. 이럴 거면 여긴 왜 찾아온 거야?"
"그야, 오빠가 한번 보고 싶었던 거겠지."
"날 보러 온 건 아니라고 하던데?"
"으휴, 그 말을 믿냐. 아무튼 단순해."
갑자기 단순 무식한 사람이 되어버린 나는 최수영과 함께 천마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벌써 두 달째. 최수영과 나는 매일 이곳에 출근해 천마에게 내공심법을 지도받고 있었다.
이미 연무장에는 천마의 정식 제자 이근수와 정성민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천마가 우릴 반겼다.
"오늘은 웬일로 그 녹색 머리 처녀 귀신은 함께 오지 않았구나?"
"스테노요? 해외에 몇 번 나갔다 오더니 강화도 바다는 이제 성에 차지 않는대요. 아침 일찍 경호원 몇 명과 함께 시칠리아로 워프했어요."
"마물들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더냐?"
"네. 아무래도 레온의 결계가 작동하는 것 같아요. 본사 건물에는 가까이 오지 못하고 몇 놈씩 번갈아 가며 멀리서 감시하고 있다고 하네요."
"누가 마물 아니랄까 봐 잔재주를 부리려고 틈을 노리는 모양이구나."
"무슨 걱정이에요. 우리에겐 천마 할배가 있는데요."
"쓸데없는 소리 말아라, 이놈. 어서 앉아라. 수련을 시작하자."
최수영과 나란히 가부좌를 틀며 물었다.
"그런데 천마, 요즘 좀 서두르시는 것 같은데요?"
"내가 서두르는 것이 아니고 네놈의 습득력이 느려 터진 것이다. 이놈아."
분명 두 달 전 처음 내공심법을 배울 땐 놀라울 정도로 내공을 잘 다룬다고 해 놓고선.
아무튼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양반이었다.
* * *
태평양 어디쯤, 작은 무인도.
평화로운 해변의 야자나무 숲.
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C급 화이트 게이트가 생겨나더니 그 속에서 마물 수백 마리가 걸어 나왔다.
키가 큰 마물 하나가 뿔 셋 달린 마물에게 말했다.
"귀마왕 님, 이번엔 지구에 맞게 돌아온 것 같습니다."
귀마왕이 답했다.
"그래. 이건 지구의 공기가 맞구나."
마물들이 걸어 나온 이후, 화이트 게이트에서는 행성 094의 몬스터 시체들이 투두둑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처참하게 몸이 찢긴 상태였다.
귀마왕이 품에서 작은 팬던트 하나를 꺼냈다.
콰직.
귀마왕의 기다란 손이 팬던트를 부숴버렸다.
부서진 팬던트를 앞에 툭 던진 귀마왕이 입을 열었다.
"가자, 이제."
강화도 양도면 진강산, 깊은 숲속.
서성거리던 마물 하나의 몸이 콰지직 구겨지기 시작했다.
"끄어어어."
몸이 구겨져 들어가는 마물이 괴로운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은 주변 마물들이 서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열, 스물, 서른.
이내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백여 마리의 마물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메타디펜스와의 전투 이후 지구에 남아 있던 마물들이었다.
구겨진 마물의 몸이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한 점이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그 자리엔 지름 십 미터가량의 마물 차원 통로가 생겨났다.
귀마왕이 천천히 차원 문을 통해 걸어 나왔다. 이미 모여 있던 마물들이 귀마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귀마왕 뒤로도 수백 마리의 마물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한적했던 진강산 숲속은 어느새 각양각색의 마물들로 가득 차버렸다.
귀마왕이 손짓하자 날개 달린 마물 하나가 귀마왕의 옆으로 왔다.
일전에 박영식을 붙잡았던 그 마물이었다.
"그동안 달라진 것이 있느냐?"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김수호라는 자는 게이트를 처리하러 바삐 돌아다녔고, 천마는 보통 자신의 거처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구나. 이제 가자."
"아, 차원 너머에 있는 우리 존재를 알아채는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분명히 괴물입니다."
"그래?"
"네. 김수호 곁에 항상 꼭 붙어 있던데, 오늘은 어디 멀리 사라진 건지 나타나지 않습니다."
"별 중요한 얘긴 아니로군. 가자. 건방진 인간 놈들. 오늘은 두 놈 다 잡아 죽여 원혼으로 만들어버리겠다."
귀마왕을 선두로 수백의 마물이 진강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었다. 산에서 내려온 수백의 마물들은 강화도 사람들을 거침없이 살해하기 시작했다.
마물이 쏘아낸 마기에 맞은 사람은 몸 전체가 괴사되었다. 또 다른 마물은 긴 팔을 휙휙 휘두르며 사람들의 몸통을 찢어버렸다.
덩치가 큰 마물이 발길질할 때마다 건물이 무너져내렸고, 날개 달린 마물들은 지나가는 자동차를 집어 들어 멀리 던져버렸다.
마물들은 곧장 남쪽으로 향했다.
메타디펜스 본사가 있는 곳이었다.
* * *
내공을 정순하게 모아 혈도를 따라 돌리고 있는데 본사 건물에서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곧 외벽 방어 시스템을 작동한다는 2단계 경보음이었다.
천마가 먼저 물었다.
"이건 무슨 소리냐?"
"2단계 경보음이요. 마물들이 쳐들어오고 있는 것 같아요."
"오늘이군. 장희철! 이두복! 제갈평! 이리 나오너라. 마물 놈들과 끝장을 보러 가자."
천마의 목소리를 들은 장로 셋이 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엉거주춤 일어나는 이근수와 정성민에게 천마가 말했다.
"너희 둘은 여기 있거라. 수련이나 계속하고 있어. 가자, 김수호."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이혁진 실장이었다.
- 대표님, 본사 방어 시스템을 작동하고 여기서 놈들을 맞으려고 했는데, 안 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죠?"
- 드론을 띄워서 확인했는데, 시민들의 피해가 너무 큽니다. 수백의 마물이 강화도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내려오고 있습니다.
"전원 출동 준비시키세요. 우리가 나가서 맞아줍시다."
- 네! 대표님!
10분 후.
메타디펜스 본사 지하 주차장에서 여러 대의 픽업트럭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중장갑을 두른 차량이었다.
가장 앞선 트럭 위에는 나와 최수영과 레온이 서 있었다. 그 옆을 달리는 트럭 위에는 천마와 세 장로들이 타고 있었다. 그리고 각각 서너 명의 디펜서를 태운 트럭 십여 대가 줄줄이 뒤따랐다.
머리 위로는 수십 기의 드론이 함께 날고 있었다.
20분여를 달리자 저 멀리 마물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 위엔 해병대의 헬리콥터들이 어지러이 날아다니며 날개 달린 마물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육상 병력은 아직 도착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천마와 세 장로들이 먼저 차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수영아, 레온아. 후방에서 지원해 줘."
"응, 오빠. 조심해."
"형, 조심하세요."
천마 일행의 뒤를 이어 나도 차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중간쯤에 귀마왕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천마가 걱정되긴 하지만, 일단은 맡겨둘 수밖에 없었다.
우선 가까이 있는 마물들에게 몸을 날렸다.
콰과과!
마그네타 검에서 뿜어져 나온 대천흑룡이 마물들을 덮쳤다.
대천흑룡은 마물들을 터뜨리고 짓이기며 앞으로 뻗어 나갔다.
순식간에 마물들이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히려 잘됐다.
검기를 길게 뽑아낸 후 놈들을 베어가기 시작했다.
쐐액, 쐐액.
최수영의 화살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콰앙, 쾅!
자폭 드론의 공격도 시작되었다.
마물을 큰 순서대로 스캔한 후 그대로 달려들어 자폭하도록 인공지능 설계가 된 드론이었다.
수십 기의 자폭 드론이 하늘 위에서 바삐 목표물을 찾고 있었다.
이 마물 놈들. 오늘은 다를 것이다.
나와 천마 일행은 놈들의 중앙으로 바로 파고들었고, 나머지 디펜서들은 사방으로 퍼져 사람들을 대피시키거나 따로 떨어진 마물들을 상대했다.
수백에 달하는 마물의 숫자가 너무 많긴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모두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귀마왕이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천마와 귀마왕이 열 보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치 없이 천마에게 달려드는 마물은 궐천마탄에 맞아 머리통이 뚫려버렸다.
* * *
퍼억.
천마에게 달려들던 마물 하나의 머리통이 또 터져 나갔다.
천마의 입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 준비는 좀 해왔느냐. 부하들은 많이 잡아 잡수셨고?"
귀마왕의 쭉 찢어진 입이 열렸다.
"아직도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어리석은 인간."
"그래.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너뿐만 아니라 그 누구한테도 진다는 생각을 품어 본 적이 없다."
"오만한 인간. 몸통을 흔적도 없이 말려버려 원귀로 만들어주마."
귀마왕의 양손에 검은 마기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난번보다 훨씬 어둡고 짙은 마기였다.
"하하, 이번엔 쥐새끼처럼 요리조리 안 피해 다니고 바로 정면승부로 가는 거냐? 한낱 마물 놈이지만 지난번보다는 마음에 드는구나."
천마의 양손에도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늘도 깨부술 수 있다는 천마 궁극의 비기.
파천마공(破天魔功)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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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38,301개]
[단가 67억 원]
[평가 금액 256조 6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