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 * *
콰과과!
대천흑룡이 거대 마물의 몸통에 거대한 구멍을 냈다.
"레온! 지금!"
조각난 조직들이 다시 모여들기 전에 레온이 구멍 난 부위에 커다란 구 형태의 실드를 만들었다.
수복되려던 몸통이 실드에 막혀 서로 이어지지 못했다.
쩌적.
하지만 실드 마법은 물리 공격에는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한다.
레온의 실드에서 금세 금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수초를 버티지 못하고 깨질 것이다.
퉁.
뒤에서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최수영의 활시위가 풀어지는 소리.
쐐액. 콰앙!
소형 폭탄을 장착한 화살이 거대 마물의 몸통을 재차 공격했다.
놈의 몸통이 완전히 위아래로 분리되었다.
벌써 몇 차례 이런 공격을 성공시키고 있었지만, 저 마물은 결국 다시 원래 모양을 회복했다.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는 일.
나도 곧장 어른 몸통만 한 마법구 십여 개를 만들어 놈에게 날렸다.
쾅, 콰앙!
놈의 상체가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부서졌다.
다시 모여드는 걸 막아보기 위해 염동력 장갑으로 거대 마물의 머리통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다시 이어지려던 조직들이 내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투둑 투둑 끊어졌다.
끌어당긴 머리통을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한참을 날아가던 머리통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대단한 결집력이었다.
영화에 보면 이런 괴물을 상대할 땐 무슨 '핵' 같은 걸 부수면 이길 수 있던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건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번쩍.
거대 마물 뒤편에서 강한 빛이 퍼져 나왔다.
천마가 귀마왕을 잡으러 간 곳이었다.
붉은빛과 검은 기운이 뒤엉켜 하늘로 치솟았다.
마치 두 마리의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거대 마물조차 제대로 서 있지 못할 정도로 강한 폭풍이 몰아쳤다.
대지는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쳤다.
제법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디펜서 대부분이 뒤로 밀려났다.
주변 건물들도 유리창을 시작으로 외벽이 조금씩 부서지더니 이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기운의 충돌이었다.
"가봐야겠어. 지금은 저 거대 마물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지만,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면 둘이 좀 맡아줘!"
레온과 최수영의 대답이 이어폰으로 들려왔다.
- 네, 형!
- 알았어. 얼른 가봐!
마음 같아선 한달음에 천마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퍼져나오는 기운이 너무 거셌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겨우 충돌의 진원지까지 이동했다.
"천마!"
귀마왕과 천마가 서로 손바닥을 맞대고 있었다.
천마의 양 팔은 이미 검게 괴사되어 뼈가 다 드러날 지경이었다.
"오지 마라!"
천마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천마의 외침은 단순히 대결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다.
지금은 두 기운이 서로 완전히 엉켜있는 상태. 외부의 자극이 들어오면 둘 다 그 자리에서 터져버릴 것이 분명했다.
"처음부터 같이 싸우면 될 걸 왜 이렇게까지……."
천마가 힘겹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너 같은 애송이 놈이 뭘 아느냐. 오늘이 바로 내가 우화등선(羽化登仙)을 하는 날이다. 이보다 기쁜 날이 어디 있겠느냐."
우화등선.
무림에 있을 때 천산 꼭대기에 앉아 천마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럼 이곳 무림인들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요? 무림 통일?"
"그건 일차원적인 일이고. 화산이나 무당 같은 도가 놈들이라면 우화등선이 최종 목표겠지."
"우화등선이요?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그거요? 그게 정말 존재해요?"
"먼 과거에 한 명 있었던 걸로 안다. 그야말로 입신의 경지를 넘어선 자이지."
천마는 자신의 입으로 화경을 넘어 입신의 문턱에 다다랐다고 말했었다.
"그럼 천마도 신선이 되는 게 목표인가요?"
"신선? 하하하. 평생 지름길만 찾고 패도를 일삼던 내가 무슨 신선이 되겠느냐. 그건 얌전 떠는 도가 놈들이나 가지는 목표이지."
"그럼 천마의 목표는 뭔데요?"
천산의 봉우리들을 내려다보는 천마의 눈빛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내 전력을 쏟아부을 만한 놈을 다시 한번 만나는 것. 그리고 죽는 한이 있어도 그놈에게 지지 않는 것."
"지금 무림엔 천마를 상대할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서요."
"그러게 말이다. 이대로 늙어 죽는 것이야말로 내 명성에 오점이 될 것인데. 어디, 네놈이 한번 나와 제대로 붙어줄 테냐?"
"어? 지금 저를 적수로 인정해 주시는 거예요? 하하하."
"적수는 무슨. 그나마 본 중엔 네 놈이 제일 낫다 정도지."
"이미 무림 최고의 무공을 얻었는데 목표는 더 강한 자를 만나 지지 않는 것이다……. 천마 어르신답네요."
"어르신? 네놈이 웬일이냐. 어르신 대접을 다 해주고."
"뭐, 그냥요. 하하하."
"으아아아!"
천마가 남은 내공을 모두 쥐어 짜내는 것이 느껴졌다.
콰과과!
그야말로 붉은 용이었다.
붉은 장삼을 입은 천마의 몸에서 붉은빛 용이 나와 하늘로 승천하고 있었다.
물론 귀마왕의 마기와 격돌한 천마의 내공이 하늘로 치솟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왠지 내 눈에는 마치 붉은 용이 승천하는 것처럼 보였다.
붉은 기운은 귀마왕의 검은 기운을 점차 압도해 갔다.
콰아앙!
엄청난 폭발이었다.
나조차 제대로 두 발을 딛고 서 있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주변의 아름드리나무와 건물들이 모두 뿌리째 뽑히고 무너져 날아갔다.
천마와 귀마왕이 있던 곳은 너무 밝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폭풍이 점차 잦아지고 빛도 옅어지기 시작했다.
겨우 볼 수 있게 된 곳엔 천마가 두 무릎을 땅에 댄 채 꼿꼿이 서 있었다.
귀마왕은 겨우 형태만 알아볼 수 있는 상태였다.
주변 어디서도 마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자 거대 마물도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천천히 천마에게 다가갔다.
"처, 천마……?"
대답이 없었다.
아직 미약하게 내공이 느껴지는데.
"살아 계시죠?"
감고 있던 천마의 두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안 죽었다, 이놈아."
"결국 이기셨네요. 귀마왕을."
"이깟 마귀 놈한테 질 줄 알았더냐?"
"이깟 마귀요? 지금 움직이시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요?"
"농담할 기운 없다, 이놈아. 이리 와 이 마귀 놈 시체 치우고 내 앞에 앉아 봐라."
아직도 천마와 손바닥이 맞붙어 있는 귀마왕의 시체를 건드려 보았다.
다 타버린 숯처럼 순식간에 바스러졌다.
"등을 내 쪽으로 하고 앉아라."
"갑자기 왜요? 몸이나 어서 추스르세요."
"의뭉스러운 놈. 내 몸에 선천진기(先天眞氣)가 바닥난 건 너도 느끼고 있지 않으냐."
제길. 느끼고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마땅히 느껴져야 할 기운이 천마에게는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 어서 앉아 보아라. 네놈 덕분에 내 목표를 이뤘으니 선물을 주고 가마."
일단 천마가 시키는 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천마의 손바닥이 내 등 위로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허억."
뜨거웠다. 천마의 손바닥에서 엄청나게 뜨거운 내공이 내 몸속으로 들어왔다.
얼마 되지도 않는 천마의 내공은 능숙한 양치기 개가 양떼를 몰듯 내 내공을 몰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콰앙! 콰앙!
온몸의 혈도를 타고 한 바퀴 돈 내공이 정수리께 어딘가 있는 얇은 막을 때렸다.
천마가 몰고 간 내공들이 임맥과 양맥 사이에 있는 생사현관을 두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계속해서 두드리기를 십여 차례.
콰앙! 번쩍!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 * *
"오빠!"
눈을 뜨자 최수영이 왈칵 안겨 왔다.
하얀 천장 아래 몇 개의 링거가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병원인 모양이었다.
"수영아?"
"응, 오빠. 괜찮아? 사흘을 꼬박 누워 있었어. 의사 선생님은 오빠 못 깨어날지도 모른다고 하시고, 얼마나 걱정했다고."
"천마 할배는?"
"…그날 돌아가셨어."
멍청한 할배 같으니.
자기 몸이나 추스르라니까.
다시 스르르 눈이 감겼다.
사흘을 누워 있었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피곤하지.
다시 눈을 떴을 땐 가족들도 와 있었다.
"또 사흘이 지났어?"
최수영이 답했다.
"응? 무슨 소리야. 삼십 분도 안 지났어."
동생 김성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일어났네? 밥 먹고 왔더니 오빠 깨어났다고 하더라고."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렸다.
"몸은 좀 괜찮니?"
"네, 괜찮아요."
몸을 일으켜보았다.
어?
별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상체를 일으킬 수 있었다.
그제야 몸 상태를 좀 살펴보았다.
온몸 구석구석에 내력이 가득 차 있는 느낌.
팔다리를 움직여보았다.
물을 채운 풍선처럼, 내 몸 안의 내력은 자연스럽게 움직임과 동화되었다.
근육이 몸을 움직이는 건지 내력이 몸을 움직이는 건지도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동화되어 있었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은 이른 저녁이었는데, 창밖 하늘에 붉은 별이 하나 보였다.
잘못 봤나 싶어 눈을 한번 감았다 떴더니 붉은색 별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천마 할배, 큰 선물을 주고 갔네."
* * *
며칠 후, 메타디펜스 워프실.
"안녕히 가세요."
마법진 위에 천마신교의 세 장로가 서 있었다.
레온이 말했다.
"지금 블랙 게이트가 나타난 곳과 가까운 마법진으로 이동시켜드릴 거예요. 워프된 후에 해가 뜬 쪽으로 조금만 가면 게이트가 보일 거예요."
밝은 빛이 세 장로를 감쌌다.
장로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쯤, 추멸염화 장희철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사현관 타통을 축하한다, 김수호."
천마신교 장로들을 보내준 후 트레이닝 센터로 향했다.
검술 훈련을 위해 무기 거치대에 있던 검 하나를 끌어당겼다.
검은 순식간에 내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검술 교관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대표님! 지금 염동력 장갑 안 끼고 계시잖아요? 분명 맨손인데?"
"네, 하하. 이게 허공섭물이라는 기술이에요. 이제 염동력 장갑은 끼고 다닐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언제 또 그런 경지에. 대단하십니다."
"제가 뭘 한 건 아니고요. 선물 받은 거예요."
짧은 경보음이 울렸다.
스피커에서 울리는 경보음의 파장이 예민해진 감각을 통해 생생하게 느껴졌다.
트레이닝 센터 벽면 대형 스크린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A급 화이트 게이트 출현. 경기도 포천시 포천힐즈 골프장. 1팀 출동 요망.]
트레이닝 센터 한쪽에서 꽝이와 놀고 있던 스테노가 경보음을 듣고 나에게 달려왔다.
오늘은 하늘거리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수호, 어디야? 이번엔 어느 나라로 가는 거야?"
"아쉽게도 다른 나라는 아니야. 헬기 타고 갈 거야."
"그래? 그래도 일단 따라가야지. 호호호."
1팀 팀원들을 나눠 태운 헬리콥터 세 대가 포천으로 향했다.
송우리를 지나 북동쪽으로 조금 더 가자 저 멀리 게이트가 보였다.
페어웨이 위에 지름이 30미터 가까워 보이는 대형 화이트 게이트가 나타나 있었다.
골프장 여기저기에는 이미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 실장님, 몬스터 생김새를 보니 행성 094와 이어진 게이트겠네요."
- 그렇습니까? 게이트 크기는요?
"A급은 확실히 넘어요. 꽤 크네요."
* * *
2월 9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39,491개]
[단가 67억 원]
[평가 금액 264조 6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