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 * *
“예전에 무림인들이 지구에 넘어와서 러시아 군대를 계속 쳐부수며 남하하다가 사라졌다는 뉴스는 보았는데, 그런 자들이 또 많이 있다는 말입니까?”
메인 뉴스만 챙겨보는 모양이다. 그게 천마라는 무림인이고, 한참 동안 한국에서 나와 함께 지냈다는 건 여기저기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엘리엇은 프랑스 대표 헌터임에도 천마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많진 않겠지만, 분명히 있긴 있어요. 근데 겉모습만 봐서는 누가 그럴 위인인지 알 수 없으니 일단은 시비가 붙으면 안 된다는 얘깁니다. 여기 사람들은 말도 못 하게 호전적이거든요.”
왜인지 프랑스 헌터 엘리엇의 표정이 묘했다.
“어쨌든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차 한두 대쯤이야 저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조금 전 묘한 표정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프랑스 대표 헌터인 자신이 제2 부대와 함께 이동하고 있는데 내가 자꾸 무림인들과 시비가 붙으면 안 된다고 말하니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대위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제가 아는 무림인도 몇 있고, 한번 왔던 곳이라 지리도 익숙하니 여기선 우리 제5 부대가 앞장서는 게 어떻겠냐고 제2 부대장님에게 한번 여쭤봐 주시겠어요?”
순간 엘리엇의 한쪽 눈 밑이 아주 잘게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네, 부대장님께 여쭤보고 무전 드리겠습니다. 도움 감사합니다.”
엘리엇과 대위는 다시 차를 타고 제2 부대 쪽으로 떠나갔다.
행성마다 한 부대씩 남아야 하는 임무 특성상, 지구방위위원회에서는 특이한 지휘 체계를 만들었다.
5개 부대를 총괄하는 별도의 총지휘관은 없다.
대신 처음엔 제1 부대장, 그다음엔 제2 부대장.
이런 식으로 가장 선행 부대의 부대장이 해당 행성에서의 총지휘를 맡고, 그 행성에 남는다.
제1 부대가 행성 055에 남은 지금, 총지휘권은 방금 왔던 자들이 속해 있는 제2 부대에 있었다.
멀어지는 그들의 차를 보며 최수영이 옆에 와서 물었다.
“저 금발 머리 헌터, 자존심이 좀 세 보이네?”
“응. 자기가 무림인들한테 절대로 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런데 과연 우리 부대를 맨 앞으로 보내줄까?”
“안 보내주면 어쩔 수 없고. 이 정도 규모의 이동이면 천산 가기 전에 분명히 한두 번은 부딪칠 텐데.”
“어휴, 당연히 부딪치지. 무림인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우리 제5 부대도 마지막 행성에 정착하려면 병력을 아껴야 하는데 맨 뒤에 있으면 그것도 그것대로 좋지 뭐.”
스테노가 옆으로 다가왔다.
“공룡 행성보단 덜하긴 한데, 여기도 너희 지구보단 공기가 맑다.”
“응, 스테노. 나도 다 돌아봤지만, 공기가 그렇게 탁한 행성은 지구뿐이야.”
“지구만 그런 거였어? 내 친구들, 아주 혹독한 행성에서 살고 있었구나.”
그러고 보니 그랬다.
지구는 가장 편리하지만, 환경은 가장 좋지 않은 행성이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자 해가 완전히 넘어간 밤하늘에 어느새 셀 수없이 많은 별이 뿌려져 있었다.
이제 지구에서 보이는 별 대부분이 인공위성이라는 얘기도 있던데, 새삼 이곳의 별들은 참 많고도 밝았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전 부대는 해가 떠오른 쪽을 등지고 이동을 시작했다.
정민우 상병이 화물 트럭의 안 쓰는 의자를 세 개 떼어다가 아예 전술 차량 지붕에 설치해 주었다.
강철판에 구멍을 뚫어 볼트와 너트로 단단히 의자를 고정해 둔 걸 보니 고생 좀 했을 것 같았다.
덕분에 우리 셋은 더 편안하게 전술 차량 지붕에 앉아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스테노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나무도 푸르고, 숲도 울창하고. 날씨도 좋고 다 좋은데.”
“좋은데?”
“이상하게 오늘은 여행하는 기분이 안 들어.”
최수영이 물었다.
“언니, 어젠 여기 갇힌 기분이라 기분 나쁘다면서요. 그럼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움직이니 좀 낫긴 한데, 영 느낌이 이상해.”
“오빠는? 오늘도 마나가 흐르지 않아?”
“응. 오늘도 마찬가지네.”
“난 사실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두 사람이 그렇다니 뭐가 있긴 있나 보다.”
그렇게 한 시간쯤 이동했을까.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우리 갇힌 것 맞는 것 같다.”
“응? 뭐가 느껴져, 오빠?”
“저 바위. 특이한 모양이라 기억하는데, 아까도 봤어. 그런데 바위 주변 풍경은 또 바뀌었어.”
나는 검기를 뿌려 특이한 모양의 바위에 작은 흠집을 내었다.
그 뒤로도 큰 나무나 눈에 띄는 지형지물에 검기로 표시를 해두었다.
삼십 분 후.
“오빠! 저기.”
최수영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아름드리나무에 얇은 칼자국이 나 있었다.
내가 만든 자국이었다.
“저거 분명히 아깐 왼쪽에 있었던 나무야. 이번엔 오른쪽에 있네.”
“저기도! 저기 큰 돌멩이에도 자국 있어.”
“스테노 말이 딱 맞았네. 잠깐 여기 앉아 있어. 나 맨 앞 지휘관 차에 좀 다녀올게.”
맨 앞으로 날아가기 위해 무심코 발밑의 마나를 운용했다.
마나는 움직여주지 않았다.
“뛰어갔다 올게.”
차에서 내려 맨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사실 날아가는 것과 속도는 별반 차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두를 따라잡았다.
맨 앞선 전차 앞으로 가 길을 막아섰다. 천천히 속도를 줄이던 전차의 무한궤도가 완전히 멈추어 섰다.
“출발하지 말고 여기서 잠깐 대기하세요. 사령관님과 얘기할 게 있습니다.”
다시 뒤쪽으로 몇 대의 전차와 장갑차를 지나가자 지휘 차량이 보였다.
차 문이 열리고 덩치 큰 흑인이 내렸다. 가슴엔 여러 훈장이 달려 있었고 어깨 위엔 은빛 나뭇잎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이름표엔 제임스라고 적혀 있었다.
“제임스 중령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김 헌터님. 무슨 일입니까.”
“우린 지금 어딘가에 갇힌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변에 계속 같은 지형지물들이 위치가 바뀌며 나타납니다. 그래서 제가 검으로 여기저기 표시해 두며 지나왔는데, 저기 보시죠.”
내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작은 상처가 나 있는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아까 지나가면서 표시해 둔 나무입니다. 그런데 지금 또 나타났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일종의 진법 같은 데 걸려든 것 같습니다.”
“산길이 너무 길다는 생각은 했습니다만.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도 진법에 대한 지식은 없어서. 일단 뭐 때려 부숴야 하지 않을까요?”
* * *
한 사내가 다급히 제갈세가의 내원으로 뛰어 들어왔다. 푸른 의복을 입고 있었고, 허리춤엔 기다란 검을 찬 상태였다.
가주와 차를 마시고 있던 제갈문이 물었다.
“무슨 일이냐?”
“어젯밤, 진법이 발동되었습니다!”
제갈문이 벌떡 일어났다. 어찌나 급히 일어섰는지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한참을 날아가 버렸다.
가주는 제갈문과 달리 경거망동하진 않았다. 하지만 찻잔을 들고 있는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제갈문이 외쳤다.
“그게 무슨 소리냐! 아직 무당파 장문인은 섬서에 있지 않느냐!”
“네, 아직 전진교와의 전투가 끝나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진법을 발동시키다니! 남은 무당파 놈들이 산에서 내려오기라도 한 것이냐! 어느 놈이 진법을 발동시킨 것이야!”
“아닙니다. 저희가 발동시킨 게 아니오라, 저절로 발동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우리가 일부러 발동시키지 않는다면 무당파 놈들 전원이 한 번에 발을 디뎌야 발동이 될까 말까 한 거대한 진법이다.”
“원인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진법이 발동된 것은 사실입니다.”
가주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가 제갈문에게 물었다.
가주 제갈명은 제갈문의 첫째 형이었다.
“문 장로. 육십사진이 발동되면 우리 말고 무당파에서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겠지?”
“워낙 강한 진법이라 이미 가동이 된 이상 무당파에서 눈치채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내부의 공간이 뒤엉키면서 그 영향이 곧 밖으로 퍼져 나올 것입니다.”
가주 제갈명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큰일이군. 무당파에 큰 명분을 주게 된 꼴이야. 무당파 장문인이 돌아오면 전진교 다음은 우리 제갈세가 차례가 될 터. 어찌해야 좋겠는가.”
“가주님도 아시다시피 전면전으로는 무당파를 당해 내기 어렵습니다. 장문인 혼자 쳐들어와도 우리 세가는 끝장… 아니. 위험합니다.”
제갈세가의 장로이자 가장 뛰어난 책사인 제갈문의 머리가 바삐 돌아갔다.
무당산 아래 진법을 펼쳐놨다는 사실은 무당파에서도 곧 알게 될 것이다.
무당파의 장문인과 장로들이 섬서에서 돌아온다면 곧장 제갈세가에 진법을 설치한 연유를 물을 터.
그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자신들을 해치기 위해 함정을 팠다며 당장 이곳으로 쳐들어올 것이다.
이제 와서 장문인과 장로들을 유인할 새로운 육십사진을 만들어 낼 시간도 없었다.
그렇다고 어중간한 팔진, 십육진으로 그들을 상대하려 했다간 오히려 화만 돋우게 될 것이 뻔한 일.
도무지 방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겉으로만 도사인 척 고상한 체하는 무당파를 밀어내고 호북 땅의 주인이 될 절호의 기회였는데.
모두 제갈문 자신 때문이었다.
비밀 서고의 육십사진을 드디어 완성했다고 들뜨지만 않았더라도.
가주에게 이제 무당파를 호북에서 밀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않았더라도.
그랬다면 오늘 같은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가.
무림맹이 무너졌을 때부터?
자신이 육십사진의 비밀을 풀어냈을 때부터?
“우선 남궁세가에라도 도움을 요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바로 육십사진에 들어가 살펴보겠습니다.”
“남궁세가가 그 정도로 우리와 살가운 사이도 아니거니와, 지금은 모산파와의 전투로 우릴 도울 여력이 없을 것이다. 무림맹이 무너진 이후, 전 무림이 여기저기서 전쟁 중인 시기 아닌가.”
“제가 어떻게든 무당파 장문인이 돌아오기 전에 상황을 수습해 보겠습니다.”
제갈문이 가주에게 포권을 취한 채 서둘러 내원을 빠져나갔다.
내원을 완전히 빠져나가기 직전, 제갈문의 등 뒤에서 가주 제갈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장로, 아니. 문아.”
제갈문이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첫째 형이 가주가 된 이후 처음 듣는 호칭이었다.
제갈문이 뒤로 돌았다.
“예, 가주님.”
“네 탓이 아니다. 우리 모두 잘해 보려고 머리를 싸맨 것이 아니냐. 어차피 언제까지 무당의 그늘에서 웅크리고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사안이 좀 큽니다. 무당파가 절대로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수습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가주.”
“문아.”
“…예, 형님.”
“아무리 너라 한들 이미 가동된 육십사진에 접근하는 건 위험하다.”
“하지만 제가 아니면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알았다. 몸 조심하거라. 나도 이 사태를 수습할 방법을 찾아보고 있으마.”
“예, 형님.”
제갈문은 진법에 밝은 제자 몇과 함께 무당산 동쪽 입구에 다다랐다.
“이런… 정말 진법이 발동되었구나.”
제자 하나가 물었다.
“팔진을 여덟 번 엮어 만든 진법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들어갔기에 스스로 작동을 시작했을까요?”
“모르지. 어쩌면 내가 육십사진을 잘못 설계했는지도 모르겠구나. 확인에 확인을 수백 번도 더 했음에도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어쩌실 계획이십니까?”
“너희들은 진법에 밝은 이들을 추려서 각 팔진의 어귀에서 대기하라. 내가 안으로 들어가 보겠다.”
“스승님! 위험합니다! 안에 들어가시면 아무리 스승님이라 해도 빠져나오시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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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4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9,220개]
[단가 67억 원]
[평가 금액 61조 8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