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 * *
“그래도 가야 한다. 무당파 장문인이 돌아오기 전에 이 진법을 해체해 내야만 한다. 어떻게든 해체하고 진법 실험 중에 벌어진 일이라고 둘러대야 한다.”
“무당에서 그 말을 믿어줄까요?”
“아니. 믿어줄 리 없지. 아마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칠 게다. 하지만 해체조차 하지 못하는 날에는 무당의 손에 우리 세가의 명맥이 완전히 끊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혼자 들어가시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저희도 함께하겠습니다.”
“밖에서 진법을 돌봐줄 이도 필요한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 가주님도 이미 어떻게든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셨을 것이다. 여기 들어가서 진법을 해체하는 건 온전히 내가 해야 할 몫이다. 이미 가동된 이상 밖에서는 진법을 해체할 수 없다.”
여덟 개의 기물을 팔방(八方)에 설치해 강력한 진법을 가동하는 제갈세가 고유의 진법, 팔진.
그 팔진을 두 개 엮어서 만든 것이 십육진.
팔진과 십육진만 하더라도 기문진법으로는 무림 전체에 제갈세가를 따라올 세력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제갈문의 설계에 따라 이곳에 설치된 기문진법은 육십사진.
여덟 개의 기물로 이루어진 팔진을 여덟 번 겹치고 꼬아 만든 진법. 진법을 위해 사용된 기물만 예순네 개였다.
아무리 직접 설계한 제갈문이라고 하여도 들어갔다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다는 보장을 하기 힘든 진법이었다.
하지만 제갈문은 제갈세가의 생존을 위해 이 진법을 해체해 내야만 했다. 반드시.
“다녀오마.”
근처의 나무와 바위 위치를 면밀히 살피던 제갈문이 이윽고 한 방향으로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다섯 걸음 정도를 내딛자 제자들의 시야에서 제갈문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 * *
“정말이군요. 아까 표시해 둔 자국입니다.”
차로 한참을 더 달린 후에야 제임스 중령이 내 말을 믿기 시작했다.
프랑스 헌터 엘리엇이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우리가 계속 같은 곳을 빙빙 돌고 있는 것 같다는 말씀이지요?”
“그런 것 같습니다. 얼핏 보면 주변 풍경은 계속 변하고 있는데, 저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는 계속 그 자리네요.”
내 손가락을 따라 사령관과 엘리엇이 저 멀리 있는 돌산을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계속 보아왔던 그 봉우리가 맞습니다. 김 헌터님,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건 저도 모르죠. 이렇게 전 부대가 계속 이동하는 건 의미가 없을 테니 이곳에 다시 진을 치고, 수색대를 파견해 수상하거나 특별한 점을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당장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다시 제5 부대의 진영으로 돌아왔다.
최수영이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해?”
“모르겠어. 일단 수색대를 좀 보내보라고 했어. 우리도 주변을 좀 둘러보자.”
잠시 후, 부대별로 하나씩 네 팀의 수색조가 사방으로 정찰을 떠났다.
다행히 나침반은 작동되어, 수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주변 풍경이 바뀌어 길을 잃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들과 별개로 우리 일행도 동쪽으로 수색을 나가보기로 했다.
“오다가 길을 잃을지도 모르니까 동쪽으로만 쭉 가보자. 돌아올 땐 서쪽으로 오면 될 테고. 꽝이 너도 여기선 마음대로 돌아다니면 안 돼.”
다른 때 같으면 이미 어깨에서 내려와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나타나고 싶을 때 나타났을 텐데, 꽝이도 이상한 걸 느꼈는지 내내 내 어깨 위에 앉아 있었다.
“애옹―”
“뭐 빠져나가는 방법이 있겠지? 여기 완전히 갇혀버린 건 아닐 거야, 그렇지?”
최수영의 물음에 스테노가 답했다.
“빠져나가야지! 내 여행은 이제 시작이란 말이야. 수호, 뭘 찾으면 돼?”
“나도 잘 몰라. 일단 좀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걸 찾아보자. 아까 지나오면서 한두 번 느꼈어. 그때 그냥 지나치지 말 걸 그랬다.”
오른쪽은 언덕, 왼쪽은 들판.
한참을 걸어가자 어느새 언덕이 왼쪽에 와 있다.
“이 근처를 찾아보자. 마나의 흐름이 멈춰있지만 않으면 더 멀리 확인할 수 있을 텐데. 나도 직접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겠어.”
“이 근처에서 뭐가 느껴져?”
“아니. 뭐가 느껴진다기보단, 이 근처에서 풍경이 좀 급작스럽게 변하네. 그래서 뭐가 있을까 하고.”
“올, 역시 우리 오빠 똑똑해. 언니, 언니는 뭐 안 느껴져요?”
“저기 저 바위. 저거 좀 이상해.”
스테노가 가리킨 곳에는 커다란 바위가 우뚝 솟아 있었다.
“그러네.”
뭐라고 표현하기는 힘들었지만, 분명 위화감이 느껴지는 바위였다.
“저게 장치 같은 건가?”
“부숴볼까? 어떻게 되는지.”
바위에 가까이 간 후 주먹에 내력을 밀어 넣었다.
콰앙!
위화감이 느껴지던 바위가 주먹에 맞아 터져나갔다.
순간 주변의 마나가 다시 흐르는 듯하다가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멈췄다.
“효과가 있긴 한 것 같다.”
스테노가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그래? 이제 나갈 수 있어?”
“아직은 아니고. 이런 게 몇 개나 더 있고 몇 개나 부숴야 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그래? 빨리 더 찾자. 나 여기 싫어.”
그때, 왼쪽 언덕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보자 50대쯤으로 보이는 무림인이 언덕 위에서 우리 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단정한 옷을 입었고, 무림인치고는 얼굴도 흰 편이었다.
나는 가만히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어느 정도 다가온 무림인은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나는 제갈세가의 제갈문이라고 하오. 당신들이 진법을 가동시킨 모양이군. 무림인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소.”
일단 싸울 생각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도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가볍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우리는 지구에서 왔습니다. 게이트를 넘어왔는데 혹시 지금 우리가 갇혀 있는 이곳에 대해서 아십니까?”
제갈문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차원 이동문이 여기 생겼던 모양이로구나. 헌데 고작 세 명이 들어왔다고 작동되지는 않았을 터인데.”
“이곳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모양이군요. 세 명이 아니라 꽤 많은 병력이 왔습니다. 천산에 볼일이 있어서요.”
“천산? 무림인도 아니면서 그곳엔 무슨 볼일이 있는 거요? 아, 어쨌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중년인은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밝히듯 두 손바닥을 우리에게 보인 채 더 가까이 다가왔다.
“시간이 없소. 방금 파괴한 기물 때문에 곧 진법의 구조가 틀어질 거요. 그럼 나조차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게 되오.”
“당신이 이 진법과 관련이 있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내가 설계한 진법이오.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다면 서둘러야 하오.”
최수영이 앞으로 나섰다.
“왜 이런 걸 만든 거죠? 그리고 빠져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당신들을 가두기 위해 만든 건 아니라는 정도만 알면 될 것이오. 나도 가문의 존망을 걸고 만든 진법인데, 당신들이 나타난 덕분에 모든 게 틀어졌소.”
“어쨌든 당신이 설계했다니 나갈 방법도 알고 있겠군요. 그럼 빨리 우릴 나갈 수 있게 해주세요.”
제갈문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내 팔을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 기물을 파괴한 걸 보니 보통 고수가 아니시구려. 보기엔 평범한 바위 같아도 이 진법 안에서는 어지간한 내공을 담아서 후려친다고 깨어지는 그런 기물이 아니오.”
그때였다.
드드드드.
지진이 난 듯 땅이 울리기 시작하더니 어디선가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어제저녁 이 진법이란 게 처음 발동할 때 있었던 현상과 동일했다.
잠시 후 땅의 울림과 거센 바람이 멈추었다.
“벌써 진법이 틀어지기 시작했군. 정말 대단한 진법이야…….”
최수영이 물었다.
“당신이 만든 진법이라면서요? 뭘 감탄하고 있는 거예요?”
“비급을 연구해 겨우 설계를 완성했을 뿐이오. 직접 만든 것도, 심지어 안에 들어와 본 것도 처음이오. 어쨌든 지금처럼 막무가내로 기물을 부수다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모두 이 진법과 함께 가루가 돼버릴 거요.”
이제 조금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가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됩니까?”
“말이 길었군. 내 지시에 따라 순서대로 기물을 제거해야만 하오. 지금 하나가 부서졌으니 이제 예순세 개가 남아 있소. 순서를 잘 맞춰 절반 이상 제거하면 아마도 이 육십사진을 해체할 수 있을 거요.”
“저 바위 같은 걸 서른두 개 이상 없애야 한다는 거군요?”
“그렇소. 이미 진법이 틀어지기 시작한 이상, 두 시진 안에 해체하지 못하면 여기서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오.”
꽝이가 하악질을 하지 않는 걸 보니 우리를 해치려는 생각은 아닌 것으로 보였고, 말투나 태도도 꽤 진중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안 그래도 우리끼리는 이 진법이라는 걸 탈출할 방법을 못 찾고 있으니 제갈문의 말을 따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럼 어서 앞장서세요. 얘기를 들어보니 그쪽도 이 진법을 해체해야 하는 모양인데, 빨리 기물인가 하는 걸 순서대로 다 제거하시죠.”
“소협, 눈치가 빠르군. 맞소. 우리는 같은 목적을 갖고 있지. 이 진법을 해체하는 것 말이오. 자, 어서 따라오시오.”
* * *
스윽.
자신을 김수호라고 소개한 청년이 내뿜은 묵빛 검기가 기물 역할을 하고 있던 고목을 손쉽게 베어냈다.
제갈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진법 안에서 저리 쉽게 기물을 잘라버리다니.
쿵.
제갈문이 가까이 다가가 힘차게 밀어내자 잘린 나무 윗동이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가주님이라 한들 저리 쉽게 기물을 파괴하실 수 있었을까?’
제갈세가는 ‘오대세가’의 말미에 이름을 올리고 있긴 하지만, ‘구파일방’이나 다른 네 가문에 비해 뛰어난 무공을 가진 세가는 아니었다.
외부 여러 단체에서 제갈세가의 무인들은 ‘책사(策士)’의 역할로 이름을 떨쳤다.
적당히 제 몸 정도는 건사할 수 있는 무공에 타고난 명철함. 이것이 제갈세가를 지금의 위치에 있게 한 힘이었다.
제갈문은 김수호가 제갈세가의 그 누구보다도 높은 무위를 가지고 있음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소협, 아직 많지 않은 나이에 대단한 성취를 이루셨소.”
“이래저래 운이 좋았습니다. 어서 다음 기물로 가시죠. 벌써 시간이 꽤 지났습니다.”
다음 기물로 이동하는 사이 제갈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들과 함께라면 육십사진이 완전히 틀어져 버리기 전에 절반 이상의 기물을 제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가지 고민이 쉽게 풀려나가자, 제갈문의 머릿속은 다음 고민으로 복잡해졌다.
무당파.
어찌어찌 육십사진을 해체한다고 해도 이 흔적은 지울 수 없을 터.
무당파는 분명 제갈세가의 의도를 간파하고 재기불능의 상태까지 몰아갈 것이 분명했다.
고개를 돌리자 아름다운 두 여인과 웃고 떠들고 있는 청년이 보였다.
김수호.
제갈문은 반드시 저 사람을 오늘 안에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쉽지 않다면, 하다못해 객(客)으로라도 제갈세가에 잠시 머물게라도 만들어야 했다.
“어? 되돌아왔네?”
자신을 최수영이라고 소개한 여인이 소리쳤다.
“그러네. 풍경이 계속 바뀌어서 돌아오고 있는 줄도 몰랐네.”
무심코 최수영과 김수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제갈문의 몸이 순간 뻣뻣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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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4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9,220개]
[단가 67억 원]
[평가 금액 61조 8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