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 * *
“끝이다!”
유기문이 아직 공중에 떠 있는 엘리엇을 향해 태청검법(太淸劍法)을 펼쳐 내려던 순간, 그의 오랜 전투 감각이 지금 이 검식을 펼치면 안 된다는 경고를 보내왔다.
물론 공중에서 제대로 방향을 틀 수도 없는 상황인 엘리엇은 이 태청검법을 결코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기문은 펼치려던 검식을 거둬들이고 빠르게 몸을 옆으로 날렸다.
조금 전 유기문이 있던 곳에 묵빛 검기 한줄기가 지나갔다.
소름 돋을 만큼 불길하고 날카로운 기운이었다.
바닥에 내려선 유기문은 고개를 돌려 검기의 출처를 바라보았다.
이들과 비슷한 이상한 옷을 입은 청년 한 명이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 * *
노인의 검식이 펼쳐지는 모양을 보아하니 공중에 떠 있는 엘리엇은 절대로 저 공격을 피하지 못할 것 같았다.
때문에 엘리엇을 구하기 위해 검기를 쏘아 보내긴 했다.
하지만 저 노인이 이대로 검기에 맞아 죽어버리면 어쩌나 걱정한 것도 사실이었다.
우리 주둔지에 쳐들어와 군 병력과 헌터를 공격하고 있는 저 노인을 가만둘 수도 없었지만, 또한 함부로 죽여서도 안 되는 곳이 이곳 무림이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무림인을 잘못 건드렸다가 대형 문파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동안은 어떻게든 막아줄 수 있겠지만 우리가 떠나고 나면 남는 제2 부대는 그 문파의 표적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해서 일부러 기운은 짙게 하고 속도는 느리게 검기를 쏘아냈다.
다행히 노인은 검기에 맞서지 않고 피하는 방법을 택했다. 검기에 맞서려 했다면 재빨리 검기를 거둬들일 계획이었다.
눈치 없이 엘리엇이 다시 무림인에게 덤벼들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재빨리 몸을 날려 둘 사이에 내려섰다.
노인이 내 몸 이곳저곳을 유심히 살피며 입을 열었다.
“제법 쓸 만한 놈도 있었군.”
우선 정중히 포권을 취해 보였다.
“지구라는 곳에서 온 김수호라고 합니다.”
노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이 간단한 자세와 자기소개 한마디면 대부분 무림인과의 불필요한 충돌은 피할 수 있었다. 엘리엇에게도 분명히 알려주었었는데.
“나는 무당파의 장로 유기문이다.”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저희는 이곳에 무림인들과 싸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지구라면, 이곳과 다른 차원에서 온 것인가? 그 차원 이동문을 통해?”
“맞습니다.”
“무슨 목적이지?”
“얘기하자면 길지만, 이곳에 넘어오는 지구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해놓고 무슨 전쟁이라도 치를 병력을 끌고 왔군.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무당산 바로 아래 진을 꾸린 것과 사방에 보이는 이 거대한 진법의 흔적이 무엇인지 당장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때, 유기문이 내 뒤편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제갈세가의 공자와 함께 왔군. 역시 한 통속이었어. 이런 진법을 만들 수 있는 건 제갈세가 뿐이지.”
제갈평이 다급히 내 옆으로 와 섰다.
“유기문 장로님 아니십니까.”
“그래. 네가 몇째 공자님이냐?”
“넷째입니다. 이름은 제갈평이라 하옵니다.”
“설명해 보아라. 이 상황에 대해서.”
“숙부님과 진법 실험을 좀 하고 있었는데, 이 지구인분들이 갑자기 나타나시는 바람에 실험 중이던 진법이 터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보니 제갈평은 제법 패기도 있고 말도 조리 있게 잘하는 좋은 집안의 잘 배운 공자였다.
“허튼소리. 무슨 실험을 했기에 이런 어마어마한 흔적이 남았단 말이냐. 우리 무당파를 통째로 집어삼키기라도 하려던 것이 아니냐?”
“오해이십니다. 조만간 가주님과 숙부님이 오해를 풀기 위해 무당산에 오르실 것입니다.”
“흥. 허튼소리. 난 이 일에 제갈세가가 관련되어 있음을 장문인께 알릴 것이고, 제갈세가는 곧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유기문이 도포 자락을 팡 소리 나게 한번 털어낸 다음 뒤돌아 다른 두 노인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엘리엇이 다가와 물었다.
“김수호, 저들을 저대로 보낼 겁니까? 우리 전차 몇 대를 부순 자들입니다.”
“엘리엇, 죽거나 다친 사람은 없잖아요. 천산에 주둔지를 만들게 아니라면 무당 같은 거대 문파를 적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여기 남을 주둔지 병력으로는 그들을 당해 낼 수 없어요.”
“당해 낼 수 없다니요? 한 개 대대의 전차 부대인데.”
“저기 포신이 엿가락처럼 꺾인 전차를 보시고도요? 무림인들을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저런 자들이 무당산 위에 몇이나 있는 겁니까?”
“저도 잘 모릅니다. 무당파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가려는 천마신교엔 저 정도 무인이 족히 백 명은 있을 겁니다.”
“그 천마신교라는 곳이 무림에서 가장 강한 문파입니까?”
“제가 알기로는 그래요. 천마는 당장이라도 무림 전체와 천마신교가 맞붙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했으니까요. 물론 천마가 살아 있을 때 얘기였지만…….”
그때였다.
제갈평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천마가 죽었나요?”
아차, 큰 실수를 저질렀다.
제갈평의 놀란 얼굴을 보니 천마신교에서는 천마가 죽은 사실을 숨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응? 아니. 행성 여행 중이시지. 강자들을 찾아다니면서.”
“김 소협께서는 천마와 잘 아는 사이신가요?”
“제법 친분이 있지. 왜? 사파인과 친분이 있으니 제갈세가와 지구인의 상생 계획은 없었던 게 되는 건가?”
“아니요. 가주님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하셨어요. 오히려 겉으로는 의로운 척, 도사인 척하는 일부 정파의 사람들이 더 위험하다고 하셨죠.”
“도사인 척이라. 무당파를 얘기하는 것 같네.”
“없는 곳에서 다른 문파를 굳이 험담할 필요는 없으니 말을 아끼겠어요. 하지만 세간의 평가가 조금 틀렸다는 건 우리 제갈세가는 알고 있지요.”
“이미 험담은 시작된 것 같은데?”
“매월 기부금이랍시고 우리 제갈세가에 얼마나 큰 돈을 뜯어가는지 몰라요. 말이 좋아 기부금이지, 무력으로 돈을 뺏어가는 왈패 집단이나 다를 바 없어요.”
“말을 아끼겠다더니 입이 가벼운 편이구나?”
“억울해서 그렇죠. 하지만 김 소협도 천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말해 버렸으니 입이 가벼운 건 매한가지 같은데요?”
“내가? 아니라니까. 천마는 행성 여행…….”
제갈평은 내 말을 듣지도 않고 혼자 중얼거렸다.
“천마신교의 장로들만 모두 돌아왔을 때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요. 그렇게 된 거였어.”
죽여야 하나?
천마가 죽은 걸 알면 구파일방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너 잠깐 따라와.”
“네?”
“잠깐 따라와. 할 말이 있으니까.”
제갈평을 데리고 언덕 너머 숲으로 들어갔다.
“명문 세가의 공자로서 당연히 한번 한 약속은 지킬 줄 알겠지?”
“갑자기 무슨?”
“대답이나 해.”
“물론이죠. 사내의 약속은 천금, 만금과도 바꿀 수 없는 것.”
“좋아. 나랑 약속 하나 해. 천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
“제가 왜 그런 약속을 해야 하죠?”
안 그러면 널 죽일 거니까, 라고 말하려다가 더 좋은 방법을 떠올렸다.
“잘 봐.”
마그네타 검을 꺼내 천천히 양손으로 잡았다.
제갈평이 순간 놀라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너 공격하려는 거 아니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보기나 해.”
나는 반대쪽 숲을 향해 대천흑룡을 있는 힘껏 쏟아부었다.
콰과과과!
검은 용이 땅을 스치며 쏘아져 나갔다.
주변의 나무며 바위할 것 없이 모두 부수며 한참을 뻗어 나간 대천흑룡은 잘 보이지도 않는 곳까지 가서야 멈추어 섰다.
“천마가 죽었다는 소문이 무림에 돌면, 이걸 너희 세가 안채에다 몇 방이고 퍼부을 거다.”
“약속… 을 받아내는 게 아니라 지금 날 협박하는 거네요?”
“맞아. 협박.”
제갈평이 다시 대천흑룡이 쓸고 지나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요. 저 제갈평의 목숨을 걸고 약속합니다.”
“그래야지. 나도 그 대가로 너무 과하지 않은 네 부탁 한 가지는 들어줄게.”
제갈평이 대천흑룡이 휩쓸고 간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냥 협박으로 끝내도 충분할 것 같은데요?”
“협박인데, 협박 아니기도 해.”
“그럼 무당파 본진에 조금 전 그걸 날려달라고 하면 그건 과한 부탁이겠죠?”
“응. 과해.”
“그럼 됐어요. 그냥 이번 지구인들과 제갈세가의 협력이 잘 이뤄지게만 도와주세요.”
“그래서 무당파와의 싸움도 피할 수 있게?”
“네. 호북성에서 가장 재산이 많고 큰 세력을 가지고 있으면 뭐 하나요. 무당파가 마음먹고 밀고 들어오면 우리 세가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전력 차이가 크게 나? 제갈세가도 규모가 만만치 않던데.”
“안타깝게도 우리 제갈세가의 무인들은 무당파 도사들에 비하면 무력이 턱없이 부족해요. 예전부터 쭉 그래 왔죠. 다만 무당파의 장문인을 누가 맡느냐에 따라 우리와의 사이가 좋아지고 나빠지는 게 바뀌어 왔을 뿐이에요.”
“지금은 안 좋은 거고?”
“예전 무당파는 저렇지 않았다는데. 자꾸 속가 제자들이 늘어가고 그들이 성장해 요직에 들어서면서 문파의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그 대표격인 인물이 현재 장문인이고요. 우리 제갈세가에게는 완전 최악인 상황이죠.”
“그래서 이런 어마무시한 진법을 만든 거야? 무당파 장문인을 여기 가두려고?”
“…네. 이번에야말로 무당파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줄 알았는데. 장문인과 장로 몇 명만 처리하면, 다음 장문인이 될 사람은 지금 장문인과는 많이 다른 성정의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우리 때문에 진법이 발동되어 버렸고, 그 사실을 이젠 무당파에서도 다 알게 되었다?”
“네. 장문인이 돌아오고 나면 바로 이 일을 따지고 들 거예요. 어쩌면 대대적으로 무사들을 이끌고 제갈세가에 쳐들어올지도 모르죠.”
마른침을 한번 삼킨 제갈평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무당파는 대외적으로는 도사의 길을 걷고 있는 곳이에요. 때문에 제갈세가에서 대의명분을 가지고 다른 차원의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다면 섣불리 쳐들어오지는 못할 거예요. 온 무림 정파의 시선이 당분간은 이쪽을 향하게 될 테니까요.”
“게다가 우리 전력은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고 말이지? 내가 예전에 왔을 땐 무림이 이렇게 어지럽지 않았던 것 같은데.”
“무림맹이 완전히 힘을 잃었기 때문이에요.”
“아, 그 마티아스 때문이겠구나?”
“아시네요? 무림맹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떠난 마티아스와 그의 군위대. 맞아요. 그 이후로 무림이 이 꼴이 되었죠. 구심점이 없으니 각지에서 서로 세력을 불리기 위한 전쟁이 끊이질 않아요. 장로님들 얘기로는 난세도 이런 난세가 없었다고 해요.”
예전에 천마와 장로들이 한 대화가 떠올랐다.
“드디어 정파와의 대전을 벌이실 계획이십니까?”
“그건 그때 봐서. 어쨌든 무림을 하나로 묶긴 할 생각이다.”
무림맹이 무너지면 무림이 이렇게 될 걸 알고 천마가 무림을 다시 하나로 묶으려고 했었나 보다.
자기만 생각하는 안하무인 독불장군인 줄 알았더니 나름 자신이 나고 자란 무림에 대한 애정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도 갈 길이 바빠서 무림 전체를 하나로 묶어 주고 떠나진 못하겠지만, 뭐 여기 호북 땅이라도 하나로 묶일 수 있도록 도와줄게.”
“정말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김 소협!”
“주둔지로 돌아가자. 이미 회의 결과가 나왔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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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4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9,220개]
[단가 67억 원]
[평가 금액 61조 8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