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 * *
“뭣이?”
“불가능합니다. 싸움을 원하신다면 그리 명령을 내려보셔도 됩니다. 오히려 그럼 이 왕궁에서 우리 지구인들이 머물게 될 수도 있겠군요. 이곳의 주인이 바뀌게 될 테니까요.”
몰로소스의 두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건 마치 마음만 먹으면 이 왕국은 무너뜨릴 수도 있는 주변 강대국의 지도자와 대화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
이제야 올리버 중령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땅을 조금 내어달라는 부탁을 하러 오긴 했으나, 결코 이 왕국의 속국 같은 것이 될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조금 더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주둔지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리라.
몰로소스가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당장 저자들의 목을……!”
그때, 계단 아래 한쪽에 서 있던 흰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신관이 입을 열었다.
“전하. 신탁을 생각하시옵소서.”
신탁? 그것 때문에 우리를 보자고 했구나.
이곳은 신과 인간이 함께 살고 있는 세상. 왕국마다 커다란 신전이 있었고, 그곳의 신관에게서 나오는 신탁은 국가 중요사에 대한 결정을 바꾸기도 할 만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자들이 정말 신탁에 나오는 손님이라면 여기서 허무하게 죽어 나갈 실력은 아니겠지. 쳐라!”
중무장한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올리버 중령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 하나씩 잘랐다가 다시 치료해 주실 수 있으시죠?”
이미 혼자 거기까지 계산해 둔 모양이었다.
정작 나나 최수영에게는 상의 한마디 없이.
제4 부대 사령관 올리버 중령. 생각보다 능구렁이 같은 인물이었다.
그의 태도는 황당했지만 이미 벌어진 상황은 그의 말대로 할 수밖에 없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그때 마쿤쿠가 일어나 검을 빼 들었다.
“이런 일에 김수호 헌터님까지 나서실 필요 있습니까.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최수영 헌터님, 나중에 치료만 좀 잘 부탁드립니다.”
마쿤쿠는 망설임 없이 기사들 복판으로 뛰어들어 갔다.
싸움은 싱겁게 끝났다.
기사들은 철제 중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검기가 서린 마쿤쿠의 검은 그들의 다리를 아주 쉽게 베어냈다.
기사들은 마쿤쿠의 속도를 전혀 쫓지 못하고 순식간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바닥을 나뒹굴었다.
모두 다리 한 짝씩이 잘린 채였다.
몰로소스 왕이 소리쳤다.
“여봐라!”
콰앙.
알현실 앞쪽 뒤쪽 문이 거세게 열리더니 기사와 근위대가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최수영이 빠르게 몸을 날려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옆에 서 있던 신관이 놀란 눈으로 최수영의 치료 과정을 바라보았다.
놀란 건 몰로소스 왕도 마찬가지였다.
올리버 중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 다시 대화를 나눠보실 마음이 드셨습니까?”
“기사 몇 처리했다고 지금 우리 에페이로스 왕국을 상대로 협박을 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협박이 아니라, 말씀하신 신뢰를 형성하는 과정입니다.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제가 무엇으로 다른 마음을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겠습니까. 때로는 가진 힘과 능력이 바로 신뢰가 되는 법이지요.”
그때, 다시 다리가 붙은 기사들이 엉거주춤 일어나기 시작했다.
몰로소스 왕이 놀란 눈으로 신관을 바라보았다.
신관도 몰로소스 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탁에 나온 손님들이 틀림없습니다.”
몰로소스 왕이 진중한 표정으로 신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우리가 나타날 것이라는 신탁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알현실까지 들여보내 준 걸 보면 우리가 도움이 된다는 신탁이었을 것.
이대로 협상이 잘 끝나면 올리버 중령은 아마 자신의 방식이 먹혀들어 간 것으로 알겠지만, 내가 보기엔 신탁 때문에 이미 결론은 지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사이 수많은 기사와 근위대가 알현실을 가득 메웠다.
모두 우리를 향해 검이나 창을 빼 들고 있는 상태.
몰로소스 왕이 올리버 중령에게 말했다.
“이래도 내가 그대들을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올리버 중령이 답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 기사들의 다리를 베었던 우리 쪽 헌터가 마음만 먹었다면 그 왕좌까지 다가가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이!”
충성심 깊은 기사 한 명이 소리치며 올리버 중령을 향해 달려들었다.
타앙.
올리버 중령이 품 안에서 권총을 꺼내 기사의 허벅지를 쏘았다.
총알은 중갑옷을 갖춰 입지 않은 기사의 허벅지를 그대로 뚫고 지나갔다.
“멈춰라.”
몰로소스 왕이 근엄하게 외쳤다.
달려들던 기사는 쩔뚝거리며 다시 뒤로 물러났다.
“모두 물러가거라.”
허벅지에 총을 맞은 기사가 소리쳤다.
“전하! 위험한 자들이옵니다!”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물러가거라.”
뭐라 더 말을 하려던 기사는 몰로소스 왕의 굳은 표정을 보고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밀물처럼 들어왔던 병력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다시 알현실에는 소수의 인원만 남았다. 처음부터 여기 있던 기사들, 신관과 의원 몇 명.
몰로소스 왕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조금 전 검술을 선보인 검사의 실력은 대단하나, 지금껏 보고된 바에 의하면 모든 지구인이 그렇게 강한 것은 아니다. 궁 밖에 어느 정도의 병력을 배치해 둔 건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의 무례는 용납하지 않겠다. 우리 에페이로스 왕국도 그리 약소한 국력을 가진 것은 아니니.”
올리버 중령이 말했다.
“혹시 에페이로스는 이곳의 신이나 영웅들과의 원한이 있는 국가입니까?”
몰로소스 왕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조금 갸우뚱한 뒤 답했다.
“주변국들과 피할 수 없는 영토 전쟁 중에 있을 뿐. 신이나 반신들과는 악연이 없다.”
“혹 그런 상대들과 악연이 있는 것이 밝혀진다면 저희는 바로 떠날 것입니다. 범접할 수 없는 상대에게서 우리 지구인들을 보호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주변의 어떤 나라도 넘보기 힘든 나라로 만들어 드리죠.”
“고작 몇백 명 넘어온 모양인데, 무슨 수로?”
올리버 중령은 높게 뚫린 창 너머 보이는 그리 크지 않은 산봉우리 하나를 가리켰다.
“오늘 안에 저 산봉우리의 높이가 절반이 될 것입니다. 그걸 보고 내일 다시 얘기하시죠. 에페이로스와 지구 재외공관의 동맹에 대해서. 그럼 저희는 오늘은 물러나겠습니다.”
몰로소스 왕이 별다른 언질을 주지 않았음에도 올리버 중령은 일행들에게 손짓한 후 뒤로 돌아 알현실을 나서기 시작했다.
뒤에서 몰로소스 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초에 작은 마을을 위한 작은 토지를 부탁하러 찾아온 것은 아니었군.”
올리버 중령이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동등한 입장에서의 동맹을 논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알현실을 나선 후 나는 올리버 중령에게 물었다.
“이 행성에 관한 공부를 좀 해오신 모양이군요?”
“여기뿐 아닙니다. 각 행성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익혀두었습니다. 어디에 주둔하게 될지 모르니.”
“하지만 이렇게까지 강경책을 펼칠 필요가 있었을까요. 말 그대로 작은 영토만 빌리면 되는 일인데요.”
“신과 몬스터가 공존하는 행성이라고 하지만, 일부 영웅이나 반신을 제외하고는 그냥 평범한 인간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제 철기를 조금 다루기 시작한 수준이지요. 저들의 군대가 수만이라 한들 우리 전차 부대의 상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지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뭐, 총사령관님이시니 알아서 하세요. 하지만 아까처럼 저나 최수영 헌터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을 미리 만들 거면 반드시 사전에 상의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아. 그리고 어쨌든 이곳에 남을 건 제4 부대이니 딱히 간섭하고 싶진 않지만, 여긴 그렇게 호락호락한 행성이 아닙니다.”
올리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미국이라는 대국에서 승승장구해 온 장교일 테지. 상관을 제외하고는 어디서 무시를 당해본 적도 없을 것이고.
하지만 지나치게 자신감 넘치고 강경한 저 태도는 언젠가 이 사내에게 큰 위협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쾅! 콰앙!
숙소로 돌아와 쉬고 있는데 난데없이 포격 소리가 들려왔다.
알현실에서 가리켰던 산봉우리에 포탄을 날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포격은 10분 조금 넘게 지속되고서야 멈췄다.
“아무래도 너무 요란스러운데.”
숙소 텐트를 함께 쓰는 운전병 정민우 상병이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사령관 말이야. 지고 들어가기 싫은 건 이해하겠는데 너무 요란스러워.”
“그러게 말입니다. 아까 들어보니 뭐 지금 위력 시위로 산봉우리 하나를 없애고 있다던데요.”
“그러니까. 너무 요란하면 불청객이 끼어드는 법인데.”
다음 날 아침 일찍 우리는 다시 왕궁을 방문했다.
어제와 같은 알현실로 안내되었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몰로소스 왕이 왕좌에 앉아 있었다.
중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안내해 주는 위치까지 간 후 올리버 중령이 창밖을 가리켰다.
“보셨습니까?”
“보았다.”
“저 정도면 우리 지구인들이 에페이로스 왕국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 물론 정복 전쟁에 우리가 함께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나라에서 에페이로스 왕국을 함부로 넘보지 못하게는 만들 수 있겠죠.”
“그렇군. 좋다. 우리 왕국에 머무는 것을 허가하지. 그 과정에서의 자세한 내용은 의원회와 논의하도록.”
“감사합니다.”
“마침 며칠 후 정기 의원회가 있을 예정이니 거기에 참석해 세부 사항을 조율하도록 하라.”
“저희에게 내어주실 토지는 어디입니까?”
“궁정 동쪽 비옥한 들판을 내어주겠다.”
“전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 * *
지구인들이 나간 후 신관이 물었다.
“전하, 기왕 한배를 타기로 한 마당에 그리 차갑게 대하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저 올리버라는 지도자는 늑대 같기도 하고 사자 같기도 한 자이다. 조금이라도 틈을 더 내어주면 우리 왕국 머리 꼭대기에 오르려고 하겠지.”
“도적이 무서워 사자를 마을에 들인 격이로군요.”
“어쩔 수 없지. 신탁대로라면 우리 에페이로스에 꼭 필요한 인물인 것을. 사자 울타리를 잘 단속할 수밖에.”
마침 의원 두 명이 알현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천둥 치는 소리를 내며 산봉우리를 무너뜨린 지구인들의 무기는 확인되었느냐.”
“일대 목격자들을 수소문한 결과, 그들이 타고 다니는 금속 마차에서 불을 뿜으며 굉음을 내자 산봉우리가 터져나갔다고 하옵니다.”
“역시 신탁이 맞는 게 확실하다. 그 말 없이도 움직이는 마차가 우리 에페이로스의 운명을 바꾸게 될 것이야.”
신관 베일로가 왕좌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이 모든 게 신탁을 가벼이 여기지 않으신 몰로소스 전하의 현명함 덕이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에페이로스는 더욱 강력한 왕국이 될 수 있을 것이옵니다.”
몰로소스 왕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그럼 더 이상 강물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군. 헤토스 의원, 요즘 브루티인들과 루카니아인들의 동향은 어떤가.”
“공화정의 힘을 등에 업고 마그나 그라이키아를 더욱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제야 강을 넘을 때가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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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208,300개]
[단가 67억 원]
[평가 금액 1,395조 6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