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 바다의 신 포세이돈 】
대륙 서쪽 끝, 황금 사과 정원.
에우리알레는 언제나처럼 미루나무에 기대어 앉아 평화로운 동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가 항상 기대고 있던 느릅나무는 오늘도 비어 있었다.
“멍청한 헤스페리데스 자매들. 헤라클레스에게 황금 사과를 뺏긴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이렇게 스스로 나무가 되었담.”
에우리알레는 스테노의 말투를 흉내 내며 혼자 언니와의 마지막 대화를 중얼거렸다.
“내 말이. 황금 사과는 결국 아테나 여신에 의해 다시 이 동산으로 돌아왔는걸.”
이번엔 자신의 말투.
그때였다.
“에우리알레!”
언니와의 대화를 곱씹고 있으니, 마치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에우리알레!”
“응?”
그제야 에우리알레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앞에는 뱀처럼 찢어진 입을 활짝 열고 웃고 있는 언니, 스테노가 서 있었다.
“언니!”
에우리알레가 벌떡 일어나 스테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두서없이 자신의 감정을 쏟아냈다.
“영영 안 돌아올 줄 알았어. 언니, 나 너무 외로웠어. 이 저주받을 두 눈동자만 아니면 벌써 언니를 찾아 나섰을 텐데. 이 동산을 벗어날 엄두도 나지 않았어. 미안해. 그리고 돌아와 줘서 고마워.”
언니에 대한 그리움과 혼자 남아 평생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제야 펑펑 쏟아지는 눈물과 함께 그 무섭고 불안한 감정들이 에우리알레의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에우리알레는 언니가 눈에 쓰고 있는 이상한 물건이 보였다.
“그런데 눈에 쓰고 있는 그건 뭐야?”
“잠깐만.”
스테노는 대답 대신 들고 온 캐리어의 지퍼를 열고 뒤집어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쏟아냈다.
여러 가지 모양을 한 수십 개의 VR 선글라스와 다양한 색감의 하늘하늘한 원피스들, 예쁘지만 발이 편안한 신발들이 땅에 한가득 떨어졌다.
“이게 다 뭐야?”
“에우리알레! 이제 우리도 여행을 다닐 수 있어!”
스테노는 허리를 숙여 에우리알레에게 가장 잘 어울릴법한 VR 선글라스를 하나 집어 전원을 켰다.
그리고는 에우리알레의 눈에 씌워주었다.
깜짝 놀란 에우리알레가 물었다.
“이게 뭐야?”
“이걸 쓰면, 마음껏 세상을 돌아다니며 구경할 수 있어. 내 친구가 만들어 준 거야.”
“이걸 쓰면… 여행을 할 수 있다고?”
“응! 원리는 들었는데 복잡해서 잊어버렸고, 아무튼 이걸 쓰면 아무도 네 앞에서 돌이 되지 않아.”
“…돌이 되지 않아? 나랑 눈이 마주쳐도?”
“그렇다니까!”
에우리알레가 황금 날개를 펼치고 동산 위로 날아올랐다
깡, 깡!
청동 손바닥을 맞부딪치자 동산에 있던 동물 몇 마리의 고개가 에우리알레에게 돌아갔다.
에우리알레는 동물들과 눈을 마주쳐 보았다.
“언니! 돌이 되지 않아!”
“그렇다니까. 신기하지? 나 그거 쓰고 여행 엄청 했어. 이제 너도 함께하자.”
“세상에. 막내도 살아 있었으면 무지 좋아했을 텐데. 그런데 이건 어디서 난 거야? 친구가 만들어줬다고? 대장장이 친구를 사귀었어?”
“대장장이보단 훨씬 멋지지.”
“그 친구는 어디 있는데?”
“여기서 멀지 않은 곳. 가자, 소개해 줄게.”
“정말 황금 사과 동산을 벗어나도 괜찮은 거야, 이제?”
“그렇다니까.”
깡, 깡, 깡!
에우리알레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그런 에우리알레를 바라보던 스테노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는 바닥에서 빨간색 꽃무늬 원피스를 집어 들고는 입으며 말했다.
“너도 인간의 몸으로 변신한 다음 이 옷 입어. 지금 모습으로 여행했다간 눈 안 마주쳐도 다 도망갈 거야. 여행엔 이 모습이 더 편하더라고.”
“언니, 그 모습 오랜만이네?”
“응. 나도 처음엔 어색했는데 어느새 이 모습이 더 익숙해.”
땅으로 내려선 에우리알레도 모습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 있는 수백 마리의 보라색 뱀이 찰랑거리는 보라색 머리칼로 변함을 시작으로 에우리알레도 스테노처럼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는 새하얀 원피스를 골라 입었다.
“어때, 언니?”
“여신 같아.”
“우리 여신 맞잖아.”
“그건 그래.”
스테노는 바닥에 쏟아냈던 선글라스와 옷가지들을 다시 캐리어에 주워담고 나무 그늘에 잘 세워두었다.
“이제 가자, 내 친구한테.”
“아직도 믿기지 않아, 언니. 여행이라니. 나 언니가 돌아오지 않을까 봐, 평생 여기서 혼자 이렇게 지내야 할까 봐 얼마나 걱정했다고.”
“너무 재밌어서 빨리 못 돌아왔어. 미안해.”
깜짝 놀란 에우리알레가 스테노를 쏘아보았다.
“재밌어서? 그럼 더 빨리 돌아올 수도 있었다는 말이야?”
“응.”
“근데 이제 왔단 말이야?”
“응. 미안.”
“너무한 거 아니야?”
“그러게. 미안. 하하핫.”
“그 이상한 웃음소리는 또 뭐야.”
“귀여운 친구한테 옮아버렸어. 하하핫.”
스테노와 에우리알레는 가벼운 마음으로 동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스테노는 당장 날아서 김수호에게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제 여행 첫발을 내딛는 에우리알레를 위해 하루 이틀 정도는 걸어서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오후, 오케아노스 강 상류.
“여기서 강을 건너가자. 변신할 땐 원피스 안 찢어지게 조심해.”
“응. 이 옷 예쁘고 엄청 편하다. 어떻게 이런 옷감이 다 있지? 비단도 아니고.”
“명품이라 그래.”
“명품? 그게 뭔데?”
“그런 게 있어. 비단보다 훨씬 비싸.”
둘은 원피스를 조심스레 벗어두고 다시 괴물의 모습으로 변했다.
“변한 김에 이제 좀 날아서 이동하자. 내 친구가 기다려.”
“재밌게 여기저기 여행하고 노느라 나한텐 늦게 와놓고?”
“하긴. 가면 또 재외공관인가 뭔가 만든다고 좀 지루할 수도 있어. 어디 있는지 뻔히 아니까 급하게 가지 않아도 되겠지. 강 건너면 다시 걷자.”
오케아노스 강을 건넌 둘은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채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스테노는 김수호에게 빨리 돌아가고 싶긴 했지만, 지금껏 혼자 불안에 떨며 자신을 기다렸을 동생 생각에 천천히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둘의 모습이 숲 사라지고 잠시 후.
강물 위로 한 여인의 머리가 올라왔다.
상반신은 아름다운 여인의 것을 하고 있지만 하반신은 물고기이고 등에는 벌새의 날개가 달린 님프. 세이렌이었다.
다른 세이렌들이 스테노를 찾아 이곳저곳 차원을 이동하며 돌아다니는 사이, 이곳 오케아노스 강에서 에우리알레를 감시하고 있었던 세이렌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스테노가 돌아왔어! 포세이돈 님께 알려야 해!”
다시 강물 속으로 들어간 세이렌은 빠른 속도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 * *
며칠 후, 에페이로스 왕국 정기 위원회.
“지구인들에게 궁전 동쪽 영지 사용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비옥한 땅이니 농사를 짓기도 좋을 것입니다.”
올리버 중령이 물었다.
“크기가 얼마나 되는 땅입니까?”
“100데카르는 가뿐히 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충분하군요.”
1데카르는 1,000제곱미터. 100데카르면 가로세로 10킬로미터 정도 되는 땅의 크기였다.
무엇보다 고대 그리스의 단위까지 공부해 온 올리버 중령도 대단하긴 했다.
지는 걸 싫어하고 막무가내 성향이 있긴 하지만 준비성은 철저한 인물이었다.
“많진 않지만 건물도 조금 있으니 보수해서 사용하시면 될 겁니다.”
“근처에 수원은 있습니까?”
“왕궁 뒤로 지나가는 개울이 그 땅으로 이어집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거주하시기 정말 좋은 환경입니다.”
“좋습니다. 오늘부터 바로 진지 공사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지구인분들은 이만 가보셔도 좋습니다.”
사령관을 비롯한 지구인들은 모두 위원회장을 나섰고, 나와 최수영도 밖으로 나와 한가로운 도시 길을 걸었다.
“오빠, 이번 행성에서도 재외공관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네.”
“응. 주변국들과 전쟁을 좀 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에페이로스 왕국 정도면 훌륭한 입지야.”
“이제 테라 행성 하나 남은 건가? 거기 가면 폴이랑 에릭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거기야말로 이제 마지막 일정이니까, 만나고 돌아가면 되지. 나도 궁금하다. 키르칸 마을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아! 그러네? 거기가 마지막이니까 이제 그냥 우리끼리 돌아다니다 지구로 돌아가도 되겠구나?”
“필라르랑 세르히오도 보고 싶네. 잘 지내나 몰라.”
“유쾌한 커플. 하하핫.”
그때였다.
웅, 웅.
재킷 안쪽에서 마치 전화라도 온 듯 진동이 울렸다.
“무슨 소리야? 오빠, 전화와? 여기서 전화가 돼?”
“휴대폰이 아니야.”
재킷 안주머니에서 스테노가 준 황금 깃털을 꺼내 들었다.
웅, 웅.
황금 깃털이 잘게 진동하고 있었다.
“언니가 준 깃털이네? 무슨 일이지?”
“스테노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거 아니야?”
“어서 가보자! 방향 찾아봐.”
허공섭물로 깃털을 공중에 띄운 후 최대한 내력을 줄이자 깃털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가보자, 수영아.”
* * *
“도망쳐, 에우리알레. 넌 이 일하고 상관없으니까 이 자릴 벗어나기만 하면 괜찮을 거야.”
“언니를 두고 어떻게 도망가. 도대체 어디서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워낙 먼 곳이라 안 걸릴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을 저질렀냐고!”
“카리브디스를 돌로 만들어버렸어.”
“뭐? 카리브디스? 포세이돈의 딸 카리브디스? 그래서 지금 저 괴물들이 우리를 잡으러 온 거야?”
“그런 것 같아. 쟤네 포세이돈 부하 맞지?”
“세상에… 언니 미쳤어? 포세이돈이 자식들 끔찍이 아끼는 거 몰라? 도대체 언니랑 바다에 사는 카리브디스랑 부딪칠 일이 뭐가 있는데?”
“아는데… 우선은 안 걸릴 것 같았고, 그리고 걸린다 해도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땐 내 친구가 위험했으니까.”
“미쳤어, 진짜!”
에우리알레가 붙잡고 있던 스테노의 팔을 놓고 변신하기 시작했다.
아름답게 찰랑거리던 보랏빛 머리카락이 보라색 뱀으로 변해 갔다.
“잘 생각했어. 날아서 도망쳐, 에우리알레.”
“뭐래. 누가 도망쳐. 막내 메두사를 그렇게 잃은 날이 아직도 생생해. 언니도 빨리 변신해. 우리 둘이면 저놈들 충분히 상대하고도 남잖아.”
“그다음이 문제지. 그러다 너까지 포세이돈한테 쫓겨.”
“상관없어. 그럼 언니랑 같이 도망 다니지 뭐. 그것도 재밌겠다. 뭘 하든 나 혼자 황금 사과 동산에 있는 것보단 나아.”
스테노도 변신을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스테노와 에우리알레 주변에는 이크티오켄타우로스 수십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달려들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이크티오켄타우로스는 하반신은 말, 상반신은 인간인 켄타우로스의 바다 버전이었다.
말의 엉덩이 부위엔 커다란 물고기 꼬리가 달려 있었고, 인간 형태인 상체의 두 팔 끝엔 손 대신 게의 집게발이 달려 있었다.
미역이나 해조류 같은 것이 머리 위와 몸 이곳저곳에 붙어 있었는데, 해조류가 붙은 것이 아니라 놈들의 털과 같은 것이었다.
두 자매를 노려보며 집게발을 접었다 폈다 할 때마다 쾅, 쾅 소리가 났다.
변신을 마친 두 자매가 서로 등을 맞대고 섰다.
“언니, 근데 포세이돈이 우릴 너무 무시한 거 아니야? 고작 보낸 게 집게발을 쾅쾅 치고 있는 저놈들이라고?”
“그 성급한 성격이 어디 가겠어? 가까운 데 있던 놈들부터 보냈겠지.”
에우리알래가 VR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어디 가서 놀다 왔으면 얌전히 돌아올 것이지. 포세이돈을 적으로 만들어서 와?”
“미안. 자, 마지막 기회야. 지금이라도 도망쳐.”
“싫어.”
에우리알레의 눈동자가 이크티오켄타우로스들을 빠르게 훑었다.
콰지직.
순식간에 네댓 마리의 이크티오켄타우로스가 돌이 되어버렸다.
“나도 이제 언니랑 한배를 타버렸네.”
“못 말려.”
“누가 할 소릴.”
* * *
5월 23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208,300개]
[단가 67억 원]
[평가 금액 1,395조 6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