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 * *
“그래? 신기한 장면이긴 하잖아?”
“뭐랄까. 신기해서 바라보는 정도가 아니라, 무슨 원리인지 하나도 안 놓치려고 바라보는 느낌? 아무튼 엄청나게 집중해서 보더라고.”
“사실 나도 쟤 평범한 소년이 아닌 건 알고 있어.”
“그래? 나도 좀 이상하다 하긴 했는데. 그럼 쟤 뭐야?”
“글쎄. 너무 완벽히 평범한 인간 소년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그게 좀 인위적이라고 해야 하나. 일단은 좀 지켜보는 중이야.”
에우리알레가 물었다.
“포세이돈이 붙여 놓은 첩자인가?”
“그렇진 않을 거야. 세이렌이나 또 다른 님프들이 수시로 우리 위치를 파악하고 있는 게 느껴지니까. 일단 찾아낸 이상 굳이 첩자를 붙여서 우릴 감시할 필요는 없겠지.”
“그럼 정체가 뭐래?”
“아무튼 평범한 소년은 아니야.”
“그런데 계속 데리고 다녀?”
“아직 딱히 위험해 보이지도 않으니까. 꽝이도 하악질을 안 하고. 그리고…….”
스테노가 내 말을 끊었다.
“요리가 맛있잖아.”
내가 하려던 말이었다.
“맞아.”
에우리알레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실 그거 때문이구나? 의심스러운데도 그냥 데리고 다니는 게.”
“응.”
“못살아. 둘이 아주 죽이 척척 맞네. 언니랑 김수호.”
“그치? 잘 맞지? 아… 수영이만 아니었더라도.”
“뭐?”
“내 차지였을 텐데.”
“누구 맘대로?”
“내 맘대로. 하하핫.”
에우리알레가 스테노 옆으로 다가가 속삭였다. 작게 말한다고 하는 것 같은데 마나의 파동을 타고 다 들려왔다.
“언니, 그럼 그 여자를 죽이면 되잖아. 돌로 만들어버리든가.”
“어휴, 무식한 것. 그럼 수호가 날 만나주기는커녕 오히려 죽이려고 들걸?”
“아, 그래?”
“넌 아직 인간을 너무 몰라.”
“치. 당연히 모르지. 평생을 대화 상대라고는 막내랑 언니밖에 없었는걸.”
“아이구, 내 동생. 언니랑 여행 많이 다니자, 이제.”
“이게 여행이야? 포세이돈한테 쫓겨 다니는 게?”
“수호가 어떻게든 해결해 줄 거야.”
“진짜? 언니는 그게 가능하다고 믿어?”
“불가능할 것 같긴 하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야. 결국은 다 뜻대로 해내더라고.”
“뭐, 멋진 친구를 뒀다더니 그렇긴 한가 보네. 사실 김수호 없었으면 우린 벌써 잡혀서 포세이돈 앞에 끌려갔을 거야.”
“그렇지? 내 친구 멋지지?”
“…다 들리니까 귓속말 그만하고 둘 다 이리 와서 마른 장작 모으는 거나 도와.”
다 들린다는 말에 에우리알레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고 스테노는 배시시 웃으며 나뭇가지를 줍기 시작했다.
잠시 후 최수영과 디아스가 산짐승 몇 마리를 잡아서 가지고 왔다.
“자, 디아스. 오늘은 어떤 요리야?”
“이건 요리 스승님한테 배운 비법인데요, 여기 타고 남은 마른 장작들을 밑에 깔고 그 위에 고기를 올릴 거예요. 그럼 불꽃이 직접 닿지는 않으면서 고열과 연기로 고기가 아주 맛있게…….”
“숯불구이구나?”
“어? 알아요? 이 방식을?”
“우리 살던 나라에선 흔해.”
“아…….”
* * *
“저기 보이는 큰 도시가 아테네겠네?”
“응, 맞을 거야. 다 왔다.”
“잠깐만.”
기감을 최대한 넓혀 느낄 수 있는 마나를 모두 느껴보았다.
될 수 있으면 저런 대도시에 몬스터를 끌고 들어가지 않기 위함이었다.
“응. 지금은 깨끗하네. 빠르게 이동하자. 파르테논 신전으로. 아, 그렇다고 이 큰 도시 위를 날아갈 건 아니니까 스테노랑 에우리알레는 이제 변신하는 게 좋겠다.”
“알았어. 근데 옷이 너무 더럽고, 너덜너덜해졌는데.”
“여기 또 있으니까 걱정 마.”
나는 정령의 마법 주머니에서 스테노의 캐리어 하나를 꺼내주었다. 안에는 형형색색의 원피스와 신발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에우리알레! 골라! 갈아입자.”
“그때 그 가방이 전부가 아니었어? 또 이만큼이나 더 있었어?”
“응. 그리고 이거 말고도 더 있어.”
“많이도 챙겨왔네.”
“백화점이라는 데를 가면, 예쁜 옷이 너무 많아. 나중에 너도 같이 가자 에우리알레.”
“그래? 나도 가보고 싶다.”
고르고네스 자매가 옷을 다 갈아입은 후 우리는 아테네 도시 안으로 들어섰다.
새하얀 건물이 가득 들어선 도시 안은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활기찬 도시네.”
“그리스의 수도니까.”
“신전은 어디에 있을까?”
디아스가 답했다.
“당연히 도시 한가운데요. 여기서 신전만큼 중요한 시설은 없을 테니까요.”
“오, 디아스 똑똑한데? 그럼 가운데로 쭉쭉 가보자.”
한참을 걸어 도착한 파르테논 신전은 스테노나 디아스가 알려주지 않아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오빠, 그리스 여행할 때 보던 그 신전 모양 그대로네?”
“응. 저 하얀 기동하며, 완전히 똑같다. 도대체 여긴 신화 속 세계야, 과거야, 그냥 판타지 세계야?”
“일단 과거는 아니겠지? 오빠 예전에 세상 끝 보러 간 거 잊어버렸어?”
“아, 맞다. 여긴 천동설의 세상이지.”
유럽 여행할 때 보았던 그리스 아테네의 대표적인 랜드마크 파르테논 신전이 우리가 봤던 모습 그대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다른 게 있다면 지붕이 완벽하게 덮여있고 벽이 무너져 내려 있지 않다는 정도.
그리고 형태만 겨우 알아볼 수 있었던 수많은 석상과 조각들은 완전한 모습을 갖춘 채 신전을 떠받들고 있었다.
“멋지긴 하네.”
“안 들어가고 뭐 해?”
“그래, 들어가자.”
안으로 들어서자 젊은 신관 둘이 우리를 맞았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 클레버 신관을 만나기 위해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여기 대기 명단에 이름을 적으시고 근처 마을에서 머무르시며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하루가 멀다고 전 대륙에서 클레버 신관님을 뵙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으니까요.”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글쎄요, 한 보름에서 한 달 사이?”
뒤에서 에우리알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정도 시간이면 포세이돈이 나타나 아테네를 엉망으로 만들고도 남겠네.”
“네?”
내가 얼른 다시 앞을 막아섰다.
“좀 급한 일이라 그런데, 어떻게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
그때였다.
신전 광장 건너편에서 길을 걷던 신관 하나가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 놀란 눈으로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물론 스테노나 에우리알레는 VR 선글라스를 착실히 쓰고 있었으므로 실제로 돌이 된 건 아니었다.
그때. 눈으로는 보지 못했지만, 디아스가 그 신관에게 무언가 신호를 주는 것이 느껴졌다.
디아스는 신관을 향해 윙크하며 검지를 펴 가만히 자기 입술에 대었다가 내렸다.
안 그래도 이곳에 들어서며 디아스의 기운이 조금 달라져 그에게 집중하고 있던 터라 마나의 흐름을 통해 느낄 수 있었던 작은 움직임이었다.
그 후로도 잠시 더 돌처럼 굳어 있던 신관이 조심스럽게 우리 쪽으로 한 발 한 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의 발걸음 소리를 들은 두 명의 신관이 뒤를 돌아보았다.
“클레버 신관님.”
“이분들은 누구시죠?”
“신관님을 뵙고 싶다고 찾아온 분들입니다. 마을에 묵으며 기다리시라고 전했습니다.”
“지금 마침 시간이 잠깐 나니 이분들을 먼저 만나 뵙도록 하지요.”
“지금이요? 이분들 앞에 이미 수십 명의 대기자가 있습니다.”
“이렇게 지나다 만나게 된 것도 다 신의 뜻이겠지요. 신전 뒤에 있는 제 방으로 안내해 주세요. 왠지 조용한 곳에서 봬야 할 분들이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말을 전한 뒤 클레버는 다시 뒤를 돌아 신전 광장을 빠져나갔다.
그의 다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볼 수 있었다.
내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디아스가 밝은 목소리로 주위를 환기했다.
“다행이네요! 클레버 신관님을 우연히 만나고 바로 우리와 면담을 해주신다니. 신이 돕고 있는 게 분명해요.”
나는 고개를 돌려 디아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디아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느낄 수 없었을 미세한 움직임.
그때 스테노가 우리 등을 떠밀었다.
“어서 가자. 우릴 만나준다잖아. 여기서 이러고 있다가 또 무슨 몬스터가 들이닥칠지 모른다고.”
“좋아. 일단 클레버 신관을 만나보자. 우릴 신관님의 숙소로 안내해 주시겠어요?”
“네. 저쪽에서 몸을 정화하는 의식을 잠깐 가진 후에 클레버 신관님에게 안내하겠습니다.”
잠시 후 우리는 클레버 신관의 방문 앞에 도착했다.
“이제 들어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똑똑.
방문을 노크하자 안에서 클레버 신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서니 수수하지만 넓은 방이 나타났다.
아까보다 조금 더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은 클레버 신관이 우리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여러분을 뵙자마자 순서를 지키는 공정함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방 한쪽에 동그란 탁자와 의자 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 인원수에 딱 맞았다.
모두 자리에 앉자 클레버 신관이 입을 열었다.
“어쩐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포세이돈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클레버 신관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어쩌시다가 그런 일을 겪게 되셨나요?”
“우리 일행이 그의 딸을 돌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일행이라고 하시면…….”
스테노가 손을 들었다.
“내가 그랬어. 안 걸리길 바랐는데 들켜버렸지 뭐야. 네가 신들과의 교감이 아주 뛰어나다며? 포세이돈을 설득하든 다른 신에게 도와달라고 하든 뭐 방법을 좀 알려줘.”
그제야 스테노와 에우리알레가 쓴 불투명한 선글라스를 유심히 바라보던 클레버가 물었다.
“혹시 고르고네스 자매십니까?”
“응, 맞아.”
“눈에 쓴 그 물건은, 한쪽만 투명한 신물인가 보죠?”
“신물은 아니고, 내 친구가 만들어 준 거야.”
“대단하군요. 제가 지금 돌이 될 걱정 없이 고르고네스 자매와 마주 앉아 대화하고 있다니요.”
“우리는 여행을 좀 하고 싶을 뿐이야. 예전에도 그랬었고. 이제 이 선글라스까지 있으니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어. 그러니 도와줘.”
“그런데 포세이돈의 딸이라면 혹시 얼마 전 사라진 카리브디스를 말하는 것입니까?”
“응, 맞아.”
“…왜 그랬는지 물어도 될까요?”
스테노는 당시의 상황을 짤막하게 설명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니까. 그리고 카리브디스는 식탐이 많은 죄로 제우스의 번개를 맞고 괴물이 되어 바다 밑으로 쫓겨난 존재잖아? 뭐 신들의 음식을 훔쳐먹다 그렇게 되었다며. 그대로 뒀으면 계속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을 해칠 게 분명하니 차라리 돌이 되는 게 나아. 아, 마지막 말은 여기 내 친구 김수호의 의견이야.”
“사람들을 더 이상 해치지 못하게 하려고 그랬다는 말이군요.”
“맞아. 내 친구는 그래서 카리브디스를 해치우려고 했고, 나는 위험에 빠진 내 친구를 돕기 위해 그녀와 눈을 마주쳤을 뿐이야.”
“포세이돈은 분명 강력한 신이지만, 이 얘기를 들으면 여러분께 힘을 실어줄 신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확실친 않아요. 신들의 변덕이야 워낙 유명하…….”
말을 하다 말고 클레버가 디아스의 눈치를 보았다.
디아스가 잠시 표정을 찌푸리자 디아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니까요. 어쨌든 제가 여러분의 편이 되어 줄 신들을 찾아볼게요.”
이번엔 내가 입을 열었다.
“멀리서 찾을 거 있습니까? 일단 여기 한 명 있잖아요.”
* * *
5월 30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212,600개]
[단가 67억 원]
[평가 금액 1,424조 4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