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 * *
“네, 네?”
“이 녀석 말입니다. 디아스.”
이 녀석이라는 말에 클레버의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수호,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해맑게 웃으며 묻는 디아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 말이야. 네가 신 아니야? 무슨 신인진 모르겠지만. 그리고 무슨 의도로 우리를 따라다니는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꽝이가 하악질을 안 해서 그냥 모른 척 같이 움직인 것뿐이야. 진짜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거야?”
이번에 당황한 사람은 최수영이었다.
“뭐라고? 디아스가 뭐? 신이라고? 나랑 단둘이 사냥도 다녀왔는데? 얘 그날 사슴 보고도 깜짝 놀라던데?”
“계속 이상하다 생각은 했었는데 여기 와서 보니 확실해. 저기 그리스에서 신들과 가장 가깝게 교감한다는 클레버 신관 얼굴에 지금 땀 나는 것 봐.”
이미 클레버는 물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온몸이 땀에 젖은 채였다.
당장이라도 몸의 수분이 다 빠져나가 버릴 것 같은 클레버는 디아스와 우리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 김수호 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이 분이 신이라면 제가 못 알아볼 리가 없습니다.”
안쓰럽기 그지없는 발언이었다. 차라리 아무 말을 하지 말지.
이미 축축하게 젖은 그의 온몸과 요동치는 심장 소리가 입에서 나오는 말과는 다른 진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결국 디아스가 입을 열었다.
“에이, 다 네놈 때문이다, 클레버. 들켜버렸네.”
“죄, 죄송합니다!”
클레버가 황급히 일어났다가 바닥에 두 무릎과 팔꿈치를 대고 엎드렸다.
“클레버 신관님 때문은 아니야, 디아스. 진작부터 네가 인간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어.”
“그래? 감각이 보통 예민한 놈이 아니다 했더니 역시……. 대단하구나, 김수호.”
갑자기 바뀐 디아스의 말투에 세 여인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여전히 꽝이는 요지부동.
이 자가 무슨 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우리에게 해를 끼칠 상대는 아니라는 얘기였다.
기왕 우리 편이 되어 줄 거라면 좀 강한 신이면 좋겠는데.
물론 그냥 재미로 따라붙은 것뿐 우리 편이 되어주지 않을 확률이 훨씬 높았다.
“그래서, 우릴 따라다닌 이유가 뭐야?”
“내가 신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투는 아직 어린애 다루듯 하는구나.”
“어린애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그렇지. 게다가 아직 누군지 직접 밝히지도 않았잖아?”
“하하하.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역시 내 관심을 받을 만한 놈이다.”
“저 불쌍한 신관은 이제 좀 일어나라고 하지?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아주 죽을 맛이었던 것 같던데.”
“클레버, 일어나거라.”
“아닙니다! 어찌 감히.”
“일어나거라.”
자기 신분을 들킨 이후부터 디아스의 말투가 변해 있긴 했지만, 조금 전 말한 다섯 글자, ‘일어나거라’에는 뭔가 다른 힘이 실려 있었다.
단지 근엄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무엇.
디아스의 말에 클레버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앉거라.”
클레버는 다시 차분히 디아스의 말대로 의자에 앉았다.
디아스가 다시 자리에 앉은 클레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 그래도 네놈을 한번 보러 올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오늘 만나게 되었구나.”
“여, 영광입니다!”
“그럼 내 오늘은 바쁜 일이 있으니 다음에 또 보자꾸나.”
“영광입니다!”
디아스가 이번엔 우리 일행을 둘러보았다.
“자, 너희는 나를 따라오너라. 여기 파르테논 신전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지중해 해안이 나온다.”
이번엔 스테노가 물었다.
“해안은 왜 가? …자는 말씀이십니까?”
“포세이돈이 이리로 오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에우리알레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우리를 포세이돈에게 팔아먹으려고!”
“내가? 하하하. 내가 너희를 왜 팔아먹겠느냐. 처음엔 그저 김수호 이놈에게 관심이 있었는데, 올림포스 위에서 지켜보니 너희들은 포세이돈과도 엮여 있더구나. 그래서 며칠 따라다녀 보기로 한 것뿐이다.”
관심? 나에게?
그때 갑자기 랜덤박스의 아이템 하나가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총 여섯 개 중 여섯 번째로 나온 아이템. 바로 여기 행성 087에서 언박싱 했던 아이템이었다.
[제우스의 번개 반지]
[올림포스 신들의 왕, 제우스의 권능을 담은 반지입니다.]
[제우스의 강력한 번개를 한 번 빌려올 수 있습니다.]
[번개를 꽂을 대상을 정한 후, 제우스에 대한 신앙과 존경을 담아 반지를 쓰다듬으면 됩니다.]
[가공할 위력을 가진 번개이지만, 대상 외 주변엔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주의 : 이 반지를 사용한 사람에게 제우스의 관심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혹시…….”
디아스가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우스… 신이십니까?”
디아스가 씨익 웃었다.
“그렇다. 네놈이 내 번개를 한 번 빌려다 쓰지 않았느냐.”
“그래서 저희와 동행하신 것입니까?”
“그래. 처음엔 내 번개를 빌려 간 놈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더니, 어느 날인가 갑자기 네놈이 느껴지더구나. 그때까지도 동행까지는 생각을 안 했었는데, 너희들이 마침 또 포세이돈과 엮여 있지 무어냐.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굳이 이런 소년의 모습으로 나타나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그럼 저에게 구박도 받지 않으셨을 텐데요.”
“너희들의 본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매우 만족스럽구나.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신들 사이에서 시달리다가 너와 네 친구들을 보는 것은 아주 즐거웠다. 해서, 나는 너희들의 여행을 지지하기로 했다. 그러려면 포세이돈과의 일부터 매듭을 지어야겠지.”
그제야 디아스, 아니 제우스가 빈 그릇을 치우며 중얼거리던 말이 떠올랐다.
“이 일행은, 제가 그동안 만나왔던 존재들과는 뭔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아, 별말 아니에요. 그냥… 가벼운데 묵직하고. 밝은데 진지하고. 친구를 아끼는데 대의를 중요시하고. 멋대로인데 의로워요.”
우리를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었군. 그런데, 그러고 보니 제우스가 빈 그릇을 치우다니? 요리도 자기가 했는데?
“어떠냐. 내가 너희들과 포세이돈의 사이를 중재해 주겠다.”
스테노가 깜짝 놀라 제우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에우리알레도 급히 언니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정말이십니까? 제우스시여.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나라고 한들 포세이돈의 화를 쉽게 잠재울 수는 없다.”
“그럼 저희가 어찌해야 하옵니까?”
“여기 김수호 이 자와 포세이돈이 대결을 하게 할 것이다.”
뭐? 내가?
스테노와 에우리알레도 놀라 제우스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엇이든 베어버리는 힘을 가졌는데 마족이 가진 태초의 힘까지 흡수한 그 검. 그 검과 김수호 너의 능력이라면 포세이돈의 공격을 두세 번 정도는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가장 궁금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다음에는요?”
“미리 밑밥을 잘 깔아둬야지. 내게 작전이 다 있다. 가면서 설명하마.”
올림포스 최강의 신, 제우스.
그의 입에서 밑밥을 잘 깔아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 *
지중해 해변.
제우스의 명령에 따라 파르테논 신전의 신관들이 총동원되어 이 일대의 인간들을 모두 대피시켰다.
해변에는 제우스와 우리 일행밖에는 남지 않았다.
제우스는 아직 어린 소년 디아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는군.”
나도 느끼고 있었다.
아직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바다 저 멀리에서부터 해일이 몰아쳐 오고 있었다.
거대한 해일은 금방 해안가까지 몰려왔다.
하늘을 날지 못하는 최수영만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빠, 피해야 하는 거 아니야?”
“있어 봐. 진짜 해일이 여길 덮칠 것 같으면 그때 피하면 돼.”
“하앍―”
어깨 위의 꽝이가 귀를 내리깔고 털을 곤두세웠다.
해안가 바로 앞까지 밀려온 해일은 우리 앞에 그대로 멈추어 섰다.
그 위 한가운데 상의를 탈의한 근육질의 남자가. 아니, 신이 서 있었다.
머리칼은 바다를 닮은 푸른색이었고 이목구비는 거칠면서도 또렷했다.
오른손에는 황금빛 삼지창을 들고 있었다.
“제우스, 이 일엔 또 왜 끼어든 것이오.”
“오해하지 마시오. 내 끼어들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청년에게 관심이 생겨서 따라붙어 본 것이오.”
“그럼 빠지시오. 나는 제우스 당신에게도, 당신이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저 청년에게도 관심이 없으니.”
나에게도 관심이 없다고? 자기가 보낸 부하를 그렇게 많이 베어 넘겼는데?
포세이돈은 생각보다 쿨한 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쩌겠소. 당신이 고르고네스 자매를 해하려고 하면 그녀들의 친구인 이 청년이 끼어들 것이고, 그럼 이 청년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내가 끼어들 수밖에 없으니.”
“말을 빙빙 돌리더니 결국 내 일을 방해하겠다는 것이군. 제우스, 내 딸을 괴물로 만들어 지중해 바닥에 처박은 것도 모자라 이번엔 그런 불쌍한 아이를 돌로 만든 자들을 보호할 셈이오?”
“그 아이가 먼저 신들의 연회에 쓰일 음식을 탐내었소. 그 얘기는 예전에 다 끝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리고 불쌍한 아이라고 표현하기에는 그동안 너무 많은 선원을 잡아먹기도 했지.”
“얘기는 끝났지만 내 원한은 끝나지 않았소. 여기서 또다시 내 딸을 능멸하겠다면 이번엔 참지 않을 것이오.”
“호오. 그럼 나와 또 한 번 붙어보겠다는 말인가?”
“못할 것도 없지.”
“포기해야 할 것이 많을 텐데?”
“이미 많이 포기하며 살고 있소만.”
“그렇단 말이지?”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순식간에 먹구름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직 어린 소년 디아스의 모습을 하고 있던 제우스의 몸에서 황금빛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소년이 있던 자리에는 포부도 당당한 올림포스 최강의 신, 제우스가 서 있었다.
제우스라는 것을 알고 있긴 했지만 실제로 모습까지 바꾸니 그 위압감에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최수영이 내 팔을 두 손으로 꽉 붙잡았다.
새하얀 옷에 황금빛 무늬가 들어간 옷을 입고 서 있는 제우스는 머리칼도, 눈동자도 모두 황금빛이었다.
콰앙, 우르르르.
하늘에서 천둥 번개 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해볼 텐가? 포세이돈.”
“정 그렇게 나온다면.”
가만히 멈춰 있던 해일이 거친 소리를 내며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바다의 소용돌이는 물기둥이 되어 포세이돈을 하늘 위로 올려보냈다.
그때였다.
제우스의 발등이 내 정강이를 툭 쳤다. 고개를 돌리자 그의 황금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 지금이다.
제우스는 입을 벌리지 않았으나 그의 말이 무림인들의 전음처럼 내 머릿속으로 박혀 들어왔다.
그래도 옆에 최강의 신이 있으니 든든하긴 했지만,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싶었다.
물론 스테노를 위해서라면 포세이돈과의 한판 싸움도 고려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었는데…….
일단은 내력을 한껏 모아 폐에 집중시켰다.
“수영아, 귀 막아.”
“어? 응.”
최수영이 귀를 막는 걸 확인하고 숨과 함께 주변 마나를 한껏 들이마신 후.
소리쳤다.
“포. 세. 이. 돈!”
* * *
5월 30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212,600개]
[단가 67억 원]
[평가 금액 1,424조 4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