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 * *
거대한 물기둥이 거짓말처럼 꺾이며 내 머리 위쪽을 향했다.
물기둥 위에 서 있던 포세이돈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한번 내력을 모아 소리쳤다.
“결투를 요청한다!”
포세이돈의 눈썹이 꿈틀했다.
“뭐?”
거대한 물기둥이 점차 내려앉으며 포세이돈이 해변으로 내려섰다.
막상 앞에 서니 그 위압감이 제우스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았다.
한 번. 한 번만 내 힘으로 막아내면 된다.
* * *
30분 전. 해변으로 오는 길.
“그래. 내가 신호하면 네놈이 낼 수 있는 최대한 큰 소리로 포세이돈에게 결투를 요청하란 말이다.”
“그런데 포세이돈이 그런 걸 받아들일 것이란 말입니까?”
“처음부터 그딴 소리를 지껄였다간 포세이돈은 아마 그냥 네놈들을 다 죽여버릴 것이다.”
“그런데요?”
“내가 밑밥을 깐다고 하지 않았느냐. 나와의 대결 양상으로 분위기를 몰아가다가 그때 네가 등장하는 것이다. 포세이돈이 다혈질이긴 하나 실리를 구분할 줄 아는 신이다. 자존심 때문에 나와 한판 대결을 준비하고 있던 와중에, 네놈이 대결하자고 하면 아마 흔쾌히 받아줄 것이다. 내심 내가 물러나기를 바라고 있을 테니까.”
“그다음은요? 제우스께서 보시기에는 제가 포세이돈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어림없는 소리.”
“그런데 대결을 하라고요?”
“내가 중재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신과 인간의 대결이다. 이미 시작부터 공평하지가 않지. 해서 네놈이 버틸 만큼의 조건을 거는 것이다.”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공격을 세 번 주고받는 동안 네가 살아 있다면 스테노를 용서해 주기로 하는 것이지.”
“세 번 주고받기 전에 제가 죽으면요?”
“별수 없지. 너도 죽고 네 여자 친구도 죽고 저 고양이도 죽고 불사의 고르고네스 자매들은 죽음보다 더한 형벌을 영원히 받게 될 것이다. 게다가 나는 포세이돈에게 망신을 당하게 될 테고.”
우린 다 죽거나 죽음보다 더한 형벌을 받게 되는데, 자기는 겨우 망신을 당하게 된다는 말 앞에 ‘게다가’라는 단어를 붙이다니?
하지만 이런 말을 제우스 앞에서 꺼낼 순 없었다. 애초에 도와주지 않아도 그만인 존재이니까.
“그럼 제가 세 번은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두 번. 그것도 포세이돈이 널 얕보고 첫 번째 공격 기회를 허무하게 버렸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럼 저는 죽겠네요.”
“그 검은 구름. 마족이 태초부터 가지고 있던 힘. 모든 마나 공격을 흡수해 무효화시키는 권능. 그건 마지막 세 번째에 사용하도록 해라.”
“그게 작전입니까?”
“그래. 그 단단한 검에 어찌나 잘 갈무리되어 있던지 검은 구름이 밖으로 나오기 전에는 나도 알아채지 못하였다. 포세이돈도 마찬가지일 테지. 네놈이 어찌어찌 두 번의 공격을 막아내면 아마 세 번째에 가장 강한 공격을 날려 올 것이다. 그때 그 구름을 사용해라.”
“이 구름으로 세 번의 공격을 다 막으면 안 됩니까?”
“그 구름을 한 번이라도 내보였다간 그다음엔 포세이돈의 삼지창이 직접 네놈의 심장을 꿰뚫을 것이다. 그 구름으로는 물리 공격은 막아낼 수 없지 않으냐.”
“그러니까 첫 번째는 절 얕보고 약한 공격이 들어올 것이니 무사통과일 것이고, 두 번째는 어떻게든 막아내고, 세 번째엔 이 마족의 힘을 사용하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 그런데 포세이돈이 자신의 전력을 내 예상보다 더 빨리 퍼붓는다면 아마 넌 그 자리에서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위험도 없이 포세이돈의 분노를 잠재울 수는 없는 법이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어쨌든 제힘으로 한 번만 제대로 된 공격을 막아내면 되는 것이군요.”
스테노가 다가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겠어? 막아낼 수 있겠어? 너무 위험할 것 같으면 그냥 하지 마. 내가 다 책임지고 포세이돈한테 가면 돼.”
“괜찮아 스테노. 제우스 님의 계획을 들어보니 꽤 그럴듯하지 않아? 한번 해볼 만한 것 같아. 그리고 이제 와서 포기할 거면 처음부터 널 돕는다고 나서지도 않았어.”
최수영이 거들었다.
“그래, 언니. 나도 사실 걱정돼 죽겠지만, 오빠는 해낼 수 있을 거야. 강한 사람이니까. 게다가 이제 와서 발을 빼는 건 김수호가 아니지. 그렇지, 오빠?”
“그렇지.”
* * *
“지금 뭐라 하였느냐, 인간?”
“저와 결투를 하자 하였습니다.”
“네가? 나랑?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스테노는 제 친구입니다. 게다가 그녀는 저를 돕다가 이렇게 되었고요. 그러니 일행 중 가장 강한 제가 대표로 포세이돈 님과 대결을 하고 싶습니다.”
“대결 조건은?”
“제가 이기면 스테노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네가 이기면? 그런 것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기운이 이질적인 걸 보니 다른 차원에서 온 모양인데, 그곳엔 신이 없는가?”
그때 딱 알맞은 타이밍에 제우스가 끼어들었다.
“네놈이 인간치고는 꽤 강하긴 한데 친구를 위하는 마음에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어때, 포세이돈? 그래도 이 정도면 인간치곤 꽤 용감하지 않소?”
“이건 용감한 게 아니라 제 주제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일 뿐이오.”
“그렇지. 신과 인간의 대결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럼 이건 어떻소, 포세이돈? 서로 세 번의 공격을 주고받는 것이오. 그 후에도 이놈이 살아 있다면 이놈이 제안한 조건을 들어주는 것이오.”
“조금 전엔 싸우자고 덤비더니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제우스.”
“우리가 싸워서 서로 득 될 일이 무엇이 있겠소. 한데 이놈의 용기가 워낙 가상하니 기회를 한번 줘 보자는 것이오. 이놈이 진다면 나도 이번 일에 더 이상 끼어들지 않겠소.”
“정말이오?”
“맹세하지. 내 요 며칠 워낙 애정을 두고 지켜보던 놈이니 이런 기회를 한번 줘 보자는 것이오.”
“제우스까지 이렇게 나온다면 별수 없지. 좋다. 너도 이 조건에 승낙하는가, 인간.”
“물론입니다.”
“재미있는 녀석이군. 저쪽으로 가자. 네놈이 먼저 공격하거라.”
제우스와 일행들은 그 자리에 남고, 나와 포세이돈만 해변 멀리 떨어져 마주 보고 섰다.
포세이돈의 첫 번째 공격이 시시하게 들어오게 하기 위해선 나도 시시한 공격을 펼쳐 내야겠지.
하지만 또 너무 시시해서는 안 될 테고.
나는 두 팔을 벌려 농구공만 한 마법구 스무 개를 만들어냈다.
“마법사였군. 아니, 마검사인가?”
“가랏!”
일부러 크게 소리치며 과장된 몸짓으로 마법구 스무 개를 빠르게 날렸다.
포세이돈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마법구가 날아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쾅, 콰앙.
꽤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마법 구들이 터져 나갔다.
“제법이군. 인간치고는 꽤 강력한 마법을 쓸 줄 아는구나. 이곳 그리스의 인간 중엔 아마 널 당해 낼 자가 없겠다.”
당연히 포세이돈의 몸에는 작은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네놈이 너무 거만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번엔 내 차례다.”
포세이돈이 왼손바닥을 앞으로 뻗었다.
주변의 마나가 그의 손바닥으로 모여드는 것이 느껴지더니, 이내 그의 앞에서 물이 생겨나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퍼엉!
공기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날카로운 물기둥이 나를 향해 쏘아져 들어왔다.
급히 두꺼운 실드를 만들어 앞에 펼쳐내었다.
콰앙!
실드와 끝이 송곳처럼 다듬어진 물기둥이 부딪치며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쩌적, 쩌저적.
물기둥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실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콰앙!
결국 실드를 깨부순 물기둥이 나에게 쏟아져 들어왔다.
하지만 처음의 예리함이나 강맹함은 많이 줄어든 상태.
나는 급히 양손에 실드를 펼쳐내며 몸으로 받아내었다.
양손에 급히 펼친 실드도 금세 금이 가다가 깨어져 버렸고 결국 물기둥은 내 몸을 그대로 덮쳤다.
옷이 찢어지고 피가 튀었다.
하지만 물기둥의 힘은 이미 많이 약해진 상태. 내구도 강화 상품을 10단계까지 산 나에겐 작은 상처 몇 개만 남길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포세이돈의 공격을 몸으로 막아내고 피가 사방으로 튀니 뒤에서 놀란 최수영의 외침이 들려왔다.
“오빠!”
* * *
제우스가 최수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놀란 최수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네 남자 친구 말이다. 내 생각보다도 훨씬 능구렁이 같은 놈이구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일부러 실드의 두께를 조절해서 포세이돈 공격의 위력을 충분히 약화시킨 다음 몸으로 받아냈다. 딱 몸에 별것 아닌 생채기가 날 만큼. 하지만 저것 보아라. 옷이 찢어지고 피가 튀니 꼭 포세이돈의 첫 번째 공격을 겨우 막아낸 것처럼 보이지 않느냐?”
제우스의 말에 최수영이 다시 자세히 김수호의 몸을 바라보았다.
옷이 찢어지고 피가 튀었지만, 그의 말대로 김수호의 몸에 큰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스테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우스 님. 저런 얕은수가 포세이돈에게 먹힐까요?”
“먹히지 않았느냐.”
그때, 저 멀리 서 있던 포세이돈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인간. 대단하구나. 내 공격을 막아내다니. 훌륭하다. 이제 두 번째 공격을 해보거라. 하하하.”
에우리알레가 물었다.
“포세이돈이 즐거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이번엔 김수호가 검을 뽑아 들었다.
제우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아무튼 재밌는 놈이야. 저놈 이번엔 어떤 공격을 하려나? 아까처럼 어설픈 걸 또 날렸다간 포세이돈이 흥미를 잃어버릴 텐데.”
스테노가 물었다.
“포세이돈이 흥미를 잃으면 안 되는 건가요?”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것을 본 적이 없느냐? 흥미를 느꼈을 땐 딱 죽지 않을 만큼 괴롭히며 가지고 놀지. 하지만 흥미를 잃게 되면, 그땐 그냥 단순한 먹이가 될 뿐이다.”
“그럼 이번 공격에서 포세이돈이 흥미를 잃으면…….”
“굳이 세 번째 공격까지 가지 않고 다음 공격에 바로 죽여버릴지도 모르지.”
스테노와 최수영이 동시에 놀란 눈으로 제우스를 돌아보았다.
특히 최수영은 당장이라도 김수호에게 달려갈 듯한 표정이었다.
“너무 걱정 말거라. 저놈 지금까지는 아주 잘하고 있으니.”
저 멀리 김수호의 검에서 묵빛 검기가 쏘아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묵빛 검기는 날카롭게 공간을 가르며 포세이돈의 목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어쭈? 이놈 정말 나를 어떻게 해보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목을 노리다니?”
포세이돈이 왼손을 다시 앞으로 뻗자 이번엔 그의 손에 바람이 모여들어 회오리가 되었다.
금세 크기를 불린 회오리는 앞으로 뻗어 나가며 김수호의 검기와 그대로 부딪쳤다.
검기를 빨아들인 회오리는 그 회전력으로 검기를 무력화시키려고 했지만, 검기가 가진 힘도 만만치 않았다. 검기에 닿는 회오리가 칼에 닿은 실타래처럼 툭툭 끊어져 나갔다.
“아니, 이놈?”
결국 김수호의 검기는 포세이돈의 회오리를 모두 끊어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포세이돈이 이번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삼지창을 휘둘렀다.
콰앙!
삼지창에서 쏟아져 나온 금빛 파도가 김수호의 검기를 강타했다.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김수호의 검기가 공중에서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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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0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214,100개]
[단가 67억 원]
[평가 금액 1,434조 5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