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 테라 행성 】
“수호, 보고 싶을 거야.”
“네가 떠나는 거면서 왜 울먹이는 거야?”
“아쉬워서 그러지.”
“동생이랑 여행 잘하고, 언제든지 지구로 놀러 와.”
“아니야, 안 되겠어. 아무래도 너무 아쉬워. 에우리알레, 우리 그냥 수호 따라가면 안 될까?”
에우리알레가 팔짱을 끼며 스테노를 노려보았다.
“이미 얘기 다 끝난 거잖아. 정 얘네들을 따라가고 싶으면 언니 혼자 가라고. 나는 다른 행성 여행보단 우리 고향부터 여행할 거야. 여기 가보고 싶었던 곳이 얼마나 많았다고. 언니도 알잖아?”
“그건 나도 그래. 하지만 수호랑 수영이랑 헤어지는 것도 아쉽고…….”
최수영이 스테노의 손을 잡았다.
“에우리알레 말대로 해요, 언니. 언니도 고향 행성 여행하고 싶어 했잖아요. 평생의 소원이었다면서요. 게다가 오빠랑 나는 지금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니까, 차라리 에우리알레와 함께 이곳 고향 행성을 마음껏 여행하고 나중에 합류해요.”
“…그래. 알았어. 나 없는 동안 에우리알레가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을 텐데. 에우리알레와 그동안 가보고 싶었던 곳을 돌아보는 게 우선이겠지. 그런데 수영아.”
“네? 언니.”
“너 나 떼어 놓으려고 이러는 건 아니지?”
“하하핫.”
“맞네.”
몇 날 며칠간의 고민 끝에 스테노는 에우리알레와 함께 이곳 고향 행성 이곳저곳을 먼저 여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자매는 엄청난 세월을 서쪽 끝 황금 사과 동산에 갇혀 살다시피 해왔다. 그동안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야기와 모험담들의 배경이 되는 수많은 장소를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며 이곳 여행을 꿈꿔 왔을 것이다.
스테노는 우리와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긴 했지만, 이곳에 도착하고 동생도 만난 마당에 당연히 이 행성 여행을 먼저 시작하는 게 순서였다.
“테라 행성은 사막만 있고 별로 볼 것도 없어. 그리고 마지막 재외공관인 데다가 우리나라에서 진행하는 곳이라 나랑 수영이도 바쁠지도 몰라. 차라리 여기서 자유롭게 실컷 여행하고 지구에서 만나.”
“…알았어. 잘 다녀와. 내 황금 깃털은 항상 잘 가지고 있고. 나중에 지구 가면 너희가 있는 곳으로 바로 찾아갈 수 있게.”
“뭐래. 전화해. 전화기 줬잖아. 잘 충전해 놨다가 지구 올 때 챙겨와.”
“아, 맞다. 그러네.”
“그래도 어쨌든 황금 깃털은 잘 가지고 있을게.”
에우리알레가 스테노의 팔을 잡아끌었다.
“언제까지 인사를 하고 있을 거야. 안 가?”
챙이 넓은 모자에 꽃무늬 원피스. 그리고 커다란 캐리어의 손잡이를 잡고 언니의 팔을 잡아끄는 에우리알레는 영락없이 적도 지방으로 해외여행을 떠나는 여행객의 모습이었다. 스테노도 마찬가지.
“그래, 알았어. 가자. 우리 갈게, 나중에 만나. 김수호, 최수영.”
“응, 여행 잘하고 와.”
스테노와 에우리알레를 떠나보내고 숙소로 돌아오자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무전이 왔다.
“벌써 저녁 시간이네.”
“우리 나가서 먹자, 오빠.”
“나가서?”
“응. 오랜만에 단둘이 데이트.”
“아, 그럴까? 어디서 맛있는 음식을 파는지 물어보고 가자.”
“누구한테?”
“왕궁 문지기나 뭐 누구한테든.”
“그래, 그러자. 하하핫. 얼마 만에 단둘이 데이트야.”
“그러게.”
최수영과 손을 잡고 주둔지를 빠져나와 왕궁 앞 거리를 걸었다.
“궁성 안은 전쟁 준비로 어수선하던데 또 이곳 거리는 그렇지도 않네?”
“당장 누가 쳐들어온 건 아니니까. 아직은 남 일이겠지.”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던 최수영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저쪽에 시장 같은 거 있다. 저기서 그냥 뭐 사 먹을 거 있나 찾아볼까?”
“시장 좋지. 가보자.”
시장으로 보이는 쪽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꺅!”
“차원 이동문이다!”
“달아나!”
나는 최수영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푹 쉬었다.
“도대체 쉴 틈을 안 주네.”
“그냥 다른 데로 갈까? 여기 지구도 아닌데 꼭 도와줘야 해?”
“어쨌든 주둔지 바로 옆이잖아. 가서 뭐가 나오는지만 보자.”
최수영과 천천히 시장으로 진입하자 화이트 게이트가 막 커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엄청 큰 게이트는 아닌 모양이다. 그치?”
“응. C급이나 B급 되겠네.”
근처 가게의 긴 의자를 끌어 다 놓고 게이트 앞에 나란히 앉아 잠시 기다리자 게이트에서 잔해물이 하나둘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저 비쩍 마른 나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테라 행성인가?”
잠시 후 쇠로 만든 전신 갑주에 바스타드 소드를 든 기사 셋이 튀어나왔다.
다급히 서로 등을 맞대고 주변을 살피는 모습을 보니 꽤 숙련된 기사들인 것 같았다.
“가슴의 저 문장, 익숙한데? 몬테넬 왕국 기사단 문장 맞지?”
“응, 맞네. 테라 행성에서 온 사람들인가 보다.”
“아직 게이트가 조용한 걸 보니 주변에 저 사람들밖에 없었나 봐.”
나와 최수영은 천천히 걸어 잔뜩 긴장하고 있는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기사 한 명이 우리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멈춰라!”
“몬테넬 왕국의 기사 맞으시죠?”
기사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여긴 분명 다른 행성. 어떻게 우리 말을 쓰고 몬테넬 왕국을 알고 있는 것이지? 혹시 테라 행성 사람이오?”
“테라 행성 사람은 아니지만, 그곳에 좀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군. 그럼 여기가 어딘지 알려줄 수 있겠소?”
“여긴 행성 087… 아, 이렇게 말해도 못 알아들으시겠군요. 아무튼 테라 행성과는 좀 다른 곳입니다. 그런데 갑옷이 많이 상했네요. 무슨 전쟁 중이신가요?”
“그렇소이다. 혹 다시 테라 행성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아시오? 연합군단장에게 빨리 전해야 할 말이 있소!”
최수영이 나섰다.
“방법은 간단해요. 조금 전 빨려 들어 온 검은색 게이트를 찾아 계속 들어가다 보면 테라 행성이 나올 거예요. 그럼 고생하세요.”
오랜만에 생긴 둘만의 데이트 기회를 방해받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 역시 처음 보는 다른 행성 사람들에게 오지랖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저쪽으로 가면 이 왕국 궁성의 성문이 있으니 거기 가서 도움을 청해 보세요. 그럼 저흰 이만.”
최수영과 함께 뒤로 돌아 다른 곳으로 가려는데 뒤에서 기사들의 대화가 들렸다.
“큰일입니다! 어서 제2 군단장님께 전선의 상황을 말씀드려야 할 텐데요. 한시가 급한데 갑자기 나타난 게이트에 휘말려 버리다니.”
“큰일이구나. 계획대로 제2 군단의 주력 병력이 시엠브레로 향하는 강을 건넌다면 큰 피해를 볼 것이 뻔한데.”
“맞습니다. 놈들이 첩보를 입수하고 이미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 아무리 매튜 군단장님이 이끄는 부대라 해도 강을 건넘과 동시에 몰살을 면치 못할 겁니다.”
처음 보는 이들의 대화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매튜 군단장? 설마 키르칸의 매튜 남작님을 얘기하는 건 아니겠지.
“어서 이동하세. 시간이 없어. 어떻게든 돌아가야 하네.”
세 명의 기사가 절그럭 소리를 내며 빠른 걸음으로 우리를 앞서 걸어갔다.
“그래도 매튜 군단장님이 계시니 어떻게든 승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리 매튜 군단장님이 시엠브레 기사단장과 호각을 다투는 검술 실력을 갖추고 계시다 한들, 강을 건너기만을 기다리며 매복한 상대에게는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는 없을걸세.”
이런. 시엠브레 기사단장과 호각을 다투는 검술 실력을 가진 매튜라면 내가 아는 그 매튜 남작이 맞다.
“수영아.”
“응?”
“데이트는 잠깐 미뤄야겠는데?”
“이럴 줄 알았다니까. 저 사람들이 말하는 매튜 군단장인가 하는 사람이 오빠가 예전에 말했던 그 남작님이지? 어디였더라? 키르칸?”
“응, 그런 것 같아.”
“어쩌겠어. 그때 많은 은혜를 입었다며. 갚아야지. 그런데 지금 무슨 전쟁 중인가 봐? 군단장은 뭐고 연합군은 뭐래?”
* * *
주둔지 숙소 안.
“…그래서, 지금 다섯 개 왕국이 연합해서 시엠브레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매튜 남작님은 연합군의 제2 군단장을 맡고 계신 거고요?”
“그렇습니다. 매튜 군단장님을 잘 아십니까?”
“잘 알죠. 제 은인이기도 하고요.”
“매튜 군단장님이 안 계셨다면 이미 승부는 시엠브레 쪽으로 기울었을 것입니다. 군단장님은 우리 연합군의 구원자 같은 분이시죠.”
“그런데 지금 시엠브레 진입 계획을 사전에 들켜서 위험한 상황이란 말씀이시죠?”
“빨리 이 사실을 알려야 할 텐데. 큰일입니다. 한 달 후면 연합군 제2 군단의 총공격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 전에 반드시 매튜 남작님에게 이 소식을 전해서 공격 계획을 변경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이번 총공격이 실패로 돌아가고 제2 군단이 큰 피해를 보게 되면 안 그래도 불리한 전세는 이제 완전히 기울게 될 것입니다.”
마침 우리도 테라 행성으로 가는 길이니 동행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럼 일단 저희와 함께 이동하시죠. 어제부터 블랙 게이트를 찾고 있으니 곧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몇 번의 게이트 통과 만에 테라 행성에 도착하느냐가 문제겠지만요.”
“아닙니다. 한시가 급하니 저희는 따로 게이트를 찾아 나서겠습니다.”
“아니요. 우리와 함께 이동하시는 게 제일 빠른 방법이에요. 지금 수색대와 드론이 이곳저곳 블랙 게이트를 찾고 있으니까요.”
“그렇습니까?”
그때 밖에서 정민우 상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 대표님! 멀지 않은 곳에서 A급 블랙 게이트를 발견했답니다. 내일 새벽 출정입니다!”
나는 몬테넬의 기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게이트 찾았다네요.”
“오! 그럼 테라 행성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겁니까?”
“반대편이 어디로 이어졌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테라 행성이 빨리 나오길 바라는 수밖에요.”
* * *
다음 날, 행성 055.
우리 차에 함께 탄 몬테넬의 기사가 공룡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저것들은 도대체 뭡니까?”
“공룡이라는 건데, 뭐 생긴 거에 비해선 그렇게 크게 위협적이지는 않습니다.”
또 다른 기사가 외쳤다.
“저는 저 커다란 몬스터보다는 이 숲이 너무 놀랍습니다. 이렇게 크고 푸른 나무가 가득 찬 숲이라니……. 이곳에 살면 음식 걱정도 없겠습니다. 저기 과일 열려 있는 것 좀 보십시오.”
“그렇죠. 뭐 테라 행성도 먼 예전엔 이랬다고 들었어요. 정령들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아, 저도 그 얘기는 알고 있습니다.”
또 다른 기사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시엠브레 제국 안의 숲들은 벌써 이만큼 되살아났을지도 모릅니다.”
“에이, 벌써 이렇게까지 되었으려고? 하지만 많이 되살아났다고 하긴 하더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 보니 예전에 라트니아 왕국에서 숲을 되살릴 마법을 개발했다는 얘기가 기억났다.
그것 때문에 몬테넬과 전쟁이 일어날 분위기가 팽배했었는데.
“라트니아가 숲을 되살리는 마법을 완성한 건가요? 그리고 지금 여러분의 대화를 들어보니 그 기술은 시엠브레에 뺏긴 모양이군요.”
가장 나이가 많은 기사가 대답했다.
“테라 행성에 들르신 적이 있다더니 정말 많은 걸 알고 계시는군요.”
“거기까지가 제가 알고 있는 부분이에요. 그 뒷얘기를 좀 들려주시겠어요?”
“결국 그 숲을 되살리는 마법을 차지하기 위해 시엠브레와 몬테넬이 손잡고 라트니아를 침공했습니다. 결과는, 라트니아의 완패였죠.”
“혹시 그때 후지로라는 특이한 불사인 하나가 그 전쟁에 참여했었나요?”
“맞습니다. 잘 아시는군요. 사실 처음부터 전쟁은 일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라트니아에게 그냥 항복을 받아내거나 기술만을 뺏을 수도 있었는데, 그 후지로라는 시엠브레의 기사가 전쟁을 대학살극으로 끌고 갔었습니다.”
* * *
5월 31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114,500개]
[단가 67억 원]
[평가 금액 767조 1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