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 * *
장관이었다.
허공에 붉게 그려진 마법진에서 거대한 금속 뱀이 튀어나왔다. 행성 094에 서식하는 브리트라였다.
거대 뱀의 몸이 노을에 부딪혀 붉게 빛났다.
원래도 큰 녀석이었는데 금속화를 거치며 두 배는 더 커졌다.
지상으로부터 수십 미터 높이의 허공에 그려진 마법진에서 머리부터 나오기 시작해, 그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도 꼬리는 드러나지 않았다.
땅에 완전히 내려온 브리트라는 연합군 진영을 향해 거칠게 기어갔다.
연합군 진영이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매튜 남작을 필두로 한 불사인들이 말을 타고 앞으로 뛰어나왔다.
검기를 길게 뽑아낸 기사들이 여기저기서 거대 뱀 브리트라를 공격했고, 마법사들 역시 공격 마법을 퍼부었다.
요리조리 피하는 불사인들에게 약이 올랐는지 브리트라의 몸짓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야, 오빠?”
“아직. 내가 나타나고 저놈들이 마법진을 닫아버리면 나머지 금속 몬스터들이 어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어. 그럼 오늘 마법사의 탑을 점령한다고 해도 나중에 어디선가 다른 마법사가 금속 몬스터를 소환해 다시 연합군을 공격하겠지.”
“저런 게 열 마리 가까이 있다며. 연합군이 버틸 수 있을까?”
“역시 대단해. 매튜 남작님.”
“왜? 뭐가?”
“브리트라는 이제 곧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아. 아까부터 턱 밑 급소를 매튜 남작이 계속 찌르고 있어. 벌써 같은 곳을 열 번도 넘게 공격했어.”
“그래? 난 몰랐네. 그래도 대단하다. 저런 괴물을 상대하다니.”
“죽은 가엘 기사단장이 들으면 억울하겠지만, 매튜 남작이 몇 수는 위인 것 같아.”
“그 사람이랑은? 예전에 지구에 넘어왔던 시엠브레의 미친 왕. 이름이 뭐더라?”
“마티아스?”
“응.”
“마티아스랑은… 잘 모르겠네. 비슷한 것 같아.”
그러는 사이 허공에 있는 마법진에서는 다른 금속 몬스터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나오는 놈 중 티라노사우루스가 가장 약해 보였으니 시엠브레의 마법사들이 얼마나 엄선해서 잡아 온 몬스터들인지 알 수 있었다.
거대 금속 몬스터들이 늘어나자 연합군의 불사인들은 급격히 밀리기 시작했다.
브리트라를 포함해 이제 겨우 두 마리의 금속 괴수를 물리쳤을 뿐인데 이미 절반이 넘는 불사인이 전투 불능 상태가 되어 있었다.
빨리 재생 마법을 사용하면 살릴 수 있겠지만 연합군 마법사 그 누구도 그럴 여유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지금도 충분히 연합군에 불리한 상황이었는데, 마침표를 찍을 몬스터의 머리가 마법진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금속 히드라였다.
“저놈까지 딱 열 마리네. 이제 우리가 나설 차례인 것 같다.”
“좋아, 가자!”
“수영이 너는 여기 그냥 있어. 여기서 화살 공격을 퍼부어 줘.”
“그게 차라리 나을까?”
“응. 화살로 엄호해 줘. 난 너만 믿고 저기 가서 마음껏 날뛸 테니까.”
“오케이. 알았어.”
최수영이 활을 꺼내 들고 시위를 퉁 퉁 튕겨보았다.
“오빠 가까이 오는 놈은 내가 다 날려버릴 거야.”
“땡큐.”
그대로 몸을 띄워 이제 막 마법진에서 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히드라의 몸통을 향해 날았다.
살기를 느꼈는지 금속 히드라의 머리 두 개가 내 쪽을 향했다.
쩌억.
두 머리가 동시에 입을 크게 벌렸다.
콰아아아.
짙은 녹색의 맹독 브레스가 뿜어져 나왔다.
몸 앞에 크고 두꺼운 실드를 펼쳐냈다.
콰앙, 콰드득.
실드와 브레스가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사이 몸을 위로 띄웠다가 검에 강한 내력을 실어 히드라의 머리통 하나를 베었다.
콰앙!
예상대로 내구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꽤 많은 내력을 실은 검기였음에도 놈의 머리통을 한 번에 베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충분히 충격은 전달한 상태. 머리통도 반쯤 움푹 패었다.
다시 한번.
콰앙!
이번엔 놈의 머리가 목과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러는 사이 거리를 좁힌 나는 이번엔 검기 없이 마그네타 검으로 또 다른 목을 베었다.
검기 때와는 다르게 손쉽게 베어졌다.
순식간에 머리 두 개를 잃은 히드라가 광분하며 몸부림쳤다.
나는 그대로 몸을 날려 남은 목 하나도 베어버렸다.
목이 모두 잘린 히드라는 그제야 날갯짓을 멈추고 땅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콰앙.
거대한 몸이 땅에 떨어지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정신없이 싸우던 불사인들이 이제야 내 쪽을 바라보았다.
매튜 남작과 눈이 마주쳤다.
“김수호! 역시 살아 있었군.”
“아직도 마법사의 탑에 못 들어가셨으면 어쩝니까. 해가 다 넘어갔구만!”
“자네야말로 어디 숨어 있다가 이제 나타났는가!”
몸을 날려 매튜 남작 옆에 내려섰다.
“더 늦기 전에 다친 불사인들을 뒤로 이송해서 치료하세요. 저 몬스터들은 제가 맡을게요. 불사인들이 다 재생되고 나면 바로 마법사의 탑으로 쳐들어가죠.”
“알겠네. 와줘서 고맙네.”
매튜 남작이 큰 소리로 외쳤다.
“부상자를 뒤로 옮겨라! 마법사들은 전선에서 빠져 재생 마법을 준비하라!”
남은 금속 몬스터는 여섯.
딱 몸풀기 좋은 숫자였다.
* * *
마법사의 탑.
“김수호 저놈이 어떻게 아직 살아 있는 것이냐!”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사무엘의 큰소리에 데클란이 화들짝 놀랐다.
데클란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폭발의 여파가 너무 커 생존 흔적은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이런 제기랄! 제1 기사단을 통째로 날려가면서 만든 함정이었는데!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을 수가 있냔 말이다!”
데클란은 이번 질문은 자신에게 한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 수 있었다.
이럴 땐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상책이었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사무엘이 다시 평소의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은 기사단과 마법사의 탑에 있는 모든 마법사를 집결시켜라.”
“네?”
데클란은 자신도 모르게 말끝에 물음표를 붙이고 말았다.
“못 알아들었느냐! 모두 집결시키라고! 당장!”
“네, 네!”
마법사의 탑이 생긴 이래 처음 듣는 지시였다.
모든 마법사를 집결시키라니. 그것도 기사단과 함께.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데클란은 사무엘의 혼잣말을 미처 듣지 못했다.
데클란이 나가고 난 집무실.
혼자 남은 사무엘은 바깥 영상을 보며 이를 꽉 물었다.
“천 년 동안 쌓아온 모든 것이 오늘 무너질 수도 있겠구나. 저 지구인 한 놈 때문에…….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란 말인가. 저 괴물 같은 놈을 이곳에 끌어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사무엘이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지구를 건드리는 게 아니었는데.”
* * *
몬스터를 모두 처리하고 산 위로 올라가 최수영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사이 대부분 불사인의 재생이 끝난 것 같았다.
물론 몇몇 불사인은 재생 불가능한 상처를 입어 불사의 삶을 끝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지휘관 막사로 들어서자 매튜 남작과 두 장군이 벌떡 일어나 나를 반겼다.
“어서 오게.”
“어떻게 하기로 하셨나요?”
“지금은 마법사의 탑에서도 움직임이 없고, 이미 해도 완전히 넘어가 내일 동트는 대로 진격하기로 했네.”
“네. 그것도 좋겠네요.”
대니스 장군이 갑자기 뚜벅뚜벅 걸어와 내 양손을 잡았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다 전멸할 뻔하였는데 덕분에 살았소이다.”
“제가 도와드린다고 했잖아요. 시엠브레를 완전히 무너뜨리자고요.”
마르코 장군도 다가왔다.
“처음엔 그냥 호기 있는 청년으로 보았지 뭐요. 볼수록 놀랍구려. 이런 힘을 가진 인간이 존재하다니. 게다가 우리 편이라니.”
“저도 개인적으로 시엠브레에 원한이 있기도 합니다. 너무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여기 지구인 마을을 만들려면 이번 기회에 시엠브레를 완전히 무너뜨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뿐입니다.”
매튜 남작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어찌 되었든 김수호 자네가 도와준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된 것 사실이네. 우리 행성 전체의 은인이야.”
“맞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지구인 마을을 만들고 나면, 이 행성 어느 곳에 있는 차원 이동문으로 지구인이 나오게 되더라도 최고 귀빈 대접을 받으며 지구인 마을로 안내받게 될 겁니다.”
“감사한 말씀이군요. 꼭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대화를 듣고 있던 최수영이 물었다.
“그런데 내일 아침이 되기 전에 마법사들이 달아나면 어쩌죠? 마법진으로 어디든 갈 수 있는 놈들일 텐데요.”
“아마 달아나지 않을 겁니다.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겠지요.”
“확신하시네요?”
“시엠브레의 상징은 대륙 중앙에 있는 거대한 왕궁이 아닙니다. 그건 그냥 제국의 위세를 뽐내기 위한 장식에 불과하죠.”
“그럼 진짜 상징은 마법사의 탑이다?”
“그렇습니다. 여길 뺏기면 시엠브레의 모든 걸 뺏기는 겁니다.”
“그래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달아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무엘 대마법사는 불사의 몸이 되어 천년의 영광을 누려온 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채 도망자가 되는 길을 택하지 않을 겁니다.”
* * *
다음 날 아침.
뿌우우.
연합군의 진격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탑을 빙 둘러 진을 치고 있던 연합군이 탑 바로 앞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수천 명의 연합군이 돌진한다고 마법사의 탑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탑 전체가 강력한 마법 보호막에 둘러싸인 상태. 게다가 흔한 창문 하나 없는 마법사에 들어가는 방법은 마법진 뿐이었다.
탑 주변 이곳저곳에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지만, 그것 또한 마법사가 있어야 이용할 수 있었다.
연합군의 마법사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
마법사들을 총동원해 이곳저곳의 마법진을 구동시킨다고 해도 소수 병력만 드문드문 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계획은 이랬다.
우선 최수영과 나 단둘이 아무 마법진에나 올라섰다.
나는 레온에게 배운 대로 마법진을 가동했다.
주변이 환하게 밝아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최수영과 나는 마법사의 탑 안에 들어와 있었다.
우리를 발견한 마법사 몇 명이 다급히 공격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최수영 쪽이 훨씬 빨랐다.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최수영의 화살이 주변에 있던 불사인 마법사들의 미간을 정확히 뚫어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재생 마법을 써 다시 일어날 테지만 지금 당장은 꿈쩍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간결하고 명확한 공격이었다.
“자, 이번엔 아래로 내려가 볼까? 지난번처럼 위로 올라가는 것보단 아래로 내려가는 게 훨씬 쉽지.”
최수영을 벽 쪽으로 물러서게 한 다음 바닥을 향해 있는 힘껏 대천흑룡을 날렸다.
마그네타 검에서 뻗어 나온 검은 용이 바닥을 부수고 아래로 내려갔다.
쾅, 콰앙, 쾅!
대천흑룡은 보호 마법에 걸려 있는 바닥을 열 개 넘게 뚫어버리고서야 멈추어 섰다.
건물 내부에도 보호 마법이 걸려 있었지만, 외벽에 걸려있는 마법 보호막에 비해서는 약한 편이었다.
나와 최수영은 바닥에 뚫린 구멍을 통해 가볍게 뛰어내렸다.
* * *
7월 8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118,920개]
[단가 68억 원]
[평가 금액 808조 7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