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 * *
“그래서? 진짜 황궁을 지구인이 쓰게 됐다고?”
“응, 세르히오. 이제 이 행성에 넘어오는 지구인들은 모두 그쪽에 모여서 살게 될 거야.”
필라르가 근사하게 익힌 고기 요리를 들고나오며 말했다.
“잘됐네. 지구인들은 정말 대단하구나.”
세르히오가 코를 벌름거렸다.
“아니, 이게 얼마 만에 먹는 고기 요리야. 고마워, 렉스, 샤넬. 잘 먹을게.”
“황궁 냉동 창고에 많더라고. 승전 축하를 위해 싹 꺼내서 푼 걸 좀 가져왔지.”
필라르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거기가 더 재밌을 텐데. 뭐 하러 애써 고기까지 얻어서 이 누추한 델 왔을까?”
“너희랑 노는 게 더 재밌으니까. 그리고 세르히오가 이번 전쟁에 아주 큰 공을 세웠잖아. 내가 연합군에 말해 뒀으니 곧 포상이 있을 거야.”
세르히오는 포상엔 관심도 없다는 듯 고기를 맨손으로 큼지막하게 뜯어 자기 앞접시에 옮겼다.
그 모습을 본 필라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공을 세워? 저 돼지가? 무슨 공?”
“시엠브레의 마법사들이 다른 행성 몬스터를 잡아다가 병기로 만드는 걸 알려줬잖아. 덕분에 미리 대비할 수 있었다고.”
“얘기 들어보니 렉스 네가 그냥 다 썰어버렸다며? 이 돼지가 알려주든 안 알려주든 별로 달라질 것도 없는 거 아니었어?”
“어쨌든 미리 대비할 수 있었지. 하하.”
양 볼 가득 고기를 밀어 넣은 세르히오가 겨우 입을 벌려 말했다.
“그런데 무슨 포상? 고기라도 더 주려나? 이왕이면 오늘처럼 맛있는 고기면 좋겠는데.”
“나도 잘 모르겠는데, 대충 얘기를 들어보니 몬테넬 국왕이 작위를 하사할 것 같던데?”
세르히오가 열심히 씹던 고기를 자기도 모르게 한꺼번에 꿀꺽 삼켜버렸다.
필라르도 나이프와 포크를 멈춘 채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작위?”
“응. 고위 귀족까진 아니더라도 어쨌든 작위를 하사할 것 같더라고. 내가 너 아니었으면 이번 전쟁에서 질 수도 있었다고 이빨을 좀 털었거든. 조만간 왕궁에서 연락이 올 거야.”
“맙소사.”
“우리가 귀족이 된다고?”
세르히오가 갑자기 두 손으로 자기 옷매무새를 슥슥 쓸어내렸다.
손에 고기 기름이 잔뜩 묻었던 탓에 세르히오의 옷도 기름 범벅이 되었다.
옷을 다 쓸어내린 세르히오는 갑자기 허리를 꼿꼿이 펴고 귀족 말투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부인, 오늘 이 요리가 무척 훌륭하구려.”
“미친! 옷이 그게 뭐야! 네가 빨아!”
“어허, 귀부인이 말투가 그게 무엇이오. 나처럼 점잖…….”
퍼억.
결국 참지 못한 필라르가 세르히오의 머리통을 갈겼다.
그때 세르히오 집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폴이랑 에릭 왔나 보다.”
“아까 말한 친구들? 키르칸 출신이라고 했나?”
“응. 승전 파티에 잠깐 참석하고 온다더니 빨리 왔네.”
세르히오가 천천히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밖에는 예상대로 폴과 에릭이 서 있었다.
세르히오는 과장된 몸짓으로 집 안에 들어오라는 표시를 하며 말했다.
“어서 오시오, 손님들. 렉스의 친구분들이라지요?”
어이없는 귀족 놀이에 필라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폴과 에릭이 합류하고 우리 여섯은 밤늦게까지 술과 음식을 즐기며 떠들었다.
“그런데 렉스, 세바니아 왕자는 별 얘기 없어?”
“세바니아 왕자? 아, 그 예전에 활쏘기 대회에서 수영이 쫓아다니던 놈?”
“응. 예전에 널 찾아서 죽인다고 한동안 시끄럽게 굴었었는데.”
서주를 한잔 쭉 들이켠 폴이 대신 답해주었다.
“자기도 귀가 있으면 우리 렉스의 무위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텐데. 감히 이제 와서 찾아와서 뭘 어쩌겠어요.”
필라르가 답했다.
“하긴. 이 전쟁, 렉스 혼자 끝낸 거나 마찬가지라는 소문이 이미 대륙 전체에 퍼져 있어.”
세르히오가 나에게 잔을 부딪쳐왔다.
“그래, 렉스. 이참에 그냥 우리 행성에 눌러앉는 건 어때? 황궁도 지구인 차지가 됐겠다. 렉스가 계속 머물면 여기서 황제처럼 지낼 수 있을걸? 아니지. 아예 황제가 돼버리는 건 어때?”
“하하. 아니야, 세르히오. 지구에 돌아가야지. 그리고 이제 지구에 돌아가면 좀 조용히 지낼 생각이야. 평범하게.”
필라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샤넬이랑 결혼도 하고?”
“어? 응.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딱 보면 알지 뭐. 예전에 만났을 때도 꿀이 뚝뚝 떨어졌지만, 지금은 느낌이 더 다른데? 이미 프러포즈 다 했지? 그치?”
“맞아. 지구에 돌아가면 우리 결혼할 거야.”
최수영은 어울리지 않게 얼굴을 붉혔고 폴과 에릭은 동시에 환호성을 질렀다.
“오오오!”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으면 너희도 초대할 텐데 아쉽네.”
“저 무시무시한 차원 이동문을 통과하라고? 아휴, 아니야. 여기서 축하해 줄게. 너희들이나 저 문으로 왔다 갔다 하는 거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꿈도 못 꿔. 오히려 실수로 안 빨려 들어가면 다행이지.”
“그건 그래요. 결혼 축하해요. 렉스, 샤넌. 아니지. 수호, 수영.”
세르히오가 물었다.
“지구엔 언제 돌아갈 거야?”
“곧 돌아가야지. 지구인 부대가 황궁에 안전하게 자리 잡는 걸 보면 바로 돌아갈 거야. 돌아가는 데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니 우리도 서둘러야지.”
“아쉽네. 온 김에 좀 머물다 가면 좋을 텐데.”
* * *
며칠 후 대마법사와 황제는 수많은 군중이 모인 광장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시엠브레 제국은 공식적으로 완전히 패망처리 되었고, 제국이 있던 대륙은 주변 네 왕국이 나누어 통치하기로 하였다.
키르칸으로 돌아가는 길.
“그럼 키르칸은 언제 왕국이 되는 걸 선포하나요?”
매튜 남작이 놀란 눈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수호, 어떻게 알았지? 아… 폴. 그놈이 말했겠군. 하긴, 자네에겐 숨길 필요 없지. 돌아가서 서류들을 준비하는 대로 바로 선포할 계획이네.”
“초대 왕을 투표로 뽑는다면서요?”
“별걸 다 얘기했군. 자네한테 배운 것이지. 민주주의라고 했나?”
“네, 맞아요. 국민이 주인인 왕국이죠.”
“멋지더군. 국민이 주인이라…….”
“남작님은 잘 해내실 거예요.”
“뭘 말인가?”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왕 노릇이요.”
“투표로 뽑는다고 하지 않았나. 키르칸엔 뛰어난 인재들이 많다네. 그리고 나는 선거에 나가지 않을 계획이야.”
“안 나가신다고요? 매튜 남작님이 빠지면 누가 왕이 되나요.”
“그야 왕국의 주인인 국민들이 알아서 뽑겠지.”
“어쩌면 허울뿐인 왕이 될 수도 있어요. 키르칸의 상징과도 같은 매튜 남작님이 계신 이상은요.”
“그것도 예상하고 있네. 하지만 물은 고이면 썩는 법. 좋은 왕이든 나쁜 왕이든 수많은 왕을 거치면서 키르칸은 다시 발전해 나가겠지. 나 같은 불사인이 왕이 되어선 절대 안 되네.”
“폴과 에릭은 남작님이 왕이 되는 걸로 알고 있던데, 남작님 생각은 아니었군요.”
“시엠브레 놈들이 유일하게 잘한 짓이 하나 있는데, 모든 왕국의 왕족은 절대로 불사인으로 만들어주지 않은 것이지.”
“그렇군요.”
“난 그저 이 불사인의 몸으로 키르칸을 지켜낼 수만 있으면 된다네. 다시는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왕국으로 만들 생각이네.”
“대륙 최강의 불사인 검사가 지키는 왕국을 누가 감히 넘보겠어요.”
“언제 또 시엠브레 같은 놈들이 나올지 모르니 대비는 해둬야겠지.”
“그건 맞아요. 사무엘이 연금술에 대해 실토하기 전에 처형해 버린 건 정말 잘하신 선택이에요.”
“연금술, 그건 반드시 없어져야 해. 이 모든 일들이 모두 그 연금술에서 비롯되었어.”
“맞아요. 모든 일의 시작은 연금술에서 시작되었죠. 따지고 보면 지구 침공도 그렇고요.”
“자네 같은 영웅이 있으니 지구인들은 든든하겠구만.”
“설마 또 누가 대규모 침공해 오거나 하겠어요? 이제 곧 저는 지구인들에게 별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게 될 거예요. 강대국들은 게이트에 대한 대비도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것 같고요.”
“그런가. 그럼 그것 또한 좋은 일이지. 영웅이 필요 없는 세상이야말로 평화로운 세상 아닌가.”
“그렇죠. 그래서 저도 이제 조용히 살려고요.”
“그거 좋군. 안 그래도 자네의 성장세를 보니 그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훤히 보이던 참이었네.”
“다사다난했죠.”
“전장에 있느라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으니 내일 키르칸에 도착하거든 그 다사다난했던 일대기를 좀 들려주게.”
“엄청 길 텐데, 감당하시겠어요?”
“하하. 물론이네. 뭐 신이라도 만나 한판 붙고 온 건 아닐 테니 말일세.”
“붙었었죠.”
“뭐?”
“바다의 신하고 한번 붙었었다고요.”
“…아무래도 정말 긴 이야기가 될 것 같군.”
* * *
“그럼 떠나보겠습니다.”
“잘 가게. 혹시라도 다시 들를 일이 있으면 또 봅세.”
“또 뵙고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행성 여행은 이제 그만 하고 싶기도 하고 그러네요.”
“하하.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하네. 이틀을 들어도 자네 행성 여행 얘기를 다 못 들었으니 말일세.”
최수영이 폴, 에릭에게 인사했다.
“폴, 에릭. 잘 있어. 우리 갈게.”
폴이 제 가슴을 쾅쾅 치며 말했다.
“나중에 저도 수호처럼 강해지면 지구에 놀러 갈게요. 그때 만나요.”
“나처럼? 하하. 쉽지 않을 텐데. 어쨌든 올 수 있으면 놀러 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찾아오면 돼.”
“알았어요. 레온한테도 조만간 내가 보러 간다고 전해 줘요.”
“그래, 알았어. 레온이가 좋아하겠네.”
사람들과 인사를 마친 후 최수영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그럼 갈까?”
“응, 오빠.”
나와 최수영은 그대로 몸을 띄워 하늘 높이 올라갔다.
“해 지는 쪽으로 쭉 가보자. 가다 보면 게이트 하나는 나오겠지.”
“오케이, 집으로 돌아가자고요.”
삼십여 분을 날아가다 보니 저 아래에 크지 않은 블랙 게이트 하나가 보였다.
“저깄다.”
“한 번에 지구가 나오길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
“한 번에 안 나오면 어때. 우리 둘뿐인데. 이런 식이면 금방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든든하네, 우리 오빠.”
그대로 몸을 날려 블랙 게이트 앞에 내려섰다.
예의 그 몸이 길어졌다 줄어들었다 하는 느낌을 느끼며 게이트를 통과했다.
문득 이 게이트는 무슨 원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쪽은 들어갈 수만 있고 한쪽은 나올 수만 있는 게이트.
서로 다른 두 차원을 아무렇지 않게 잇다가 사라져버리는 차원 이동문.
언젠간 지구의 과학자들이 이 게이트의 작동 원리를 알아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쯤 되면 게이트를 이용한 관광 상품도 개발이 될 거고…….
“오빠!”
잠시 허튼 생각을 하는 사이, 최수영이 내 어깨를 짝 소리 나게 쳤다.
“어? 한 번에 성공한 거야?”
“응! 지구 맞는데, 여기?”
스페인어로 경찰이라고 적힌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도시 한복판의 게이트로 빠져나온 상태였다.
“대박. 진짜 한 번에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나는 안주머니에서 신분증 하나를 꺼내 앞으로 쭉 내밀어 보였다.
지구방위위원회에서 발급받은 헌터 신분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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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119,130개]
[단가 68억 원]
[평가 금액 810조 1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