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 허염환 】
민지훈과 유민철의 비무는 조금 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양상이었다.
두 사람은 공격 마법과 실드 마법을 번갈아 쓰며 숨 가쁜 공방을 반복했다.
어느 한쪽도 밀리지 않은 채 화려한 마법 공격을 펼치는 두 사람을 모든 디펜서들이 넋 놓고 바라보았다.
실력은 한참 뒤처지지만, 이근수와 정성민의 움직임은 자기들도 흉내라도 내 볼 수는 있는 상황.
하지만 마법은 달랐다. 마나 친화력이 있으면서 머리까지 똑똑해야 하니 마법을 배울 수 있는 인원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디펜서 전체 인원 중 마법 본부에서 마법을 배우고 있는 사람은 여섯 명에 불과했다.
결국 두 사람의 비무는 무승부로 끝이 났다.
원래 마법사들의 싸움이 그러했다. 비슷한 실력을 갖춘 두 명이 일대일로 붙으면 쉽게 승부가 나지 않는다.
어쨌든 네 팀장의 성취는 정말 놀라운 수준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라울이 살아 있을 때 수준. 아니, 그 이상으로 올라와 준 느낌이었다.
확실히 N마켓에만 의존하던 예전에 비해 성장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모두 천마와 레온 덕분이었다.
다음으로는 파트장급, 그리고 일반 팀원급들의 비무가 이어졌다.
저녁 여덟 시가 되어서야 모든 인원의 비무가 끝이 났다.
개중에는 예전엔 미처 몰랐던 새로운 인재들도 제법 섞여 있었다.
내공 운용을 함께 익히면서 실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디펜서들이었다.
이제는 7등급 몬스터쯤은 나나 최수영이 없어도 디펜서 두 개 팀 정도가 투입되면 무리 없이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나는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왔고, 이제 전략기획실에서는 오늘의 비무 영상을 토대로 새로운 팀 구성을 짤 것이다.
집중해서 한 명 한 명을 관조하며 비무를 관전했더니 피로가 몰려왔다.
저녁은 방으로 좀 가져다 달라고 하려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때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발신 번호 표시 제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개인 전화로 모르는 전화가 걸려 올 일이 없을 텐데.
받지 말까 하다가 혹시 스테노가 전화기를 잃어버린 채 지구에 돌아왔나 하고 통화 버튼을 눌러보았다.
“네, 김수호입니다.”
- 수호냐.
언제나 같은 무미건조한 목소리.
정말 오랜만에 듣는 전화 목소리였지만 한 번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허염환?”
- 어. 나다.
“너 인마, 어떻게 된 거야? 지난번엔 그렇게 또 사라져버리고. 도대체 어디서 지내?”
- 그땐 빨리 가볼 일이 있다고 했잖아.
“지금은 어디야?”
- 여기 강화도. 너희 회사 앞 횟집인데, 바쁘냐?
“강화도? 갑자기 또 무슨 횟집?”
- 안 바쁘면 잠깐 나와라. 소주나 한잔하자.
소주? 허염환이 술을 마신다고?
도대체가 알 수가 없는 녀석이었다. 지난번엔 갑자기 찾아왔다가 그렇게 사라져버리더니, 오늘은 또 갑자기 전화해서 회사 앞이니 소주 한잔하자고?
“알았어. 나갈게. 어디 횟집인데?”
- 너희 회사에서 제일 가까운 횟집.
“어딘지 알 것 같다. 지금 바로 나갈 테니까 기다려.”
- 응. 천천히 와도 돼. 오늘은 안 바쁘니까.
“뭐 회는 시켜 놨냐? 저녁은 먹었어? 나는 아직 저녁 먹기 전이다.”
- 내가 돈이 어딨어서 회를 시켜. 여기 비싼 집 같은데.
“뭔 소리야. 그럼 그냥 횟집 앞에 서 있다는 거야? 내가 전화 안 받았으면 어쩌려고.”
- 받았으니 됐지.
“금방 갈 테니까 뭐라도 네 마음대로 시켜 놔.”
- 알았다.
대충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회사 밖 횟집으로 가보자 정말 허염환이 있었다.
홀은 없이 룸으로만 되어 있고 코스 요리를 파는 횟집인데, 허염환은 식당 앞 수조 옆에 야장을 펴고 앉아 있었다.
“허염환!”
“어, 수호 왔냐?”
“이게 뭐야? 이 집에서 야장도 펴줘?”
“김수호 대표 친구라고 하면서 부탁하니까 해주던데? 이거 테이블은 옆에 편의점에서 직접 빌려오더라고.”
“이 더운 날 무슨 야장이야, 인마.”
“오랜만에 먹는 회인데 수조 보면서 먹고 싶어서.”
“그래, 뭐. 너 알아서 해라. 음식은 시켰어?”
“응. 제일 비싼 코스로.”
이놈 좀 달라진 것 같은데?
“어… 잘했다.”
잠시 후 회와 요리가 한가득 차려졌다. 테이블에 자리가 없어서 횟집 사장님은 편의점에 가서 야외 테이블을 하나 더 빌렸다.
편의점 밖에 나왔다가 내 얼굴을 본 점주는 두 개밖에 없는 야외 테이블을 모두 빌려줘 버리고 말았다.
음식들과 함께 소주 몇 잔을 주고받자 허염환의 얼굴이 벌게졌다.
“너무 오랜만에 마셔서 금방 취하네.”
“술을 마셔본 적은 있고?”
“몇 번 있지.”
“다행이네. 술은 그만 먹고 이거 요리나 마저 먹어. 코스 다 나오려면 멀었어.”
“푸우우.”
푸우우 소리를 내며 허염환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호야. 저 밤하늘. 무섭지 않냐?”
“갑자기?”
“저 시커먼 밤하늘 위에 뭐가 있는지 모르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건 대낮의 하늘도 마찬가지지.”
“아무튼 무서워. 밤하늘은. 수호야. 올해가 몇 년인지 알아?”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2026년이잖아.”
“어디부터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내 메타버스 얘기 좀 들어볼래?”
그래, 해봐라. 제발.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말해 달라고.
“뭐든 들어줄 테니까 말해 봐.”
“나한테 받은 코인으로 그 많은 일을 겪어 놓고 아직도 내 말을 못 믿는 건 아니겠지?”
“못 믿다니. 믿지. 다만 이젠 좀 무서울 뿐이지.”
“오늘은. 2126년 8월 24일이야. 그리고 인간은 참 나약한 존재야.”
2126년? 메타버스 얘기가 질려서 이젠 시간 여행 얘기를 들려주려나 보다.
하지만 이 녀석의 말을 허튼소리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이십 년 전, 나약한 인간은 멸종이 될 위기에 처했어. 과학 기술이 그렇게 발전했어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지.”
“멸종이라니? 왜? 핵전쟁이라도 일어났어?”
“그랬으면 인간을 탓하기라도 하지. 인간은 그저 나약한 존재였을 뿐이야.”
“그래서 왜 멸종 위기에 처했는데?”
“지구에 소행성이 떨어졌어. 그리고 그건 아무도 막을 수 없었지.”
“소행성?”
“응. 지름이 1킬로미터 조금 넘는 소행성이었어. 이십 년 전에 지구를 향해 시속 7만6천 킬로미터로 날아왔지.”
“그래서… 지구가 멸망했다고?”
“응. 궤도를 바꾸어 보려고 전 세계의 과학자가 달라붙었지만 실패했어. 아, 궤도를 바꾸긴 했지. 러시아에 떨어지려던 게 태평양에 떨어졌으니까.”
허염환은 회를 한 점 집어 초장에 콕 찍었다.
“암석 증기가 지표면을 뒤덮었고 태평양은 끓어올라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어. 엄청난 먼지와 파편, 암석 증기가 지구를 뒤덮어버렸고 지구의 온도는 10도나 내려갔지. 빙하기야.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지독하게 어두운 빙하기. 무려 2년이나 지속됐어.”
이제는 뭐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일단 계속 들어나 보자.
“그래도 인간들은 살아남았나 봐?”
“극히 일부만 살아남을 수 있었지. 우주로 피난을 갔다가 돌아온 사람도 있고, 충돌 충격을 피해 미리 비행기를 타고 충돌 반대편 상공에 떠 있었던 사람도 있고, 지하 벙커에 들어간 사람도 있지.”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네.”
“그래. 어쨌든 충격을 피해 낸 지구인들은 다시 살 만한 곳을 찾아 땅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이미 지구의 모든 동식물은 죽고 난 후였어.”
“식량이 없었겠구나!”
“그뿐이겠어? 햇빛은 들지 않는데 자외선은 피부를 태우려고 들고, 지상엔 더 이상 먹을 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지독한 가뭄에, 추위에, 끝없는 밤.”
“상상이 가질 않는다.”
“인간들은 별수 없이 지하로 기어들어 갔지. 어쨌든 살아야 하니까. 알려진 지하 벙커 중 남아 있는 곳들에 인간들은 자리를 잡았어. 비축 식량들과 벙커 안에서 일부 재배하고 키운 동식물이 유일한 먹을거리였지.”
“그래도 대단하다. 모든 동식물이 멸종했는데도 인간은 살아남았어.”
“바퀴벌레도 살아남았을걸? 어쨌든 일단 인간은 살아남았지. 하지만 앞으로가 문제였어. 이대로면 결국 다 죽는 건 마찬가지였던 거지.”
영화 시나리오를 듣는 건지, 타임머신을 타고 온 미래인과 대화를 하고 있는 건지. 그냥 미친놈의 망상을 들어주고 있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정답은 AI가 찾아냈어. 운석 충돌 전, 큰 이슈가 됐었던 게임이 있었거든.”
갑자기 또 무슨 게임 얘기야.
“게임?”
“응. 캡슐에 들어가서 하는 게임이었는데, 게임에 중독된 게이머들이 보름씩 캡슐에서 나오지도 않고 게임만 하는 일이 벌어졌었지.”
“그게 가능해?”
“그래서 이슈가 됐어. 보름이 넘게 캡슐 안에 들어가 있던 게이머들의 영양 상태가 이상했던 거야.”
“당연히 이상하겠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안 죽은 게 용하지.”
“맞아. 그게 이상한 점이야. 다들 영양 실조 상태가 되어서 나오긴 했지만, 보름 동안 아무것도 안 먹고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던 것치곤 너무 건강했던 거지.”
“흥미롭네.”
“그땐 굉장히 흥미로운 이슈에 불과했지만, AI가 결국 거기서 인류 생존의 답을 찾아냈어.”
나도 모르게 소주잔에 손이 갔다.
꿀꺽.
달고 쓴 소주가 바싹 마른 목을 적셨다.
허염환은 이미 취기가 올랐는지 더 이상 술은 마시지 않았다.
“그 게임은 캡슐에 들어간 인간의 뇌파에 직접적인 자극을 줘 실제 게임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게임이었어.”
“그런데?”
“게임기와 뇌파의 링크 강도가 너무 높았던 거야. 우리 몸도 결국 원자 구조의 결합체라는 건 알고 있지?”
“뭐 잘은 모르지만 어쨌든 그렇겠지. 쪼개다 보면 원자이고 원소겠지.”
“역시 똑똑해. 내 친구.”
“이걸 모르는 사람도 있냐?”
“바로 받아들이냐의 차이는 있지.”
“아무튼.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 높은 링크 감도가 인체에 영향을 준 거야. 게임 속 캐릭터가 움직이면 실제 게이머도 근육이 붙고, 게임 속 캐릭터가 음식을 먹으면 실제 게이머도 영양분이 채워진 거지. 복잡한 얘긴데, 정확히 말하면 영양분이 채워진 건 아니고 손실이 일어나지 않은 거야. 원자 구조의 관점에서 말이야.”
“캡슐에 들어가 있는 동안 뇌파인가 링크인가 그 영향으로 영양분이 소화되고 에너지가 되고 하는 과정이 생략됐다는 건가?”
허염환이 자기 소주잔을 들어 올렸다.
“맞아. 이 유리잔처럼. 아무런 변동이 없는. 에너지의 이동이 필요하지 않은.”
“이제 좀 어렵다.”
“그래. 그런 걸 다 이해하려고 할 필요는 없어. 내가 하려고 하는 말은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아무튼 그 게임의 방식. 뭐? 뇌파와 링크? 그런 걸로 인류 생존의 답을 찾았다는 거구나. 식량이 없는 세상에서 버틸 수 있는.”
“정답. 하지만 완전히는 아니야. 소량의 식량은 결국 필요했지. 캡슐 속에서 영원히 사는 건 또 인간의 삶이 아니긴 하니까. 과학적으로도 불가능했고.”
“인간들이 캡슐에서 나와 있는 시간도 있는 거구나?”
“응. 그래서 AI는 ‘잠’을 이용했어. 캡슐에서 자는 동안 메타버스 속 캐릭터와의 링크를 통해 근육과 에너지를 공급하는 거야.”
“자는 동안이라…….”
“응. 잠을 오래 못 자면 어떻지?”
“졸리지.”
“그런 거 말고. 막 이성이 끊어질 것 같고 현실이 현실 같지 않게 느껴지고 그런 느낌.”
“겪어본 것 같네.”
“그건 이곳의 네가 메타버스에서 나갈 시간. 곧, 현실에 있는 캡슐의 링크가 풀릴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이야.”
미친. 졸리면 멍해지는 게 이 메타버스를 나갈 시간이 지나서 그런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