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수많은 해결 방법을 모색했지만, 우리만으로는 역부족이야.”
“네 말만 들으면 그래 보인다. 넥시트라는 그 AI와 대적하긴커녕 당장 현실로 넘어갔다는 그 생명체들도 해결하기 어려워 보이는데? 엄청 센 놈들도 있을 텐데.”
“응. 그래서 네가 좀 와줬으면 좋겠다는 거야. 인류를 위한 일이야. 너 또한 그 인류에 포함이 되어 있고 말이야.”
“링크가 끊기면 기억도 끊긴다며? 그리고 현실 김수호가 나 같은 이런 비현실적인 힘을 가지고 있긴 해?”
“현실 김수호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지. 네가 워낙 잘 먹고 많이 움직여서 그냥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건강한 정도?”
“그런데 내가 뭘 어떻게 도와줘? 내가 그쪽으로 넘어가면, 그러니까 그 링크라는 게 끊기면 기억도 사라진다며. 아니지. 애초에 도와달라고 하려면 그쪽 김수호한테 부탁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말했다시피 현실 김수호는 많이 건강한 일반인일 뿐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네 말대로면 나는 가상 현실 속 아바타에 불과한데.”
“수호야.”
허염환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또다시 소주를 한 잔 따라 입에 털어 넣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렸지만 제법 익숙해졌는지 이번엔 캑캑거리지는 않았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네가 현실로 돌아오면… 그러니까, 네 말대로 링크가 해제되고 현실 김수호가 캡슐에서 깨어나면 넌 우릴 도울 수 없지.”
“내 말이.”
“하지만 링크가 해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넘어온다면? 캡슐에 의해서가 아니라 네가 스스로 넘어온다면?”
“뭐?”
“정상적으로 캡슐의 링크가 끊어진 게 아닌 상태에서 네가 억지로 넘어오는 거지. 메타버스와 현실의 벽을 허물고.”
“벽을 허물어? 그런 게 가능해?”
“응. 메타버스 속 가상의 생명체들도 실제가 되어 현실로 넘어오는데 너라고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
“뭐야. 그럼 현실 김수호가 둘이 되는 거 아냐? 무슨 도플갱어처럼. 만나면 바로 현실 김수호를 죽여 버려야 하는 건가.”
“아니야. AI 넥시트가 만든 메타버스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넌 가상의 생명체가 아니잖아. 네가 현실 김수호고 현실 김수호가 너라니까.”
“그러니까 네 말은…….”
“응. 네가 메타버스의 벽을 허물고 현실로 넘어오면 너와 현실 김수호의 기억이 합쳐질 테고, 네가 가진 힘도 합쳐지겠지.”
“…지겠지? 추측이네?”
“응. 우리도 많은 가설을 세우고 연구와 실험을 해보긴 했는데, 사실 아직 완벽한 이론은 아니야. 이미 인간은 넥시트의 지능을 넘어설 수가 없거든.”
“뭐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치자. 그쪽으로 넘어갈 방법은 있고?”
허염환은 옆에 놓여있는 횟집 수조를 바라보았다.
“이거 봐, 수호야. 유리로 된 이 횟집 수조. 물이 순환할 수 있도록 위아래로 두 개가 연결되어 있지? 저 아크릴 관으로 말이야.”
“갑자기 또 무슨 수조 타령이야.”
허염환의 말대로 두 수조는 물을 순환시키기 위해 아크릴 관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설마…….”
“맞아. 예를 들어 저 안의 물고기가 수조를 깨고 바깥으로 탈출하려고 한다면, 두꺼운 유리 수조를 깨는 게 빠를까 두 수조를 연결한 아크릴 관을 깨는 게 빠를까?”
“…….”
“수호 너라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라고 믿어. 그리고 이곳의 다른 어떤 인간도 저 아크릴 관을 깰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수호 너는 달라. 넌 깰 수 있을 거야.”
저 두 수조가 지구와 테라 행성이라고 치면, 저 아크릴 관은 바로 게이트란 소리.
“그러니까. 내가 억지로 게이트를 깨부수면 현실로 넘어갈 수 있다?”
“역시 똑똑해.”
“아니지. 넘어갈 수‘도’ 있다?”
허염환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와는 너무 다른 허염환을 보고 있자니 문득 또 궁금한 게 생겼다.
“야, 너랑 나는 저쪽 현실에선 아는 사이냐?”
“응, 친구지.”
“그럼 나랑 수영이는?”
“…수영이랑 너는 모르는 사이.”
“하아. 근데 어떻게 너랑 나랑은 친구야?”
“내가 널 찾아갔지. 나는 이곳의 김수호를 잘 알고 있으니까 그곳의 김수호와 친해지는 것도 어렵지 않았어.”
“넌 양쪽의 나와 모두 친구다?”
“응.”
그럼 다시 본론.
“그리고 내가 지금 그 현실 세계로 넘어가서 이곳에서 넘어간 가상 생명체들을 무찔러 줬으면 좋겠다?”
그때 허염환이 갑자기 심각한 표정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호야, 난 이제 가봐야겠다.”
“뭐야, 또 갑자기. 오늘은 급히 안 가도 된다며.”
“내가 조금 흥분했어. 차근차근 설명했어야 했는데 너한테 너무 많은 정보를 알려줬다. 너도 너무 급작스러운 정보에 혼란스러울 것 같고.”
“내가 혼란스러울까 봐 갑자기 가버린다고? 이런 말들을 던져 놓고? 뭐 하는 거야, 지금?”
“그게 아니야. 넥시트가 개입하기 시작했어. 그 전에 현실로 돌아가야 해.”
“뭐?”
“다시 만나러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올 수 있으면 마저 얘기를 나누자. 얼마 남지 않은 인류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이곳의 수호 너밖에 없다는 거 명심해. 너라면 와줄 거라고 믿는다.”
허염환이 점차 투명하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야!”
내가 뻔히 보고 있는 앞에서 점차 투명해지던 허염환은 그대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 * *
태어나서 이렇게 혼란스러워 본 건 처음이었다.
아니, 태어나긴 했나.
애초에 이곳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라고 했지. 가족도 가짜고.
혼자 있고 싶은 마음에 며칠을 호텔에 틀어박혀 밖에 나가지 않았다.
처음엔 수많은 사람에게 연락이 밀려왔다.
마지막으로 최수영에게 휴대폰을 좀 꺼두겠다고 문자를 보낸 후 이틀 전부터는 휴대폰도 꺼둔 상태다.
나흘.
나흘간 호텔에 틀어박혀 허염환과의 대화를 상기했다.
철학 관련 교양 수업을 들을 때나 고민하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을 이렇게 심도 있게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결국 나흘째 호텔에서 고민하고 있는 이 껍데기는 가상 현실 속 아바타에 불과하지만, 이 고민을 하고 있는 건 또 현실에 존재하는 ‘나’였다.
다만 캡슐에서 깨어나면 기억을 잃어버리게 될 뿐. 지금 고민하고 있는 존재는 분명히 ‘나’ 자신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한 고민들에 나흘간 밥 한 번 제대로 먹은 적이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또 정리하기 위해 사탕을 먹으며 뇌에 당분만을 공급했다.
하지만 나흘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긴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생각만 하기에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현실 김수호는 요즘 왜 이렇게 캡슐에서 늦게 깨어나는지 불만이겠군.
오히려 좋으려나? 캡슐에서 깨어나면 지옥 같은 환경이 기다리고 있을 뿐일 테니.
눈을 감고 호흡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기를 반복했다.
잠시 후 눈을 떴다. 생각들이 정리되며 머릿속이 다시 맑아진다.
거실로 나가 프론트로 연결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 네, 프론트입니다.
“룸서비스. 가장 비싼 메뉴로. 3인분.”
- 네. 준비되…….
뚝.
나는 평소에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는다.
흙수저의 삶을 살아오며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해왔기에 그들의 고충을 잘 알기 때문이다.
꼭 일을 해봐서라기보다는, 나는 원래 사람들을 제법 존중하는 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제 뭐 그런 것쯤 어떠랴.
수화기 너머의 저 직원이 진짜 사람인지 NPC인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
심지어 NPC일 확률 99.5퍼센트.
게다가 0.5퍼센트의 확률로 실존하는 인물의 아바타라고 해도, 캡슐에서 깨어나면 모두 사라질 기억.
방금의 짧은 통화는 나흘간의 무거운 고민 이후 가장 먼저 나타난 나의 태도 변화였다.
나도 모르게 나온 나의 딱딱한 말투에 이미 결정했던 결심이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
이미 이곳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 * *
배가 불러왔지만, 꾸역꾸역 음식을 전부 욱여넣었다.
그렇게도 맛있는 음식 먹는 걸 즐겼던 나였는데, 호텔의 최고급 요리에도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샤워를 하고 옷을 챙겨입은 후 호텔 밖으로 나왔다.
차를 몰고 30분여를 달리자 저 앞에 거대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메타디펜스.’
설립된 지 5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대한민국의 어느 기업보다도 영향력이 큰 회사.
피식 웃음이 나왔다.
대표실로 들어서며 비서에게 최수영을 불러달라 말했다.
잠시 후 노크도 없이 대표실 문이 벌컥 열렸다.
“뭐야! 도대체! 전화기까지 꺼놓고!”
최수영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 큐브 등장 이후 일어난 그 많은 일들을 모두 함께 겪은 사람.
하지만 현실에선 나를 모르는 사람.
“일단 앉아.”
씩씩거리는 최수영의 얼굴엔 분노가 서려 있었지만, 그 뒤엔 큰 걱정이 담겨 있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뭐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어디 말해 봐.”
“얘기가 좀 길어. 들어줄 수 있지?”
달라진 내 표정과 말투에 최수영이 사뭇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나 나를 잃을까 하는 두려움까지.
그녀의 표정, 호흡, 심장박동에서 드러나는 모든 감정들이 마나의 흐름을 타고 나에게 전해져 왔다.
“오빠, 무슨 일인데?”
* * *
다음 날 오전.
최수영이 밤늦게 대표실을 나선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이곳에 앉아 있다.
내 앞에는 A4용지 수십 장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
A4용지에는 그동안의 일들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나의 사색이 여과 없이 적혀 있었다.
빨간 형광펜으로 유독 큰 동그라미가 여러 개 칠해져 있는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테라 행성에 대한 메모였다.
마법, 연금술, 숲 복원 마법.
그중에도 가장 많은 동그라미가 칠해진 부분은 ‘숲 복원 마법’.
어젯밤부터 익숙해진 혼잣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넥시트. AI인지 양자컴퓨터인지 하는 이놈. 소행성 충돌로 폐허가 된 현실 지구를 빠르게 되살릴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어. …테라 행성은 그 시뮬레이션이었던 거야.”
숲 복원 마법을 살펴보던 눈동자가 연금술에 대한 메모로 향했다.
금속 신체와 무한한 생명…….
“인간들과 함께 무한한 삶을 살아보기로 했던 건가. 처음엔 자신을 만들어 준 인간들에게 무척 호의적이었던 게 분명해. 대부분의 고민이 인간의 생존에 닿아 있어.”
무언가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른 나는 왼손으로 종이를 뒤적거리다가 공룡 행성에 관해 메모한 종이를 집어 들었다.
“공룡 행성은 소행성 충돌 이후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시뮬레이션해 보려고 만든 행성이겠지.”
내 눈이 그리스로마신화 행성에 대한 메모를 향했다.
“…저건, 자기 말고 진짜 신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고 있었던 건가?”
이렇게 각 행성들의 존재 이유가 소행성 충돌 이후 지구를 관리하고 되살리기 위한 시뮬레이션이라는 생각에 다다르자, 무림 행성이 왜 존재하는지는 깊은 고민도 필요하지 않았다.
“악조건 속에 점점 약해지는 인간의 신체를 빠르게 강화할 방법을 찾아보던 거였겠지. 인간에게 호의적이었다면, 어쨌든 최종 목표인 연금술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인간의 신체를 강화시켜 어떻게든 살아남게 해야 했을 테니까.”
비서실로 연결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레온 본부장 바로 대표실로 오라고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