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 * *
“수호 형. 갑자기 테라 행성에 가자니요?”
“가면서 설명해 줄게. 얘기가 길어.”
“아카데미는 어쩌고요? 다음 주에 교육부의 내부 시설 심사가 있어요.”
“너한텐 정말 미안하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야.”
“네? 언제는 또 레오니 아카데미 설립이야말로 게이트로부터 지구를 지키기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이라면서요.”
“미안하게 됐다. 나중에 설명해 줄게. 그리고 내가 해줄 말들은 너한테는 정말 충격적인 이야기일 수 있어. 어쩌면 내가 받은 충격보다 훨씬.”
레온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목소리 톤도 제법 높아진 상태였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며칠 잠수 타다 돌아왔다면서요? 형, 진짜 무슨 일 있어요?”
“응. 무슨 일 있어. 레온아. 그래도 형 도와줄 거지?”
“당연하죠. 아카데미도 형 도와주려고 이 고생해서 만들고 있는 거잖아요. 밥값은 하라면서요.”
“밥값 같은 건 농담이고. 어쨌든 넌 형 편 맞지?”
“당연하죠. 왜 자꾸 그런 걸 물어요. 오늘 진짜 이상해요, 형.”
“어쨌든 오늘 저녁에 출발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우리 둘만 간다. 빨리 갔다 빨리 올 거야.”
“뭐, 알겠어요. 어쨌든 다시 행성 여행을 떠나는 거네요? 오랜만이다. 한국 밖으로 나가는 거.”
“아마 곧 더 엄청난 여행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 * *
레온을 등에 업고 빠르게 이동하며 일곱 개의 게이트를 통과하자 테라 행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했네. 오늘은 야영하자.”
“노숙은 진짜 오랜만인데요?”
“레온이 이 자식 아주 지구인 다 되셨어.”
“그럼요. 저는 메타디펜스의 본부장인데요. 그것도 마법 본부.”
정령의 마법 주머니에서 원터치 캠핑 텐트를 꺼냈다.
“이것 좀 치고 있어. 형은 불 피울 나뭇가지 좀 모아올게.”
그렇게 야영 준비를 마친 후 나는 조심스럽게 레온이에게 현실과 메타버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텐트는 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레온과의 대화는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텐트는 덩그러니 우리 둘 뒤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최대한 덜 충격 받게 잘 풀어서 설명해 줬지만, 역시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럴 수밖에.
나는 현실 인물의 아바타이기라도 하지만, 레온은 완전한 가상 인물, NPC.
“레온아, 넌 똑똑하니까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잘 들어봐. 이곳이 내가 말한 현실 세계의 메타버스잖아. 가상 현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말한 현실 세계 역시 또 다른 현실 세계의 메타버스일 수 있어. 어쩌면 이 세상은 누가 처음인지도 모를 만큼 셀 수 없이 많은 메타버스들로 이루어졌을 수도 있지.”
“그건 이해했어요.”
“그러니까, 실존 인물이고 가상 인물이고 하는 게 큰 의미는 없을 수 있다는 말이야. 넌 2126년 지구에서 만들어낸 메타버스의 가상 인물이지만, 나를 포함해 2126년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또 다른 어딘가에서 만든 메타버스의 가상 인물일지 모른다는 거지.”
“그것도 이해했어요. 하지만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네요.”
“응. 그렇게 세상의 기원을 찾아가다 보면, 거기에 신이 있을지 양자컴퓨터가 있을지 모른다는 얘기고. 이 세상의 기원이 되는 신을 찾는다고 쳐도, 그 신 또한 다른 신이 만든 가상 현실일 수…….”
“이해했으니까 그만해요, 형. 지금 제가 가상 인물이라는 걸 위로하려고 그렇게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모든 세상의 인물들을 가상 인물로 만들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양자역학에 의하면 확률적으로는…….”
“알아요. 저도 양자역학 책 본 적 있어요. 너무 애써 설명하려고 하지 마요, 형. 다 이해했으니까.”
“고마워. 잘 이해해 줘서.”
“뭐 어쩌겠어요. 이 사실을 비관하고 자살한들, 가상 현실의 NPC 하나가 사라지는 것뿐. 그거야말로 저에게 제일 못할 짓 같네요. 진짜든 가짜든 간에 중요한 건, 전 제 의지가 있고 그 의지대로 행동하는 주체라는 거니까요.”
“그렇지. 그냥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면 되는 거야.”
“그래요. 어차피 많은 인간은 신을 믿잖아요. 신이 나를 만들었든, AI가 나를 만들었든 달라지는 건 없죠, 뭐. 이 세상과 나를 창조한 건 사실이니까.”
“그래. 그래서, 어때? 형이랑 일단 한 단계 위로 올라가 볼까? 이 메타버스를 만든 현실 세계 말이야.”
“그러죠, 뭐. 어차피 여기 태어난 이상, 그것보다 의미 있는 일은 없을 것 같네요. 신의 피조물이 신의 영역에 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대단하다.”
“뭐가요?”
“레온이 너 말이야. 넌 또 너대로 정말 대단하네. 그런 결론을 하룻밤 만에 이렇게 쉽게 내다니. 내 고민이 너보단 쉬웠을 것 같은데도 형은 나흘이나 걸렸거든.”
“형 말대로 하면 결정하는 데 어려운 것도 없죠, 뭐. 비록 지금은 형은 현실 세계에도 살고 있고 저는 여기만 있는 NPC이지만, 제가 형 따라서 현실 세계로 넘어가고 나면 그땐 형이랑 저랑 동등해지는 거 아니에요?”
“아, 그렇지.”
“그런데 마다할 이유가 있나요. 자, 어서 가요. 숲 복원 마법 배우러 가야죠. 그거 배워서 같이 현실로 가자고 저한테 이 긴 얘기를 해준 거잖아요. 소행성으로 초토화된 현실 지구를 살려달라고.”
“맞아. 시간이 얼마나 걸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너밖엔 없어. 그곳을 되살릴 수 사람은.”
“의미 있고 좋네요. 이 메타버스 속 모든 NPC 중에 제가 제일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거겠군요.”
“고마워. 그렇게 해석해 줘서.”
* * *
레온과 나는 몬테넬 왕국과 마리노 왕국을 방문하여 숲 복원 마법에 대한 원천 기술을 확보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레온의 이해력과 암기력은 정말 뛰어났다.
지구엔 숲이 우거져 있다고 들었는데 이걸 왜 배워 가냐는 테라 행성 사람들의 질문엔 제대로 된 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굳이 ‘너희들은 다 가짜야. 우린 진짜 세상으로 갈 거야. 이 기술은 거기서 필요해서 배워가는 거야.’라는 말을 해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일주일 정도를 숲 복원 마법을 배우는 데 쓰고 레온과 함께 지구로 돌아왔다.
지구로 돌아오자 최수영 또한 마음의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메타디펜스 본사 옥상.
한참 동안 하늘의 별을 바라보던 최수영이 입을 열었다.
“신기하다.”
“뭐가?”
“오빠랑 나랑 모르는 사이였다니. 서로 지하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마주친 적도 있을 수 있겠다. 알아보지도 못하면서. 그치.”
“그럴 수도 있겠지.”
“이곳의 기억과 그곳의 기억이 합쳐진다는 건 어떤 경험일까. 내가 잘 감당해 낼 수 있을까?”
“나도 확답을 주기가 어렵네. 해본 경험이 아니라서.”
“현실로 언제 넘어갈 거야?”
“우선은 조금만 더 허염환을 기다려 보고. 다시 돌아올 것처럼 말했으니까. 그런데 못 올 수도 있다고 했으니 너무 늦기 전에 넘어가야겠지.”
잠시 고민하던 최수영이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호텔 잡아. 결혼하자.”
“응? 호텔? 갑자기?”
“뭐 엉큼한 생각 했지? 어휴. 호텔 웨딩홀 잡으라고. 제일 크고 멋진 데로. 최대한 빨리. 내일이라도 좋으니까.”
“아…….”
“여기가 가짜면 어때. 현실로 넘어가면 소행성 분진이 하늘에 가득 찬 지구에서 살게 되는 거잖아. 거기 가서 결혼하느니 여기서 할래. 멋진 결혼식. NPC들도 잔뜩 부르고. 하하핫. 최대한 많이 불러. 아예 호텔을 통째로 빌려버려. 여기 돈 뒀다 뭐 해. 다 가짠데.”
“그래, 알았어. 빨리하자. 최대한 빠른 날짜로 잡아볼게. 제일 멋진 곳으로.”
“…그냥 여기 살면 안 되는 거겠지? 이 가짜 세상에.”
“나도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지만, 현실의 우리가 죽으면 이곳의 우리도 없으니까. 염환이 말 들어보면 시간이 많은 것 같진 않아.”
“그래. 이렇게 메타버스 속에 있다가 영문도 모르고 소멸하는 것보단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현실이라는 데로 가보는 게 낫지 뭐.”
“맞아.”
“그런데 여기서 실제가 돼서 넘어간 생명체들은 뭐가 있대?”
“거기까지 자세한 얘기는 못 들었어. 다만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랑, 넥시트가 방관하고 있다는 것까지만 들었어.”
“넥시트는 어쩌려는 걸까? 인간들을 다 죽이고 자기 창조물들하고 같이 살려는 걸까?”
“아직 확실한 건 없어. 캡슐도 이상 없이 잘 굴려주고 있잖아. 방관하는 거 말고는 인간에게 해를 끼친 것도 없고.”
“그야 자기 창조물들이 실제화되는 걸 가속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인간들을 계속 캡슐에 집어넣어서 말이야. 인간의 뇌파가 그 생명체들하고 반응하면서 실제화가 되는 거라며.”
“그럴 수도 있고. 일단 가봐야 알겠지.”
“이야, 우리 오빠 이제 AI랑 한 판 붙는 거야? 걔 양자컴퓨터라며. 해볼 만하겠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싸움일 수도.”
“현실로 넘어가면 우리 능력이 그대로 유지되는 건 확실해?”
“그것도 허염환이 속한 조직의 가설일 뿐이야. 메타버스에서 실체화되어 넘어온 생명체들이 그 능력을 그대로 갖추고 있으니 우리도 그럴 거라고 예상하는 거지.”
“하지만 우리는 그쪽 현실에도 존재하는 사람이잖아. 그냥 그대로 기억만 합쳐지고 깨어나면 어쩌지?”
“그럼 또 그때 가서 살 방법을 찾아봐야지 뭐. 어쨌든 여기 있어도 현실 김수호 현실 최수영이 못 살아남으면 우리도 소멸하는 건 마찬가지니까.”
* * *
일주일 후.
서울 S호텔 야외 가든.
“자, 신랑 신부 동시 입장.”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나와 최수영이 나란히 앞으로 걸어나가자 식장을 가득 메운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내왔다.
최대한 화려하게 하고 싶다는 최수영의 말에 언론도 따로 통제하지 않았더니 전 세계의 언론사에서 온 기자들이 앞다투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결혼식의 모든 것이 최고급으로 준비되었다.
하지만 행진하는 마음속은 공허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고개를 돌려 최수영을 바라보니 그녀의 표정도 별반 다를 건 없었다.
최수영이 낮게 속삭였다.
“내 표정 별로인 거 티나?”
“응, 티나.”
“오빠도 마찬가지거든.”
“좀 공허하긴 해. NPC들과 가상 결혼식이라니. 하지만 수영아.”
“응?”
“너와 결혼하게 돼서 기뻐. 진심이야.”
최수영의 큰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 뭐야. 결혼식 날 신부 울리기 있어 없어. 외신 기자들 앞에서.”
“이러면 우는 거 안 들키겠지?”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최수영의 허리에 한쪽 팔을 감았다.
“뭐, 뭐야?”
그대로 우리 둘은 입을 맞췄다.
결혼 행진곡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신랑 신부는 행진하던 도중 갑자기 멈춰 뜨겁게 키스하고 있다.
셔터 누르는 소리가 호텔 가든 전체를 가득 메웠다.
당황한 호텔 직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아무렴 어때.
한참 후 입을 떼자 최수영이 다시 환하게 웃었다.
“이야, 전 세계가 보는 앞에서? 결혼식 행진을 하다 말고?”
“왜, 싫었어?”
“아니. 너무 좋아. 결혼식 하길 진짜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