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 현실 】
한 달 후.
강원도 고성 블랙 게이트.
나는 최수영, 레온과 함께 산 위에서 블랙 게이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 이제 가볼까? 현실 세상으로.”
“그래, 오빠. 가자.”
“저기 넘어가서 형, 누나를 못 만나면 어쩌죠?”
“만날 수 있을 거야. 어떻게든 찾아낼게.”
“뭐, 어쨌든 함께하기로 했으니 가야죠.”
“그래, 들어가자.”
우리는 천천히 게이트 안으로 발을 디뎠다.
온몸이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기분 나쁜 느낌.
시간은 많지 않았다. 조금 후면 반대쪽 행성과 연결된 화이트 게이트로 튀어 나가게 된다.
나는 양손에 모든 힘을 실은 채 마그네타 검을 꽉 쥐었다.
왼손엔 마나, 오른손엔 내력.
콰과과과!
대천 흑룡이 게이트 벽면을 강타했다.
쿠웅!
그동안 수백 번은 드나들면서도, 한 치 앞도 볼 수 없이 어두워서 벽이 있는 줄도 몰랐었는데, 허염환의 말대로 뭐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 뻗어 나간 대천흑룡이 무언가에 부딪쳤고, 충격이 전달되었다.
같은 곳을 향해 두 번, 세 번 연달아 공격을 퍼부었다.
쿠웅, 쿵.
잠시 후.
콰직, 콰지직.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칠흑이던 공간에 한줄기 빛줄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내 빛줄기는 균열이 생긴 댐의 물이 쏟아지듯 우리가 있던 공간 안으로 무수히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번엔 거꾸로 사방이 너무 밝아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갑자기 엄청난 두통이 몰려왔다.
옆에 있을 최수영과 레온을 챙겨야 하는데, 신경을 집중해 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보려고 해도 내 입에서 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새하얀 빛무리 안에 홀로 떠 있는 느낌. 그리고 밀려오는 엄청난 두통.
깨질 듯한 두통에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보려 했지만 내 팔과 손이 어디 있는지 느껴지지 않았다.
두통 외엔 몸 전체에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아니, 몸이 아예 사라진 느낌이었다.
어느새 새하얀 빛무리가 점차 사라져 다시 칠흑 같은 어둠이 펼쳐졌다.
“아… 머리야.”
밀려드는 두통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잠깐, 미간이 찌푸려져?
좀 전엔 어떠한 몸에 대한 감각도 남아 있지 않았었는데.
분명히 미간이 찌푸려지는 게 느껴졌다.
어둠도 아까와는 조금 달랐다.
빛 한줄기 없는 것은 같았지만 완전한 칠흑은 아니었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여보자 그 위를 덮고 있는 눈꺼풀이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스테인리스 재질의 캡슐 뚜껑.
자연스럽게 문 열림 버튼을 찾아 눌렀다.
아직 머릿속이 완전히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버튼의 위치를 알고 있는 걸 보니 현실의 기억도 잘 유지된 모양이다.
치익.
SF 영화에서나 듣던 가스 빠지는 효과음과 함께 캡슐이 열렸다.
그러고 보니 영화 효과음을 만드는 사람들은 참 대단했다.
처음 전기차를 탔을 때 어렸을 적 미래 배경 영화에서 듣던 자동차 소리가 나서 깜짝 놀란 기억이 났다.
쓸데없는 생각은 치우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보았다.
회색빛 천장, 회색빛 벽.
아무런 인테리어를 해놓지 않은 날것의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보자 백여 개의 캡슐이 촘촘히 자리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열려 있고 어떤 것은 닫혀 있었다.
현실 김수호의 기억과 일치하는 이 공간이 크게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제 몸 안을 살펴볼 차례.
천천히 몸속을 관조해 보았다.
생사현관 타통을 통해 온몸에 고르게 퍼져 있는 내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무미건조한 이곳 지하 벙커 건물 안에 퍼져 있는 마나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허염환의 말대로였다.
메타버스의 기억과 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현실로 넘어왔다.
당연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마그네타 검이나 정령의 마법 주머니는 사라져 버렸다.
자동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소행성 충돌 당시, 현실의 나는 한국 항공우주연구원에서 일하시는 부모님을 둔 중학생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서른세 살까지 성장한 상태.
우리 집은 재벌은 아니었지만, 소행성 충돌 대피 우주선 발사에 부모님이 꼭 필요한 인력이었기 때문에 나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자동문이 열렸다.
방금 내가 나온 곳과 같은 모양의 문이 쭉 연결된 기다란 복도가 나왔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지하 30층.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복도를 LED 등이 밝게 비추고 있었다.
“현실로 넘어오게 되면 C-197 구역으로 와라.”
허염환이 메타버스에 왔을 때 남긴 말이었다.
그리고 두 기억이 합쳐진 나는 C-197 구역이 어딘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10년 전 이미 버려진 벙커 중 하나. 그곳으로 가려면 이곳 벙커를 빠져나가 지상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이곳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특별히 제작된 방호복도 착용해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 최수영을 만나는 게 급선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지하 11층에 위치한 거주지역으로 향했다.
삐빅.
문 앞에 설치된 지문 인식기에 손을 올리자 덜컹 소리와 함께 잠금 장치가 풀렸다.
이곳은 우리 집.
세 식구가 사는 집인데 다섯 평도 채 되지 않는다. 잠은 어차피 캡슐실에 가서 자니 침실은 필요하지 않았고, 거실 겸 주방과 화장실이 전부였다. 그래도 잠시 몸을 뉠 수 있는 접이식 침대 정도는 갖춰져 있었다.
거실 한쪽에 있는 작은 책상으로 가서 노트북을 펼쳤다.
현재 살아 있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람은 10만 명 남짓.
소행성 충돌 이후 국가라는 개념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지만, 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 그만한 연대감을 느낄 수 있는 단체도 없었다.
대한민국 출신 생존자를 위한 사이트에 들어가 명부를 찾아보자 이름과 생년월일만으로 어렵지 않게 최수영을 찾아낼 수 있었다.
휴대전화를 꺼내 찾아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수영아!”
- 누구세요?
어라. 이게 아닌데.
“나야, 수호.”
- 저 그런 사람 모르는데요.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나요?
“그야 명부 보고…….”
- 어쨌든 저는 그쪽 모릅니다. 끊을게요.
“수영아!”
- 하하핫.
“뭐야!”
- 뭐긴 뭐야. 오빠 놀려먹기지. 우리 잘 넘어온 것 같다. 그치?
“놀랐잖아.”
- 빨리 데리러 와. 보고 싶어.
“알았어.”
최수영이 불러준 주소는 지금 내가 있는 벙커가 아니었다.
하지만 수백 개의 벙커들은 지하 통로로 모두 연결이 되어 있었다.
서둘러 밖으로 나가 지하 통로 입구로 향했다.
입구 앞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웅성대는 사람들을 관리인들이 막아서고 있었다.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서자 통로 입구가 굳게 닫힌 것을 볼 수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옆 벙커에 괴생물체가 나타났습니다. 지금은 모든 통로가 차단된 상태입니다. 상황이 해결될 때까지 기다리셔야 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대며 통로를 열어 달라고 요구하였지만, 관리인들은 굳은 표정으로 통로 앞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있던 지구에서는 ‘메타디펜스의 김수호 대표입니다’ 한마디면 통과할 수 있었을 텐데. 오히려 어서 괴생물체 좀 처리해 달라고 부탁을 해왔겠지.
여기서 나는 허염환의 말대로 그저 건강한 청년에 불과했다.
전화기를 꺼내 다시 최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오빠.
“너희 벙커는 지금 이상 없지?”
- 무슨 이상?
“옆 벙커에 괴생물체가 나타났다고 벙커 이동 통로를 모두 차단해 버렸네.”
- 아, 그래? 그럼 어떻게 올 거야?
“글쎄, 지금 여기 통로를 부숴버리고 이동할까 싶기도 한데, 오자마자 그건 너무 행패겠지?”
- 하하핫. 행패지, 행패. 그냥 거기서 만나. C-197 구역. 오빠 친구가 오라고 한 데.
“거기 가려면 벙커 밖으로 나가야 해.”
- 어차피 지금이 쪽으로 넘어오지도 못한다며. 몰래 나가자. 우린 방호복도 필요도 없을걸?
“내구도 강화한 것도 그대로 유지가 된 모양이니 그런 건 필요 없긴 하지.”
이곳에 넘어오기 전, 최수영과 나는 남은 코인을 모두 내구도 강화에 털어 넣었다.
- 그럼 그냥 거기서 만나. 벙커는 각자 알아서 잘 빠져나가 보자고.
“괜찮겠어, 혼자?”
- 왜 이래, 나 최수영이야.
“그럼 내가 너희 벙커 출구 쪽으로 갈게. 거기서 만나서 같이 가.”
- 그래, 그럼. 밖에 나가면 전화 안 터지니까, 1번 출구 앞에서 기다려. 내가 몇 번째 출구로 빠져나가든 1번 출구 쪽으로 갈게.
“그래. 지상으로 올라가기 전까지 수시로 연락하고.”
- 진공 이동관 타고 오면 금방일 텐데. 통로를 폐쇄했다고 하니 오빠가 고생이네.
“그러게. 기억엔 있지만 한번 타보고 싶었는데. 그 진공 이동관. 어쨌든 그쪽으로 이동할게. 곧 만나.”
- 응. 조심해서 넘어와.
최수영과의 전화를 마치고 다시 엘리베이터가 있는 광장으로 갔다.
지상으로의 출입은 철저히 통제되어 있는데, 어떻게 나간다. 그냥 출구를 부수고 나가버릴 수도 없고.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하고 일단 최상층으로 올라가 보기로 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 벙커 상층부에 괴생명체가 출연하였습니다. 시민분들께서는 모두 안전한 하층부로 이동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괴생명체가 출연했습니다. 모두 안전한 하층부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흔히 있는 안내 방송.
이곳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 며칠에 한 번꼴로 나오는 방송이었다.
방어군에 의해 쉽게 제압되는 때도 있었지만, 얼마 전 어떤 벙커에서는 만 명도 넘는 사상자가 나오기도 했다.
폐쇄된 건물 구조상 감당하지 못할 몬스터가 나오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럼 이번엔 어떤 놈이 나타났는지 한번 가볼까?
상층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모두 작동이 중단되었을 것이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계단실로 몸을 날렸다.
계단실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자 벽 건너편에서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콰앙.
계단실 문을 발로 차고 밖으로 나왔다. 지하 4층. 관공서가 몰려 있는 층이었다.
문을 열고 나서자 아귀 머리와 몸통을 가지고 있는데 몸통 지느러미 대신 커다란 앞발 두 개를 가진 몬스터가 눈에 띄었다.
예전에 필리핀에서 해치웠던 행성 094의 몬스터였다.
놈은 진득한 진액을 흘리며 닥치는 대로 사람들과 건물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여기서 보니까 또 감회가 새롭네.”
저 진득한 진액을 내뿜는 놈과 근접전을 펼치고 싶지는 않았다.
양팔을 몬스터에게 뻗은 후 그대로 내력을 방출했다.
쿠우우.
양팔에서 강력한 내력이 방출되어 놈의 몸통에 적중했다.
파천마공.
갑작스러운 공격에 몬스터는 저 멀리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몸통은 반쯤 일그러진 상태.
뒷지느러미와 앞발을 허우적거리며 다시 일어나보려 애쓰는 놈의 머리통에 다시 한번 파천마공을 날려 보냈다.
퍼억.
몬스터의 머리가 터져 나가며 사방으로 진액이 튀었다.
출동했던 방위군들이 깜짝 놀라 몬스터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거 참. 나를 뭐라고 소개해야 하나.
방위군은 나에게 총을 겨눈 채 천천히 다가왔다.
가장 앞선 방위군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십니까?”
“아, 김수호라고 합니다. 11층에 살고 있어요.”
이거 말고는 딱히 나를 소개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