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 * *
나는 E-101 구역이라 불리는 지하 벙커에 거주 중이다.
그리고 지금은 E-101 구역 방위군 사령관실에 붙잡혀와 있다.
물론 함께 가달라는 말에 순순히 따르긴 했지만, 분명 호의적인 동행 요청은 아니었다.
메타버스 속이었다면 어느 나라의 어느 기관도 나를 이렇게 대하지 않았겠지만, 여기는 현실.
이곳의 김수호는 서른세 살의 평범한 연구원일 뿐이었다.
일단은 이들의 반응을 한번 살펴보기로 했다.
잠시 후 두 명의 사내가 들어왔다.
앞선 사내가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E-101 구역 방위군 사령관 홍진철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11층에 사는 김수호입니다. 뉴플랜트 사의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뉴플랜트는 지하 벙커나 새로 바뀐 지상에서의 식물 재배를 연구하는 기업. 최근엔 제법 성과를 내 벙커의 식량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끌어 올리기도 하였다.
“4층에서 있었던 일은 이미 보고받았고 여러 영상도 확인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그 초능력은 무엇입니까?”
5년 전 코인으로 힘과 운동 신경을 여덟 배씩 향상시켰던 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일을 겪으며 얻게 된 힘입니다. 중간에 마나를 다루는 능력도 얻었고, 천마를 만나 생사현관도 타통했지요.
귀자마모에겐 모든 마나 공격을 흡수하는 힘을 얻었는데 아쉽지만 그건 검에 갇혀 있어 이쪽으로 가지고 오지 못했네요.
아마 기억은 없겠지만 메타버스 속 여러분 대부분은 저를 알고 있을 겁니다. 지구의 영웅 어쩌고 하면서 뉴스에도 자주 나왔으니까요.
그래요. 내가 바로 그 김수호란 말입니다. 메타버스 속 지구를 몇 번이나 지켜낸 영웅.
…라고 말해 봐야 얘기만 길어지고 또 이걸 믿어줄 리도 없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생겼습니다.”
“갑자기 생겨요?”
“네. 오늘 갑자기 생겼습니다.”
“오늘이요?”
“네. 캡슐에서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몸에 기운이 넘치더군요.”
“이유도 모르십니까?”
“모르죠. 갑자기 이렇게 된 걸요.”
홍진철 사령관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럼 4층의 그 일은 어떻게 된 겁니까?”
“아, 그건 그냥 지나가다가…….”
“하층부로 모두 대피하라는 방송이 있었는데요? 그리고 방송 이후 계단실로 가 바로 4층으로 뛰어 올라간 김수호 씨 모습이 여러 CCTV에 다 찍혔습니다.”
“아, 그냥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새로 생긴 이 힘을요. 그리고 사람들도 구할 겸 뭐 겸사겸사.”
“새로 생긴 힘치고는 능숙하게 쓰시는 것 같던데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게 그렇더라고요. 원래 있던 것처럼. 아마도…….”
“아마도?”
지금이야말로 개소리를 시전할 시간이다.
“이런 게 ‘각성’ 아닐까요?”
“각성이요?”
“네. 갑자기 벙커 안이고 바깥이고 몬스터나 괴생명체들이 나타나는 와중에, 우리 인간에게도 변화가 없으리란 법은 없죠. 아마도 그 괴물들과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한 누군가의 안배 같은 게 아닐까요?”
아오, 말하다 보니 좀 멀리 가버렸다. 하지만 어떠랴. 어차피 처음부터 개소리인 것을.
“누군가의 안배 말씀이십니까.”
“저도 모르죠. 뭐 신이라든가, 시스템이라든가. 그런 거 있잖아요. 어쨌든 이것도 다 제 추측일 뿐, 정확한 건 알지 못합니다. 확실한 건 아까와 같은 힘이 저에게 생겼다는 것이죠.”
“놀라운 얘기로군요.”
이걸 믿어?
하긴. 갑자기 그 거대 몬스터를 손짓 몇 번으로 박살 내버리는 영상을 다 확인했을 테니.
“그럼 이제 가봐도 되겠습니까? 바쁜 일이 좀 있어서. 만날 사람도 있고요.”
“죄송합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벙커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상황은 원천 봉쇄하는 것이 저희 방위군의 역할입니다.”
“그래서요?”
“상부에 보고를 할 테니 이곳에 잠시 머물러 주시길 바랍니다.”
“절 가두겠단 말인가요?”
“당분간입니다. 당신이 벙커에 위협이 될지 안 될지를 판단한 후 석방을 결정하겠습니다.”
“석방? 석방을 결정한다는 건 지금은 제가 구속된다는 말인가요?”
“당분간입니다.”
“홍진철 씨.”
나이는 50대 초반 정도. 한국인.
홍진철 사령관의 눈썹이 꿈틀했다.
“사령관님이라고 불러주십시오. 게다가 제가 나이도 한참 많…….”
“홍진철 씨.”
빠득. 사령관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툭 돋아났다.
“내가 지금 여기를 다 박살을 내버리고 나갈 수도 있는데, 그쪽한테 기회를 주는 거예요. 나와 사이가 틀어지지 않을 기회. 상부에 보고를 해도 좋고, 뭘 해도 좋은데. 나한테 여기 있어라 마라 할 자격은 없지 않아요? 내가 뭐 범죄를 저질렀나요?”
“그건 아니지만 아까 말했듯 벙커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상황은…….”
“그러니까. 지금 벙커에 위협이 될 상황을 당신이 만들고 있다니까? 홍진철 씨.”
아무래도 이곳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기는 틀린 것 같다.
그렇다고 지금 최수영도 만나야 하고 C-197에 가서 허염환도 찾아야 하는데 순순히 여기 갇혀 있을 수는 없었다.
홍진철 사령관과 나 사이엔 철제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나는 천천히 팔을 벌려 철제 테이블의 양쪽 끝을 잡았다.
콰지직.
그대로 양팔을 안으로 모으자 철제 테이블이 휴짓조각처럼 구겨져 버렸다.
사령관의 뒤에 있던 사내가 깜짝 놀라 권총을 꺼내 들었다. 메타버스 속 지구에서 봤던 총과는 다른 생김새. 총알이 나오는 구멍이 너무 작은 걸 보니 레이저 총인 모양이다.
사내의 총구에서 붉은빛 레이저가 쏘아져 나왔다.
나는 왼손을 들어 가볍게 실드를 펼쳐냈다.
“이제 그만 열 받게 하는 게 어떨까요, 홍진철 사령관님. 아직은 당신들하고 딱히 척지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홍진철이 팔을 들어 부관을 제지했다.
“여기 상황 지금 다 녹화되고 있죠?”
“그렇소.”
“나는 각성해서 얻은 이 힘으로 지구인들을 지킬 겁니다. 안 그래도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인구가 더 줄어드는 건 원치 않으니까. 그런데 자꾸 오늘처럼 나를 대한다면, 나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상부에도 꼭 이렇게 전하세요.”
오른손을 펼쳐 사령관실 철제 자동문을 향해 뻗었다.
콰직.
주먹을 꽉 쥐자 철제 자동문이 그대로 으스러지며 뜯겨 나갔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또 뵙지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문밖을 나서는 나를 홍진철 사령관은 잡지 못했다.
사령관실 밖으로 나오자 수십 명의 방위군이 나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나는 양팔을 위로 들었다.
몇몇 방위군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중 한 명은 제 발에 걸려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조용히 나갈 테니 그 총은 겨누고만 있어요. 발사하면 나도 참지 않습니다.”
사령관실에서 홍진철 사령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두 총 내려라. 그리고 김수호 씨. 이대로 나가면 전체 방위군의 수배가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나는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
“그래서 말씀드렸잖아요. 상부에 잘 보고해 주세요. 당신들이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내 행동도 달라질 테니까. 아귀 대가리를 한 몬스터를 잡아줬더니 갑자기 구속이라니. 그건 좀 너무하잖아.”
* * *
벙커 밖으로 나가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물론 나오는 과정에 방위군 서너 명을 몰래 기절시키기는 했다.
철저한 출입 통제를 원칙으로 한다고 하지만, 지하에도 벙커들 간의 이동 통로가 다 있는 와중에 굳이 벙커 바깥을 드나들 사람은 거의 없었다.
벙커 안이 좀 답답할 수는 있지만, 이곳 지상에 비해서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이곳의 김수호는 식물 재배 연구를 위해 벙커 바깥을 몇 차례 나간 적이 있었지만, 메타버스의 기억이 있는 나머지 반쪽은 실제로는 이곳 지구의 광경을 처음 보았다.
소행성 충돌 이후 이십 년.
충돌 이후 몇 년간 지구를 뒤덮었던 암석 증기나 그 이후로도 10년 넘게 태양 빛을 막았던 먼지들은 이제 대부분 걷힌 상황.
하지만 여전히 지상은 폐허 그 자체였다.
망가진 오존층은 아직 돌아오지 않아 강력한 자외선이 쏘아져 들어왔고, 암석 충돌과 함께 모두 날아가 버린 물은 지구 전체를 사막처럼 만들었다.
강수량이나 해수면 높이가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으니 오히려 이 상황에서도 자정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지구가 대단하다고 해야 할 판이었다.
동쪽 멀리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인 뉴플랜트에서 설치한 거대 식물원 건물이 보였다.
전체가 유리로 둘러싸인 거대한 건물 안에서는 수경 재배를 시작으로 최근 지구의 흙을 활용한 재배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아직 4천만 인구의 식량을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대로라면 결국 인간은 이 지구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저 어이없는 큐브 같은 것도 필요 없게 되겠지.
한참을 날아가자 내구도를 제법 강화한 몸인데도 피부가 따끔따끔해져 왔다.
마침내 최수영이 있는 G-013구역 출구에 도착했다.
1번 출구로 찾아가자 최수영이 반갑게 맞이했다.
“오빠!”
“수영아.”
현실의 최수영과 김수호의 첫 만남이었다.
“오빠, 오빤 여기서 뭐 하는 사람이야?”
“나? 뉴플랜트에서 일해. 연구원이야.”
“아, 뉴플랜트? 나도 알지. 좋은 데 취직했네.”
“수영이 너는?”
“놀아. 하하핫.”
“놀아?”
“응. 우리 부모님이 좀 돈이 많으셔.”
“여기서도?”
“응. 그렇게 됐네.”
최수영은 이곳에서도 금수저였다.
80억 인구 중 0.5퍼센트 안에 들었다는 자체로도 이미 어마어마한 부를 거머쥔 상태지만, 그들이 모이니 또 그중에 부와 권력의 줄 세우기가 이루어졌다.
대한민국 항공우주연구원의 평범한 연구원이었던 부모님 덕분에 살아남은 나는 여기서는 거의 최하위 계급에 속했다.
국내 최고 대학을 나오고 아이비리그에서 석박사를 마친 부모님이었지만, 순수히 재력과 권력으로 0.5퍼센트 생존자 대열에 포함된 사람들 사이에선 그냥 똑똑한 기술자 정도에 불과했다.
“너 혹시.”
“혹시?”
“메타버스에 갈 때…….”
“응, 맞아. 웃돈 주고 좋은 환경에 배정될 확률을 높였대.”
“여기서 금수저가 거기서도 금수저라더니. 사실이었구나. 소문인 줄만 알았는데.”
“나도 처음엔 몰랐어. 나중에 부모님이 말씀해 주시더라고.”
“그래서 나는 거기서도 흙수저였군. 제길.”
“뭐 어때. 그래도 오빠는 거기서 세계 최고 부자가 됐잖아. 이거야말로 대단한 거 아냐?”
“허염환이 코인을 줬으니까 그렇게 된 거지 뭐.”
“어쨌든. 그것도 다 오빠가 친구 말을 잘 들어주고 성실했기 때문이라니까.”
“어쨌든 가보자. 염환이한테. 수영이 너는 한 번도 못 봤지?”
“응. 못 봤지. 그런데 오빠 벌써 한 건 했더라? 인터넷이 오빠 얘기로 난리던데?”
“말도 마. 나 구속될 뻔했다니까. 벙커의 안전에 위협이 될 요소라나 뭐라나.”
“에휴. 방위군들 하는 일이 그렇지 뭐. 얼마나 때려 부수고 나왔어?”
“나름 최소한으로 한다고 해봤는데. 테이블 한 개랑 문 한 개?”
“많이 얌전해졌네, 우리 오빠.”
“이제 가자. C-197 구역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