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 * *
“이쯤인 것 같은데.”
“저기 있다! C-197 출입구 간판.”
“얼른 들어가자. 피부 따끔하지?”
“응. 맨몸으로 오래는 못 돌아다니겠다, 오빠. 다음엔 우리도 방호복 챙겨입자.”
“그래.”
굳게 닫힌 출입구 손잡이를 돌렸다.
끼이이.
커다란 손잡이가 왼쪽으로 돌아가며 잠금장치가 풀렸다.
조금 뻑뻑하긴 하지만 무리 없이 돌아가는 걸 보니 확실히 사람의 출입이 있는 모양이었다.
계단을 따라 지하 1층으로 내려가자 넓은 광장이 나왔다.
광장 중앙엔 여러 벌의 방호복이 걸려 있었다. 조직원들이 이곳을 오갈 때 입는 방호복인 모양이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대여섯 명의 사람이 나왔다. 모두 우리에게 총을 겨눈 채였다.
“누구냐!”
“허염환 씨 만나러 왔는데요.”
그때 한 명이 내 얼굴을 알아보았다.
“어? 김수호?”
“뭐? 김수호? 메타디펜스의 그 김수호?”
“맞네! 맞아요! 김수호 대표가 왔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허염환처럼 링크 감도가 떨어지는 별종들. 메타버스의 기억을 갖고 있을 테고, 그럼 나를 아는 게 당연했다.
“맞습니다. 김수호라고 합니다. 게이트 벽을 부수고 넘어왔습니다.”
“저는 최수영이에요. 같이 넘어왔어요.”
가장 앞서 있던 사내가 총을 내리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정말 반갑습니다. 진짜 넘어오시다니요. 이렇게 와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자, 안으로 들어가시죠.”
사람들의 안내에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참을 내려가자 크고 작은 스크린과 모니터가 벽을 가득 두르고 있는 공간이 나왔다.
그곳엔 허염환도 있었다. 대충 봐도 조직원을 통솔하는 위치에 있는 것 같았다.
“어, 수호야. 왔어?”
“허염환, 너 분위기가 좀 다르다?”
“내가 말했잖아. 여기선 좀 활동적인 편이라고. 어서 와. 오느라 고생했어.”
“다시 한번 온다더니 안 와서 내가 왔다.”
“넥시트가 더 이상 메타버스 접속을 허용해 주지 않더라고.”
“그래? 그럼 어떡해? 음식은?”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 뭐. 어차피 그전에도 자주 들어가지도 않았어.”
“하긴.”
“아, 소개할게. 우리 조직원들이야. 모두 나처럼 링크 감도가 낮은 사람들이지.”
“저분들도 다 메타버스에 못 들어가?”
“아니. 지금은 나만 막혔어. 이 벙커에도 캡슐이 있는데, 거기서 메타버스로 접속할 수 있어. 해줄 말이 많다. 이쪽으로 와봐.”
허염환을 따라가자 커다란 스크린에 복잡한 관계도가 그려져 있었다.
“지금까지 실체화되어 나타난 생명체들의 메타버스 속 상황을 정리해 둔 거야.”
“연관성은 좀 찾았어?”
“확실하진 않지만 거의 일치해. 모두 거기서 죽은 생명체들이야.”
“거기서 죽으면 여기로 넘어온다?”
“전부 그런 건 아니고. 여기 이 파일 좀 봐.”
허염환이 화면을 건드리자 다음 파일이 보였다.
유독 많이 보이는 내 이름.
“모든 케이스를 찾아볼 순 없었지만, 이곳 사람들에 의해 죽은 생명체들이라는 가설이 가장 유력해.”
“죽음에 현실 인간들이 연관된 생명체들이 이쪽으로 넘어온다는 거지?”
“응, 그런 것 같아. 아무래도 뇌파 링크 감도와 연관이 있겠지. 그런데 100퍼센트 일치하는 건 또 아니라서 확신할 순 없어.”
“지능을 가진 생명체가 넘어온 적은 없어? 대화를 해볼 수 있는 그런 생명체.”
“아직 없어. 그런데 이것 좀 봐.”
허염환이 또다시 화면을 넘겼다.
“나타난 놈들을 순서대로 정리해 본 건데, 뭐 보이는 게 있어?”
“멍청한 놈들부터 나왔네. 뇌가 작은 놈들. 내가 오늘 해치운 아귀 몬스터도 그렇고. 그리고 나오는 빈도가 점점 잦아지고 있네?”
“정확해. 그게 문제야. 점점 빈도도 잦아지고 있고, 나오는 놈들의 수준도 올라가고 있어. 반면 우리 지구인들의 병력은 너무 약소하지. 방위군이 있다지만 거의 내부 통제를 위한 병력에 불과해.”
“당연하겠지. 벙커 밖엔 암울한 지표면뿐. 적 같은 건 없으니까.”
“맞아. 그게 문제야. 우리 병력은 너무 약한데 점점 강하고 똑똑한 놈들이 나타날 것 같다는 거지.”
“그래서, 계획은?”
“수호 네가 오늘 아주 잘해 줬어. 방위군에게 엄포를 놓았더라.”
“잘한 건가? 다짜고짜 구속한다길래 화를 좀 내고 나온 것뿐인데.”
“계획은 간단해. 당분간은 그냥 조용히 지내. 너희는 캡슐도 이용할 수 있으니까 크게 음식 걱정할 일도 없을 거야.”
“그게 계획이야?”
“응. 별수 없어. 방위군이 감당하지 못할 몬스터가 나올 때까지. 그전에 나서려고 해봐야 반감만 살 뿐이야.”
“감당할 수 없는 적이 나타났을 때 ‘짠’ 하고 나타나라?”
“응. 그러고 나서 지도부와 대화를 하는 거지. 예전에 네가 메타디펜스 처음 차렸을 때 국방부에게 했던 대로 말이야. ‘몬스터는 내가 처리해줄 테니 내 일에 협조해라’, 이렇게.”
“뭐, 간단하네.”
“자, 이거 받아. 우리랑 통화할 수 있는 직통 전화야. 여기서 괴생명체 출현을 항시 모니터하고 있으니까, 네가 나서야 될 때가 되면 이 전화로 알려줄게.”
“넥시트 그놈은 별 반응 없어?”
“응. 여전해. 대화도 거부하고 있고, 모든 사태에 그저 방관만 하고 있어. 지구인을 위해 메타버스로 가는 채널을 열어두는 건지, 자기 속셈을 위해 열어두는 건지도 이젠 알 수가 없어.”
“그렇군. 아, 그리고 여기로 또 찾아올 사람이 있어.”
허염환이 의아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누구?”
“레온이라고. 마법사.”
“마법사? 네가 테라 행성에서 데려온 그 마법사?”
“응. 같이 넘어왔어.”
“넘어와진 건 확실해?”
“확실친 않지만. 게이트를 부술 때 바로 옆에 있었으니 넘어와졌겠지.”
허염환이 다급히 소리쳤다.
“이봐! 어제오늘 실체화된 생명체 좌표 모두 다시 살펴 봐!”
“아니 뭐, 나도 찾아볼 테니까 그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줄 필요는 없고.”
“그게 아니야. 실패했어야 해. 반드시 실패했어야 한다고.”
“실패해야 한다니? 이곳 지구에 숲을 만들어 보려고 같이 데려온 건데. 걔 숲을 복원하는 마법을 익혔다고.”
“알아. 의도는 알지만, 이게 성공한다는 건 나중에 진짜 지적 생명체들이 이쪽으로 넘어올 수 있다는 말이잖아.”
“그렇지.”
“네가 죽인 테라 행성의 도적단. 그리고 전쟁에서 너랑 맞닥뜨린 불사인들. 그리고 또 지구로 넘어왔다가 NPC가 아닌 현실 인간에게 죽임을 당한 각 행성의 인간들.”
아무래도 각 행성의 죽음에 가장 많은 관여를 한 현실 사람은 당연히 나였다. 그럼 내 손에 죽은 놈들이 다 이리로 넘어온다고 치면…….
“와, 장난 아니겠는데?”
“웃음이 나와?”
“어쩌겠어. 미리 걱정하면 뭐 해. 그냥 나타나면 다시 해치워야지 뭐.”
그때.
“찾은 것 같습니다!”
허염환이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디?”
“D 구역에 강한 생명 에너지 출현이 감지되었었는데, 아무 경보나 사건이 없어 잘못 탐지된 줄 알았습니다.”
“그래?”
나는 허염환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성공한 것 같네.”
“제기랄.”
“그냥 아니었으면… 하고 바랐던 거잖아. 너무 센 놈들은 넘어오지 말았으면 하고 말이야.”
“그건 그렇지.”
“모든 일이 바람대로 이루어지진 않지.”
“…그래.”
“너무 걱정 마. 내가 왔잖아.”
또 다른 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수자 출현! 벙커 출입구로 다가오는 중!”
나는 고개를 돌려 최수영을 바라보았다. 최수영도 누군지 알겠다는 듯 씨익 웃어 보였다.
“왔네, 레온이.”
* * *
지하 1층으로 올라가자 어디서 구했는지 방호복까지 완전하게 입은 레온이 계단을 내려왔다.
“방호복도 챙겨 입었어?”
“잠깐 올라갔다가 깜짝 놀라서 다시 내려갔어요. 와, 여기 진짜 장난 아니네요. 테라 행성은 살기 좋은 편이었네.”
“소개할게. 여기 살고 있는 진짜 인간들이야.”
괜한 말을 했다.
진짜 인간이라는 말에 이질감을 느꼈는지 레온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안녕하세요…….”
“야, 레온이.”
“네?”
“너도 이제 진짜 인간이라고, 인마. 현실 세계로 이렇게 넘어왔잖아.”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가상현실에 있는 것보단 훨씬 낫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그래.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때.”
“맞아요. 그런데 수호 형, 오다가 대단한 걸 봤어요.”
“뭐?”
“엄청 커다란 식물원이요. 전체가 유리로 뒤덮여 있는.”
“응. 인류의 미래를 위한 식량을 연구하는 곳이야. 네가 두 번째로 숲 복원 마법을 사용할 곳이기도 하고.”
“첫 번째는요?”
“여기. 염환아, 벙커 내에 있는 농장으로 안내해 줘. 레온이가 보고 가능할지 어떨지 판단해야 하니까.”
레온과 함께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지하 농장을 방문했다.
꽤 큰 규모의 농장이었지만 지금은 벙커가 폐쇄되어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여기 머무는 사람들의 식량을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약간의 구황작물이 심겨 있을 뿐이었다.
“지하에 이런 걸 만들어내다니. 지구인은 정말 대단해요.”
“어때? 살려볼 수 있겠어?”
레온은 쪼그리고 앉아 흙 상태를 살펴보았다. 탐사대가 지상에서 고르고 골라 퍼 나른 농장용 흙이었다.
“될 것 같은데요? 물만 제대로 공급된다면.”
허염환이 반색하며 대답했다.
“쉽진 않지만 어떻게든 물을 더 구해 볼 테니 부탁해. 숲 복원 마법.”
아까 레온이가 넘어온다고 했더니 식겁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기뻐하고 있는 허염환이었다.
“네. 맡겨두세요. 오면서 보니 당장 지상에는 어렵겠지만 여긴 생각했던 것보다 환경이 좋네요.”
“꼭 성공해야 돼, 레온아. 안 그러면 너랑 허염환은 저기 저 감자만 조금씩 아껴먹어야 해.”
“하하. 괜찮아요. 테라 행성에서도 이십 년을 감자만 먹고 살았는데요.”
“좋아, 그럼 부탁해. 꼭 이 농장을 되살려보자고.”
그때 조직원 한 명이 허겁지겁 커다란 상자를 들고 뛰어왔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만든 씨앗들입니다. 대부분은 발아에 실패했었지만, 아직 살아 있습니다.”
삐, 삐.
빨간 불이 켜지며 경보음이 울렸다. 허염환이 앞장서며 말했다.
“괴생명체가 나타난 모양이다. 아까 말했듯이 방위군이 처리하기 버거울 때 나서는 게 나아. 일단 가서 모니터로 영상이나 확인하자.”
“그래. 나도 어떤 놈이 또 넘어왔을지 궁금하다.”
아직은 감당하지 못할 수준의 괴생명체는 나타나지 않았기에 우리는 천천히 모니터실로 돌아갔다.
돌아가면서는 복원될 농장 생각에 들떠 서로 농담도 주고받았다.
스윽.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모니터실로 진입했다.
모니터를 확인하던 조직원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이것 좀 보십시오!”
가장 큰 스크린에 이번에 나타난 괴생명체의 모습이 비쳤다.
“맙소사.”
“히드라?”
“갑자기 히드라가 나왔다고?”
머리 셋 달린 거대 드래곤, 히드라.
모니터 안에서 독 브레스를 뿜으며 닥치는 대로 건물을 파괴하고 있었다.
제법 높은 층고를 자랑하는 지하 벙커이지만, 몸길이가 수십 미터에 달하는 히드라에게는 무척 비좁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