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 * *
“저건 가봐야 하지 않을까? 방위군이 히드라를 막을 수 있어?”
“가보긴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다간 이용만 당할 수도 있어. 이쪽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가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해.”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야.”
이건 내가 알던 허염환과의 대화가 아니었다.
“너희 조직의 입지를 키우려는 목적이 아니고?”
“뭐?”
“날 이용해서 너희 조직이 물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거 아니냐고.”
“수호야, 그런 거 아니야.”
“당장이라도 도와달라고 와서 사정할 땐 언제고, 막상 넘어오니까 히드라가 나타났는데도 더 기다려라? 네 눈엔 저게 안 보여? 머리 셋 달린 저 용이 안 보이냐고. 저게 방위군 몇 명이 총질 좀 한다고 막을 수 있는 몬스터 같아?”
“더 효율적인 소탕을 위해서야.”
“어쩌지, 내가 생각하는 더 효율적인 소탕은 사람 한 명이라도 덜 죽었을 때 지금 가서 저 히드라를 썰어버리고 오는 건데.”
그때였다.
“A-021 구역에도 괴생명체 출현!”
허염환이 놀라 되물었다.
“이번엔 뭔데? 동시에 나타나다니?”
“잘 모르겠습니다! 엄청 큽니다!”
“H-137 구역에도 출현!”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지상에도 출현!”
벽에 걸린 모니터들이 각양각색의 몬스터로 가득 찼다.
“야, 허염환.”
“어?”
“지금 네가 맞네 내가 맞네 하고 있을 때는 아닌 것 같다. 맞지?”
“어, 어! 빨리 출동해 줘. 아니! 잠깐만. 어디부터 가야 하냐면…….”
허염환이 다급히 이곳저곳의 모니터를 살폈다.
“됐고. 너는 여기서 마저 분석해. 왜 갑자기 오늘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어떻게 해서든 이유를 알아내. 그래야 앞으로의 패턴도 알지.”
“어, 알았다. 어떻게든 알아내 볼게.”
“가자, 수영아.”
“응, 오빠.”
“레온이 너는 어떡할래? 여기서 숲 재생 마법을 실험해 보고 있을래?”
“어떡할 거냐고 물어보는 자체가 같이 가잔 말이잖아요, 수호 형.”
“눈치는 빨라 가지고. 가자, 레온아!”
“네! 형! 저 전투는 진짜 오랜만이에요.”
“잘할 수 있지?”
“물론이죠. 교보재 만든다고 연구를 얼마나 많이 했다고요.”
우리 셋은 지하 1층으로 올라가 방호복을 챙겨 입었다.
“벙커들을 자유롭게 이동해야 하니까, 지상에 있는 놈들부터 빠르게 싹 쓸어버리자.”
가장 먼저 방호복을 챙겨입은 나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게 좋겠군.
한쪽 벽면의 두껍지 않은 철판을 뜯어냈다. 맨손으로 뜯어내는데도 얇은 알루미늄 구부러지듯이 철판이 뜯어졌다.
뜯어낸 철판을 신문지 말듯이 돌돌 말아 적당한 길이의 몽둥이를 만들었다.
“수영아, 활이 없어서 어쩌지?”
“나도 몽둥이나 하나 만들어 줘.”
“그래.”
철판을 하나 더 뜯은 후 돌돌 말아 최수영의 몽둥이를 만들어 주었다.
붕, 붕.
몽둥이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최수영이 말했다.
“나도 활 좀 지겨웠어. 쥐어패는 맛도 좀 있어야지. 어차피 궁술 훈련만 받은 것도 아니잖아?”
“오케이. 그래도 나중에 활은 하나 구해 줄게.”
“알았어.”
“자, 가자!”
두꺼운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대형 몬스터 대여섯 마리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 자잘한 몬스터들도 좀 돌아다니고 있었다.
“여기서 시간을 끌 순 없으니까 내가 먼저 갈게. 둘은 같이 움직여.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알았어요, 형!”
나는 몸을 빠르게 날려 가장 가까운 놈에게 날아갔다.
지금 지하에서는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는 상황. 지상에 있는 이놈들에게 뺏길 시간은 없었다.
쇠몽둥이에 내력을 불어넣어 기다란 검기를 뽑아냈다.
몽둥이는 뭉툭했지만 뿜어져 나온 검기는 그렇지 않았다.
촤악.
날카로운 칼질 한 번에 거대 몬스터의 목이 그대로 잘려 나갔다.
방금 목이 잘린 놈은 행성 094의 거대 뱀 브리트라. 그리고 저 뒤에는 행성 087의 외눈박이 거인 퀴클롭스도 보인다. 왼쪽 멀리 보이는 건 행성 055의 공룡 같은데…….
랜덤 디펜스야 뭐야 이거.
이제 도착한 레온과 최수영이 거인 퀴클롭스에게 달려들었다.
레온의 양팔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와 퀴클롭스의 다리를 공격했다.
콰앙, 쾅!
퀴클롭스가 휘청하는 사이, 최수영이 높이 점프해 머리통을 휘갈겼다.
두 번의 공격으로 놈을 해치우진 못했지만, 큰 무리는 없어 보였다.
나는 빠르게 다음 몬스터에게 몸을 날렸다.
이번엔 커다란 마법구를 먼저 날렸다.
콰앙.
마법구와 부딪친 충격에 한참 뒤로 날아간 거대 악어가 화가 난 듯 입을 크게 벌렸다.
이번엔 조금 전 것보다 반 정도 작은 마법구를 날려 정확하게 날려 보냈다. 놈의 입 속으로.
꿀꺽. 콰앙!
몸속에서 터진 마법구는 거대 악어의 머리와 목 언저리를 완전히 터뜨려버렸다.
메타버스에 있을 때보다 몸이 더 가벼운 느낌이었다.
지상에 남은 몬스터들을 빠르게 처리한 뒤 가장 가까운 게이트의 출입구를 열었다.
* * *
꼬박 보름.
모든 벙커의 괴생명체를 다 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우리 세 명이 처리한 몬스터들이 대략 20퍼센트 정도. 나머지는 방위군에게서 어찌어찌 막아내든지 흥미를 잃은 몬스터가 밖으로 나가버리든지 해서 해결이 되었다.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음은 물론이다.
다행히 일주일 전 그날 폭발적으로 등장했던 놈들은 그 뒤로는 다시 전처럼 간간이 나타날 뿐이었다.
C-197 구역.
모니터로 가득 찬 상황실에서 허염환과 대화를 나누었다.
“아직도 못 찾았어?”
“다각도로 분석을 해봤는데, 아직 명확한 이유를 모르겠어. 왜 갑자기 그런 일이 일어난 건지.”
몬스터 브레이크. 이곳 사람들은 그날을 그렇게 불렀다.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한 이후 가장 끔찍했던 날.
“사람들은 이제 하층부로 이주하고 있지?”
“응. 아직 지하 20층 아래에서 괴생명체가 나타난 적은 없으니까. 이 자료를 관리국에 넘겼더니 바로 이주 계획을 시작했어. 지금도 한창 지하 1층부터 20층까지를 비우는 중일 거야.”
“그렇게 해서 다 이주할 공간은 나와?”
“아니, 어려워. 모든 사람이 하층부에서 지낼 순 없어.”
“그럼 또 누군 내려가고 누군 못 내려가겠네.”
“공용 공간을 최대한 상층부로 옮기고, 캡슐과 대피공간을 하층부에 두고 있긴 한데, 어쨌든 남은 인류가 모두 하층부에 머물 수는 없지.”
“난감하네. 내가 뭐 나선다고 해도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벙커에 동시에 몬스터가 나타나면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어.”
소행성 충돌 이후 지어진 지하 도시에는 크고 작은 벙커가 오백여 개 자리하고 있었다.
상주인구는 적게는 수천 명에서 많게는 수십만 명.
나와 최수영, 그리고 레온이 아무리 날고뛴다고 해도 이번 몬스터 브레이크 때처럼 떼거리로 나타나면 딱히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건 알아냈어.”
허염환이 모니터에 자료 하나를 띄웠다.
“뭔데?”
“상주인구가 많을수록 더 강력한 브레이크가 벌어졌어. 엄청 센 놈이 나타나거나, 아니면 엄청 많이 나타나거나. 여기도 캡슐이 몇 개 있긴 한데 여긴 나타난 적도 없어.”
“캡슐의 뇌파와 연관이 있겠구나.”
“역시 김수호. 맞아.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이쯤 되면 인간들이 캡슐에 들어가는 행위 자체가 메타버스에서 죽은 생명체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게 확실해.”
“참 나. 캡슐에 안 들어가면 다 굶어 죽는 거고. 캡슐에 들어가면 언제 또 그런 몬스터 브레이크가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
“응. 지금으로선 그러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지하 농장에서 마법 연구를 하던 레온이었다.
“레온아. 어때, 효과는 좀 있어?”
“네. 햇빛이 없어서 테라 행성 때보단 좀 더디지만 확실히 숲 복원 마법이 효과는 있어요. 전보다 싹을 틔우려고 하는 씨앗 종류가 더 많이 관찰돼요. 이곳의 과학은 우리가 있던 지구보다 훨씬 더 대단해요. 씨앗의 아주 미묘한 변화까지 전부 관찰할 수 있어요.”
“얼마나 걸리겠어? 뭔가를 수확할 만큼 농장을 되살리려면?”
“여기 농장이요? 여기 농장은 한 석 달쯤? 길면 넉 달? 그쯤이면 첫 번째 수확이 가능할 것 같아요.”
“과정을 잘 기록해 둬. 내가 뉴플랜트사에 들고 가서 저 밖에 지상 식물원에 적용하자고 할 거니까.”
“알겠어요.”
허염환이 물었다.
“방위군이나 관리국에선 뭐래? 이제 벙커에 위협이 되는 존재 어쩌니 하는 말은 안 해?”
“이젠 안 하지. 내가 죽여준 몬스터가 몇 마린데. 그리고 너한테 들은 얘기도 좀 들려줬어.”
“어떤?”
“더 강한 놈들이 나타날 거고, 강철로 만들어진 인간이나 마물도 나타날 수 있다고.”
“네가 보기엔 어때? 누가 제일 위협적이야?”
“콕 집기 어렵네. 워낙 많은 놈들이 있었어서.”
“귀마왕은? 나타나면 막을 순 있지?”
“그놈 한 명이라면 충분하지. 마물을 다 끌고 나타나지만 않는 다면야.”
“다 끌고 나타나?”
“이건 내 머릿속에 그린 최악의 상황이야.”
허염환이 의자를 아예 돌려 나를 보고 앉았다.
“어떤 상황?”
“들어봐. 여기 나타나는 놈들은 죽은 순서가 아니란 말이야.”
“그렇지.”
“그럼 메타버스에서 캡슐에 연결된 인간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놈들이 어딘가 모여 있는 공간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
“아…….”
“어딘가는 존재하고 있다가 넘어오는 걸 거 아니야. 완전히 사라졌다가 갑자기 여기 나타나는 것보다는 현실적이지 않아?”
“그러네.”
“그럼 지금 어딘가 그 공간에 있는 지적 생명체들은 이미…….”
“자기들끼리 모여 한 번에 넘어올 준비를 하고 있을 수 있다?”
“그렇지. 너 같으면 따로따로 오겠냐? 테라 놈들은 테라 놈들끼리. 마물들은 마물들끼리.”
“끔찍한 소리 마. 도대체 로직을 알 수가 없으니 너무 답답하다. 넥시트가 다시 대화에 응해 주면 좋을 텐데.”
“넥시트 그놈 부숴버린다고 협박하면 안 돼?”
“당장 모든 벙커의 산소를 차단해 버릴걸?”
“무시무시하네.”
“그럼 협박 말고 대화에 임하게 하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알면 벌써 시도를 해봤겠지. 분명 캡슐도, 벙커의 생명 유지 장치들도 정상적으로 가동되는데 넥시트는 아예 전원이 꺼진 것처럼 아무 반응이 없어.”
“넥시트가 진짜 꺼진 거면 다른 것들도 작동을 안 해야 한다는 거지?”
“당연하지. 특히 캡슐은 완전히 먹통이 되어야지. 그 속의 세상은 넥시트가 만든 세상인데.”
“아, 복잡하구만. 그럼 난 캡슐 가서 한숨 잔다. 피곤하네. 배도 고프고. 수영아, 같이 가자.”
“그래. 오늘은 뭐 먹을 건데?”
“글쎄. 멕시코 가서 타코 먹을까?”
“오, 오랜만이네. 타코 맛있겠다.”
나는 허염환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도 갈래? 가짜면 어때, 맛있고 배도 부른데.”
“난 링크가 아예 막혀버렸다니까.”
“아, 맞다. 깜빡했네. 미안. 그럼 우리 갔다 올게. 무슨 일 있으면 깨워.”
“그래. 잘 쉬다 와라.”
최수영과 나는 천천히 캡슐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