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 * *
게이트를 깨부수고 현실로 넘어온 후, 최수영과 나는 캡슐에 들어가 메타버스에 접속해도 기억이 지워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허염환과 같은 변종이 된 것이다.
우리는 하루 한 번, 혹은 이틀에 한 번 캡슐에 들어가 메타버스 속 세상을 즐겼다. 주로 하는 일은 풍경 좋은 곳에 가서 힐링하고 맛있는 밥을 먹는 것.
메타버스 세상은 그런 우리를 ‘기면증’에 걸린 것으로 판단했다.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던 내가 최근 대부분의 시간을 자는 데 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매체를 통해 퍼져 나갔다.
- 그동안의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인 기면증일 확률이 가장 높습니다. 최근 몇 년간 메타디펜스의 김수호 대표가 겪었을 일들을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죠. 그의 정신과 몸이 완전히 지쳐 버렸다 해도 전혀 이상한 것이 없는 상황이니까요. 하지만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곧 이 마음의 병을 이겨내고 우리 곁으로 돌아올 겁니다.
…저명한 정신분석학자의 의견이었다.
나와 최수영은 몬스터 처치나 회사 일엔 더 이상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이미 메타디펜스는 우리 둘 정도 빠진다고 안 돌아갈 만큼 허술한 회사는 아니었다.
그렇게 메타버스 세상은 우리 둘 없이도 잘 돌아갔고, 우리는 한 번씩 들러 이 세상을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햇빛 한 점 없는 벙커에 머물다가 이곳 메타버스 지구에 오면 그렇게 기분이 탁 트일 수가 없었다.
오늘은 멕시코 칸쿤.
“바다 진짜 예쁘다, 오빠.”
“그러게. 오늘따라 진짜 더 파랗게 보인다. 이렇게 진짜 같은 메타버스를 만들어 줬으니 넥시트 그놈한테 고마워해야 하나?”
“하하핫. 그러게. 그 벙커에만 계속 있을 생각 하니 끔찍하다.”
“그쪽 일 다 해결되면 이쪽에서 지내는 시간을 더 늘리자. 전혀 뭐 가상 현실처럼 느껴지는 것도 아닌데, 여기가 훨씬 살기 좋잖아.”
“그래, 그러자. 우리 오빠 여기선 평생 써도 다 못 쓸 만큼 돈도 많고.”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럼 그땐 우리 기면증 완치 판정 나겠네. 하하핫.”
“그러게.”
“그런데 오빠, 메타디펜스는 계속 몬스터 잡게 할 거야? 죽음이 인간과 연관되면 현실에 나타난다며. 그냥 이제 몬스터 그만 잡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디펜서들도 대부분 현실 인간이 아닐 텐데 뭐. 그리고 레온이를 생각해봐. 현실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생각하는 거, 사는 건 다 똑같지 않아? 그러면 여기 사는 사람들도 잘 지내긴 해야지.”
“가상 인물인데도?”
“그게 뭐 중요해? 자기 의지를 가지고 다들 움직이잖아. 레온이 봐. 지금도 현실 세계에 가서 숲 복원시키느라 고생하고 있잖아. 레온이가 어디 NPC 같아? 그냥 사람 같지.”
“그건 그래. 사실 여기 해변에 있는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긴 해. 저기 웃으면서 뛰어다니는 애들 좀 봐.”
“응. 굳이 우리 둘이 설치고 다녀서 여기 몬스터들을 죄다 현실 세계에다가 옮겨놓을 필요는 없지만, 메타디펜스는 그대로 두는 게 나을 거 같아.”
“어렵다. 현실이니 메타버스니 하는 거.”
“난 그냥 우리 남은 인생이 두 배로 늘었다고 생각해. 이제 자는 시간 없이 양쪽에서 다 생활하는 거잖아.”
“그러네. 배고프다. 이제 타코 먹으러 가자, 오빠.”
“가자. 레스토랑으로 모실까요, 길거리 타코집으로 모실까요?”
“길거리!”
“역시.”
* * *
같은 시간. 2126년 지구.
“D-28 구역 괴생명체 출현!”
모니터링 요원의 외침에 허염환이 고개를 돌렸다.
“화면 띄워보세요.”
“여기 있습니다.”
허염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불사…인?”
모니터에는 금속 신체를 번쩍번쩍 빛내는 불사인 세 명이 서 있는 모습이 비쳤다.
세 불사인은 당장 어떤 행동을 취하지는 않고 자기들끼리 대화를 주고받으며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방위군은?”
“이동 중입니다!”
“다른 출현은 없고?”
“아직 없습니다. 저들이 유일합니다!”
“김수호 대표를 깨울까요?”
“아직. 평범한 불사인 셋이라면 방위군의 화력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그래도…….”
“혹시 정찰이나 염탐을 온 거라면 우리 전력을 다 드러낼 필요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옆에 있던 다른 조직원이 허염환에게 물었다.
“염탐이요? 그럼 저놈들이 다시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도 있단 말입니까? 이미 한 번 죽었던 놈들인데?”
“아무것도 모르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을 뿐입니다. 일단은 지켜보죠. 딱 봐도 마법사 하나에 기사 둘. 파티를 맞춰서 넘어왔잖습니까.”
“결국 넘어오는군요. 제대로 된 지적 생명체. 그것도 불사인이라니…….”
“최악의 상황만 아니면 좋을 텐데.”
“최악의 상황은 뭡니까?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놈들이 한꺼번에 넘어오는 겁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더 최악은… 넥시트가 저들과 소통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지요.”
“…아.”
모니터를 지켜보던 요원이 소리쳤다.
“움직입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지하 벙커는 원활한 공기 흐름을 위해 층고가 높게 지어져 있었다. 덕분에 불사인들은 벙커에서도 쉽게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목이 꺾이긴 했지만 히드라도 벙커 안에 쭈그려 앉을 수 있는 높이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바깥 환경을 체크해 보려고 하는 건가? 체크해 봐야 넘어오기 싫어질 뿐일 텐데.”
그때 막 상황실로 들어오던 레온이 말했다.
“아니요.”
레온의 목소리에 허염환이 뒤를 돌아보았다.
“저 혼자서도 지금 여기 농장에 싹을 틔웠어요. 시엠브레의 불사인 마법사들이 싹 넘어온다면 지상을 다시 초록빛으로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아요. 시간이 오래 걸릴 뿐. …그런데 저들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불사인이죠. 여긴 충분히 탐나는 곳일 거예요.”
그러는 사이 모니터 속 불사인들은 이미 계단실로 들어가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계단실은 바깥과는 달리 그들에겐 매우 비좁아 보였다.
지하 1층에 도달한 불사인들이 계단실을 빠져나오자 이미 엘리베이터로 이동한 방위군이 계단실 입구를 포위한 상태였다.
맨 뒤에 있던 마법사의 지팡이에서 두 갈래 푸른 빛이 흘러나와 앞선 기사 둘의 몸에 닿았다.
버프 마법.
기사들은 바로 검기를 뽑아내고 방위군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피융, 피융. 타다다당, 타앙!
방위군들의 각종 무기가 불을 뿜었다.
구식 총탄은 불사인의 금속 신체를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고, 그나마 신식 레이저 탄은 불사인의 몸에 구멍을 뚫었다. 하지만 버프 마법에 의해 구멍은 금세 다시 메워졌다.
번쩍.
푸른빛이 나는 불사인의 검이 실내등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동시에 방위대 대여섯 명의 몸통이 갈라졌다.
당황한 방위군들이 주춤주춤 물러서는 사이, 두 불사인 기사는 더욱 기세를 높여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띵.
그때 화물용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방위군 지원 부대가 도착했다.
타다다당. 타당!
띵.
곧이어 다른 엘리베이터 문도 열렸다.
갑자기 여러 곳에서 쏟아지는 총격에 불사인 기사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어느새 재생되는 속도보다 몸에 구멍이 늘어가는 속도가 더 빨라져 갔다.
방위군이 조금씩 전진하며 포위망을 좁혔다.
그때.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불사인 기사들이 갑자기 천장을 향해 검기를 쏘아 보냈다.
콰드득!
제법 강한 기운이 천장을 강타했지만 깊은 흠집만이 생길 뿐이었다.
혹독한 바깥 환경으로부터 남은 인류를 보호하기 위한 지하 벙커의 외벽은 불사인들의 생각보다 두꺼웠다.
“밖으로 탈출하려고 한다! 계속 발포하라!”
방위군의 사격이 더욱 거세졌다.
이제 불사인 기사들은 대놓고 계속해서 천장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콰득, 콰드득.
지속된 공격에 천장이 점점 깊이 파여 들어갔다.
투두둑, 투둑.
천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건지 시멘트가 갈라지고 돌 무리가 조금씩 떨어져 내렸다.
그때 마법사의 버프 마법이 툭 끊어졌다.
연신 천장을 향해 칼질을 해대던 기사들이 당황해 뒤를 돌아보았다. 버프 마법이 끊기자 기사들의 몸은 방위군의 총격에 의해 순식간에 벌집이 되어 버렸다.
그사이 마법사의 지팡이에서 강렬한 붉은 빛이 쏘아져 나오더니 천장을 강타했다.
콰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지진이라도 난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사방으로 흩날린 먼지 때문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사방을 가득 메웠던 먼지가 차츰 가라앉았다. 방위군 수십 명이 비추는 랜턴 불빛들이 어지럽게 이곳저곳을 비추며 돌아다녔다.
이윽고 시야가 확보되자 방위군들은 이미 완전히 벌집이 되어 쓰러져 있는 불사인 기사 둘의 시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천장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외부의 자외선이 그대로 지하 1층으로 쏘아져 내려왔다. 그리고 마법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 *
나와 최수영은 벙커에 돌아오자마자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불사인이 넘어와?”
“응. 세 놈이 왔다가 기사 둘은 죽었고 마법사는 지상으로 달아났어.”
허염환과의 대화를 듣던 최수영이 입을 열었다.
“그놈들이라면 방호복 같은 거 없이도 지상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겠네?”
“아무래도 그렇겠지. 금속 피부가 뭐 자외선의 영향을 받진 않을 테니까.”
허염환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레온이 그렇게 말하던데? 저들은 이곳 지상에서도 충분히 살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겠지. 게다가 마법사들을 잔뜩 끌고 넘어오면 자기들이 사는 지역 정도는 숲 복원 마법으로 되살릴 수 있을걸?”
“맞아. 레온도 그렇게 얘기했어.”
최수영이 물었다.
“그럼 진짜 테라에서 죽은 불사인들이 여기 현실로 떼거리로 넘어올 수도 있다는 거야? 실체화되어 여기서 살아가려고?”
“세 놈만 보낸 거 보면 무슨 계획이 있는 것 같긴 하다. 게다가 기사 둘은 그냥 총알받이로 쓰고 마법사만 탈출했다며? 연합군과의 전쟁 때 시엠브레 마법사들이 기사를 대하던 방식 그대로인데.”
“어,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럼 사무엘 대마법사가 이 일을 지휘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허염환이 오른손으로 자기 턱을 쓰다듬었다.
“이제 진짜가 넘어오기 시작하려나 보군. 이러다 메타버스 속 가상 인물들한테 진짜 지구를 뺏길 수도 있겠는데.”
“아, 시엠브레 놈들. 겨우 처리했다 싶었더니 이제는 현실로 넘어와? 염환아, 메타버스에서 죽은 생명체들이 임시로 머무는 공간 같은 건 아직 전혀 알아낸 거 없어?”
“응, 전혀. 지금 우리 분석력으로는 아예 감조차 오지 않아.”
“그런 공간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치 않은 거고?”
“아니, 어딘가 모여 있다는 건 확실해졌지. 이번에 넘어온 세 놈은 누가 봐도 정찰대잖아.”
“그건 그렇군. 그럼 난 지상에 올라가서 그 마법사 놈을 한번 찾아볼게.”
“찾을 수 있겠어?”
“멀리 가지 않았을 거야.”
“그건 어떻게 알아?”
“내가 대마법사라면, 이곳 지구에 자리 잡을 장소를 인간들의 벙커와 멀리 떨어진 곳에 두지는 않을 거거든. 사무엘은 이미 지구인들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잘 알고 있어. 언제 벙커에서 기어 나와 자기들을 위협할지 모르는데 어디 먼 대륙에 가서 자리를 잡을 리는 없지. 아마 우리 머리 바로 위에 자리를 잡고는 지하에 있는 우리를 말려 죽이려고 들 거야.”
“…끔찍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