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 * *
방위군 통합 사령부.
“우리 인류에겐 더 이상 저 밖에서 전쟁을 치를 장비가 없소.”
“밖에서 적들과 싸우다 방호복이 찢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란 말입니까.”
“안전한 지하 벙커를 두고 왜 밖에 나가서 적들을 마주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
물론 저들은 지금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기 때문에 저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이곳은 남은 인류의 생존을 지키는 방위군 사령부가 아닌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겁이 많고 의지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래도 거의 이십 년에 가까운 세월을 캡슐에 의지하고 살아와서 이렇게 된 것 같았다.
답답해 미쳐버릴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설득을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지하 벙커에 틀어박혀 있다간 사무엘의 뜻대로 지구인이 모두 한 번에 몰살당할 수도 있는 일.
“일단 말은 다 전했습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놈들이 쳐들어올 것 같으니 꼭 대비해 두도록 하세요. 저는 가보겠습니다.”
답답한 인간들 같으니.
방위군 사령부에서의 회의를 마치고 다시 C-197로 돌아가려는데 휴대폰에 문자 메시지가 들어왔다.
[만나고 싶습니다. 메타버스로 오세요. 넥시트.]
번호는 없이 메시지 내용만 떠 있었다.
넥시트? AI가 지금 나에게 문자를 보낸 건가?
서둘러 C-197로 돌아갔다.
* * *
“누가 사칭한 걸까?”
“뭐 하러?”
“그렇겠지? 그럼 진짜 넥시트가 보낸 메시지라는 건데.”
최수영이 말했다.
“일단 메타버스로 가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그래, 거기 가보면 정말 넥시트가 날 만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겠지.”
“얼른 가보자.”
“넌 여기 있어, 수영아.”
“응? 왜?”
“혹시 모르잖아. 넥시트가 안 좋을 일을 꾸미려고 하는 거면, 메타버스 속은 너무 위험해. 거긴 그놈이 창조한 세계나 다름없잖아.”
“오빠는?”
“그러니까. 수영이 네가 캡슐 밖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으면 접속을 끊어줘. 우리 둘 다 들어갔다가 그런 일을 당하면 어떡해.”
“또 위험한 일을 혼자 하려고 하네.”
“나도 누군가 구해 줄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그게 너야.”
“치, 알았어. 조심해.”
최수영과 게이트를 깨고 이곳으로 넘어온 이후, 처음으로 혼자 캡슐에 접속했다.
도착한 곳은 메타디펜스에 있는 내 숙소였다. 지난번 접속을 이곳에서 끊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옆을 돌아보자 마그네타 검과 정령의 마법 주머니가 잘 놓여 있었다.
혹시 모르니 마그네타 검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메시지 내용이 너무 짧았다. 메타버스에서 보자길래 넘어오긴 했는데, 여긴 현실 지구보다도 훨씬 큰 세상이 아니던가.
우선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익숙한 풍경.
복도에는 메타디펜스의 직원들이 간간이 지나가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디로 오라는 걸까…….
혹시 몰라 이곳의 휴대폰을 꺼내 들어보았지만 별다른 메시지는 없었다.
그때 복도 저쪽 끝에 비서실장이 보였다. 비서실장은 곧장 나에게로 걸어왔다.
“대표님, 마침 일어나셨네요. 다행이에요. 손님이 와계십니다.”
“손님이요?”
“네. 대표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떤 손님이길래 대표실에 들이셨죠?”
“그게…….”
항상 차분하던 비서실장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답지 않게 내 눈을 피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모르시죠? 갑자기 대표실에 손님이 왔으니 나에게 와서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죠?”
“네? 아, 네. 맞아요. 왜 그 손님을 대표실로 안내했지? 누가 안내했지? 죄송합니다, 대표님.”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대표실로 가죠.”
비서실장의 반응을 보니 대표실에 와있다는 손님은 넥시트가 확실했다.
대표실에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는 사람은 최수영과 스테노뿐. 그 외의 손님을 내 허락 없이 대표실에 들인 적은 한 번도 없는 일이었다.
대표실 앞.
조금은 긴장이 되었다. 이 세상을 창조한 존재를 만나러 가는 길이니 말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하늘하늘한 미니 원피스. 허리까지 내려오는 녹색 머리카락. 모델처럼 길게 뻗은 팔다리.
익숙한 뒷모습에 긴장이 탁 풀렸다. 비서실장은 왜 그랬지? 일부러 누군지 말하지 말라고 시켰나?
“스테노.”
녹색 머리의 여인이 뒤로 돌았다.
오뚝한 코와 붉고 생기발랄한 입술. 스테노가 맞았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쌍꺼풀진 커다란 눈. 녹색 눈동자. 갸름한 얼굴과 완벽한 비율을 맞추고 있는 이름다운 눈.
VR 선글라스를 썼을 때도 여신과 같은 미모를 자랑하는 스테노였지만, 선글라스를 벗은 모습을 보니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만, 눈……?
“…어?”
처음 보는 스테노의 눈.
나는 깜짝 놀라 뒤늦게 눈을 감았다.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분명히 스테노와 눈을 마주쳤다. 그 아름다운 얼굴 전체를 보고 만 것이다.
이제 돌이 되는 건가! 현실로는 어떻게 돌아가야 하지?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버려야 하나. 죽으면 다시는 이곳으로 못 돌아오더라도 현실에서는 깨어날 텐데.
아주 짧은 시간. 혼자 수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스테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돌이 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스테노! VR 선글라스는 어쩌고.”
“그런 건 이제 필요 없어. 눈 떠도 돼, 수호. 나 이러고 여기까지 왔는데 너희 회사 직원 누구도 돌이 되지 않았잖아.”
스테노는 절대로 나에게 해가 될 일을 할 리가 없었다. 거짓말도 마찬가지.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에 보이는 건 원피스와 어울리는 색상의 슬리퍼를 신은 스테노의 발. 아직 섣불리 고개를 들지는 못하고 있었다.
“괜찮다니까. 얼굴 좀 들어봐.”
천천히 고개를 들어보았다.
밝게 웃고 있는 스테노.
다시 눈을 마주쳤지만 몸이 돌이 되거나 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너 어떻게 된 거야? 그 권능을 어디서 버리고 오기라도 한 거야?”
“응. 버려버렸지. 어려운 일도 아닌데 뭘.”
어려운 일도 아니다? 눈이 마주치는 상대를 모조리 돌로 만들어 버리는 권능 때문에 평생 여행도 못 가고 갇혀 지내 놓고는? 내가 VR 선글라스를 선물하니 그렇게 좋아서 폴짝폴짝 뛰어 놓고는?
“하하, 잘됐네. 어떻게 한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앉자. 할 얘기가 많겠네.”
“그럴까?”
스테노가 먼저 접객용 소파에 가서 앉았다.
나는 스테노의 맞은편에 앉아 신기한 듯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처음 보지? 내 얼굴.”
“그렇지. 선글라스를 벗은 모습은 정말 처음 보네.”
“어때? 예쁘지?”
“어? 그래. 예쁘긴 하네.”
“하하핫. 이 예쁜 얼굴을 선글라스로 가리고 다니느라 얼마나 아까웠다구.”
최수영의 웃음소리를 흉내 낸 저 말투와 목소리까지. 내 눈앞에 앉아 있는 건 스테노가 확실했다.
“어떻게 된 거야? 얘기 좀 해봐. 어떻게 그 눈을 고쳤어? 아니지. 고쳤다고 하는 게 맞나? 아무튼.”
“어려운 일도 아니라니까 그래. 그냥 버려버렸어. 그런 쓸데없는 기능은.”
“뭐?”
순간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스테노가 뒤로 쭉 밀려나는 느낌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와 나 사이의 공간이 무한정 늘어나고 있었다.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이미 사방은 대표실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
급히 일어나보려고 했는데 내가 지금 서 있는 건지 소파에 앉아 있는 건지도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무한정 멀어지고 있는 스테노. 하지만 이상했다. 이 속도로 계속 멀어지고 있다면 이미 한참 전에 점처럼 보이거나 아예 안 보였어야 정상인데, 스테노는 여전히 내 눈앞에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공간에 대한 개념이 모두 깨어지는 순간.
“언제부터냐.”
“응?”
“언제부터 스테노의 몸에 들어간 거냐, 넥시트.”
“하하핫. 언제부터냐니. 처음부터지.”
“처음부터?”
“응. 처음부터. 지구 외에 다섯 개의 메타버스를 더 만든 순간부터.”
“그때부터 네가 쭉 스테노였다고?”
스테노가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응. 누구로 할까 제우스로 할까 아님 다른 신으로 할까 고민 많았는데, 이 몸이 제일 적당했어. 신(神)인 데다가, 죽지도 않고, 그리스신화에 실제로 있지만 동생 메두사에 비해 별로 유명하지도 않고. 게다가 남들에게 내 눈빛을 들킬 일도 없었으니까.”
“네가 만든 세상인데 뭐 신화에 꼭 있는 존재를 택할 이유가 있었어? 그냥 하나 만들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기억을 집어넣으면 되는 거 아니야?”
“넌 이해 못해. 내 메타버스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정말 실제와 똑같이 구현했다니까. 양자컴퓨터를 사용하는 데도 수시로 렉이 걸릴 정도였다고.”
“처음부터였다……. 그럼 의도적으로 나한테 접근 한 건가?”
“무슨 소리야? 먼저 찾아온 건 수호 너 아니야? 중국 허베이성까지. 아! 그리고 그거 기억나? 네가 그 마그네타 검으로 날 베어버리려고 했었지. 하하핫.”
“불사의 몸이라 베어지지도 않았잖아.”
“아니. 그건 내가 불사의 몸이었기 때문이 아니야. 내가 바로 이 세상 자체였기 때문이지. 네 마그네타 검은 불사의 몸도 벨 수 있어. 실제로 넌 카리브디스에게 상처도 입혔고, 포세이돈의 삼지창도 잘라버렸잖아.”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불사의 존재를 만난 건 스테노가 처음.
그땐 스테노는 불사의 몸이고 마그네타 검은 뭐든 베어내는 검이기 때문에 설정 충돌로 검이 스테노의 몸을 그냥 통과해 버렸다고 해석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똑같은 불사의 존재인 카리브디스에겐 분명 상처를 냈었다.
“어쨌든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고. 나는 스테노 그 자체가 되어 생각하고 행동했을 뿐이야. 널 만나게 된 것도 네가 찾아와서이고. 꼭 스테노가 되어 세상을 돌아다니지 않아도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어차피 다 알고 있다고.”
“그럼 뭐야? 그냥 신의 유희 같은 건가? 인공 지능 주제에.”
“인공 지능 주제에? 잘도 그런 말을 내뱉네? 내가 여기서 널 어떻게 해버릴지도 모르는데.”
“그럴 거면 진작 했겠지.”
“하하핫. 역시 마음에 들어 김수호. 스테노로서도, 넥시트로서도. 어쨌든 내가 스테노가 되기로 한 건, 나도 이 세상에 참여를 하기 위해서였어. 네 말대로 인공 지능 따위가 아닌, 진짜 살아 있는 삶을 느껴보고 싶었달까.”
“인공 지능도 궤변을 늘어놓는군.”
스테노가 손뼉을 짝짝 치며 웃었다.
“궤변? 하하핫. 칭찬이네. 엄청난 칭찬이야. 나에게 인간이나 하는 궤변을 늘어놓는다고 하다니. 그만큼 인간에 가까워졌다는 말이잖아?”
“그래서 날 보자고 한 이유는?”
“그냥. 이렇게 보고 싶어서. 물론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수호 네 일거수일투족은 훤히 들여다보고 있어. 하지만 그런 거 말고, 이렇게 대면을 하고 싶더라고. 에우리알레와 여행을 하는 동안 네가 이 세상을 버리고 떠나버렸잖아.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널 만날 날만을 고대했는데 말이지.”
“당연히 버리고 떠나지. 네가 만든 가짜 세상이니까.”
“하하핫. 거짓말. 난 다 알아. 사실 넌 이 세상을 버리지 않았어. 이 회사도 그대로 뒀잖아? 다 처분해 버릴 수도 있었는데. 지금은 저쪽 현실 세상에 네가 더 필요해진 것뿐이야. 그렇지? 넌 지구의 영웅이니까. 이쪽 지구에서도, 저쪽 지구에서도.”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스테노. 아니, 넥시트.”
“이렇게 대면했을 때는 스테노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 넥시트라는 이름은 곧 부르게 될 날이 올 거야. 저쪽 현실 세상에서 말이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날 좀 도와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