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뭐? 마물들을 한데 모아?”
“응.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현실로 넘어올 방법을 찾았나 봐.”
“아니, 그나저나 스테노 너는 진짜 모르는 게 확실해? 죽은 생명체들이 어떻게 현실에 나타나는지?”
“모른다니까. 여러 번 설명했잖아. 이 우유부단한 성격이 생긴 것도 그거 때문이라고.”
“이 메타버스 세상을 만든 너도 모르는 걸 마물들이 알아냈다는 게 말이 돼?”
“그러게 말이야. 사실 메타버스에서 죽은 생명체들이 가는 곳은 나는 만든 적이 없거든. 그래서 몰라. 어디에 모이는지만 겨우 알아냈을 뿐이야.”
“저승 같은 건 만든 적이 없는데 저절로 생겼다? 그리고 거기서 현실로 넘어오는 방법이 생기고?”
“응.”
“마물들이 한번에 넘어온다니……. 대충 떠올려 봐도 내가 꽤 많이 죽였는데. 거기에 귀마왕 귀자마모까지 같이 오면 나랑 수영이 만으로는 좀 벅찰 수도 있겠는데.”
“그래서 미리 불러서 경고해 주는 거야.”
“아주 고오맙습니다.”
최수영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귀자마모는 그 뭐냐, 마족 고유의 힘인가 하는 것도 오빠한테 뺏겼잖아. 아주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겠는데?”
“그렇겠지. 그러고 보니 귀마왕은 천마가 죽였는데? 왜 현실에 나타나는 거야?”
스테노가 대답했다.
“꼭 누가 죽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야. 어쨌든 그 죽음에 너희들이 깊은 연관이 있었다는 게 중요하지.”
“그럼 마그네타 검을 현실에 보낼 방법이나 좀 연구해 봐. 동시 통역기는 보내줬잖아.”
“노력 중이야. 내가 처음 만들 때 설정을 너무 과도하게 넣어 놔서 쉽지 않아. 알잖아? 블랙홀이 되기 직전인 별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
“네가 벌인 일이니 수습은 해야 할 거 아니야. 마물들이 떼로 넘어온다는데.”
“수영이 활은 조만간 현실로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최수영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진짜? 내 활 현실에서도 쓸 수 있어?”
“그건 연산이 거의 끝나 가. 조만간 소환될 거야.”
“이제 좀 싸울 맛이 나겠네.”
마물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새 스테이크 세 접시가 모두 비워졌다.
“어쨌든 언제 나타날지도 어디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거지? 조만간 나타나긴 할 거고.”
“응. 오래지 않아 현실에 나타나긴 할 것 같아.”
“알았어. 뭐 어쩌겠어, 붙어봐야지.”
“그리고 수호, 방위군을 너무 미워하지 마.”
“그건 무슨 말이야?”
“알잖아. 지금 현실의 인류는 너무 약해져 있어. 소행성 충돌 이후 이 혹독한 환경에서 겨우 목숨을 지켜 나가고 있을 뿐이야. 인류의 멸종을 막기 위해서지.”
“나도 알아. 그쪽의 기억도 다 가지고 있다고.”
“그래도 넌 이곳에서의 기억 때문에 현실 인간들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어. 아마 답답하겠지.”
“그건 스테노 네 말이 맞다. 답답해 죽겠거든.”
“실체화되어 나타나는 괴생명체가 없어도 하루하루가 힘든 사람들이야. 네가 이해해.”
“AI가 인간한테 인간을 이해하라고 설득하는 상황인 거야 지금?”
“응. 어쨌든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는 너희 둘이 적들을 다 물리쳐 주는 수밖에 없어. 다른 인간들에겐 너무 기대하지 마.”
“결국 수영이랑 나랑 둘이 알아서 해라?”
“어쩔 수 없잖아. 안 그러면 인류는 결국 멸종하고 말 거야.”
* * *
며칠 후 최수영의 활이 현실로 소환되었다.
그사이 허염환의 조직에서는 제법 근사한 검 하나를 만들어서 나에게 주었다.
“크기나 모양은 최대한 비슷하게 해봤는데, 기능은 어떻게 흉내 내 볼 수가 없네.”
그래도 제법 단단해 보이는 검이었다.
“이 정도도 훌륭해. 몽둥이 들고 다닐 때보단 훨씬 낫겠어.”
검을 가볍게 휘둘러보았다. 허염환의 말대로 마그네타 검과 제법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삐, 삐.
갑자기 벙커 전체에 경보음이 울렸다.
“염환아, 이건 무슨 경보야? 이 벙커에도 괴생명체가 나타난 거야?”
“아니야. 불사인 마법사들 때문에 지상에 새로 설치한 센서가 마나의 이상 움직임을 감지한 거야.”
“그런 걸 또 언제 설치했어?”
“방위군이 저 모양인데 우리라도 대비를 해야 할 거 아니야. 어서 상황실로 가보자.”
허염환, 최수영과 함께 상황실에 도착하자 이미 상황실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엄청난 반응입니다! 지상의 마나 전체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불사인들의 소환진이 완성된 건가?”
“마법사들의 소환진 설치 반응은 없었습니다!”
“그럼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조직원들의 반응을 살펴보던 허염환이 물었다.
“놈들이 온 건가?”
“마족 말이지?”
“응.”
“그런 것 같다. 밖으로 나가봐야겠다.”
“일단 방위군한테도 알릴게.”
어느새 최수영이 활을 가지고 와 옆에 섰다.
“가자.”
“응, 오빠.”
최수영과 함께 지상으로 올라오자 마나를 못 느끼는 사람도 알아챌 만큼 거대한 마나 파동이 느껴졌다.
확실히 인간 마법사가 사용하는 마법진에서 느껴지는 파동과는 다른 것이었다.
잠시 후, 수십 개의 차원 이동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어떤 건 지상에, 어떤 건 공중에 뜬 채 빠르게 완성되어갔다.
귀마왕이 메타디펜스 본사에 쳐들어왔을 때 보았던 그 차원 이동진이었다.
“이제 나온다.”
최수영이 활시위를 두어 번 퉁퉁 튕기며 준비했다.
쿠구구.
수십 개의 차원 이동진이 진동하기 시작하자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땅도 같이 요동쳤다.
날개 달린 마물 하나가 차원 이동진을 뚫고 하늘로 솟았다. 그놈을 시작으로 동시에 마물들이 실체화되어 현실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쐐애액.
최수영이 날린 화살이 날개 달린 마물의 목을 꿰뚫었다.
“키에엑!”
나도 검을 빼 들고 놈들에게 달려들 준비를 했다.
“가까이 오지 말고 여기서 엄호해 줘.”
“알았어.”
빠르게 몸을 날려 마물들이 튀어나오는 중심으로 이동했다.
새로 얻은 검에서 검기를 뽑아내 놈들을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검이 호선을 그릴 때마다 마물 서너 마리의 몸이 반으로 갈라져 나갔다.
하지만 수십 개의 차원 이동진에서 놈들이 나오는 속도는 훨씬 빨랐다.
순식간에 사방이 마물로 가득 찼다.
검기를 길게 뽑아내 크게 휘둘렀다. 검기는 예전처럼 길게 뽑아져 나왔지만, 마그네타 검과는 다르게 검에서 멀어질수록 검기의 위력이 감소되었다.
가까운 마물들은 베어졌지만 먼 곳의 마물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검기를 막아냈다.
놈들을 다 처리하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필요할 것 같았다. 게다가 귀마왕과 귀자마모를 상대하기 위해선 체력도 아껴둬야 했다.
당장은 상대할 만하겠지만 체력이 소진된 상태에서 둘의 합공을 받아내야 한다면 상황이 쉽지 않을 수도 있었다.
쿠우우.
강렬한 마기가 내 옆구리를 노리고 쏘아져 들어왔다.
급히 검을 휘둘러 마기를 베어냈다. 마기가 날아온 방향을 보자 귀마왕이 나를 노려보고 서 있었다.
귀마왕이 있는 곳으로 검을 힘껏 휘둘렀지만, 놈은 공간 뒤로 몸을 숨겼다. 저 비겁한 싸움 방식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마물들의 시체가 거대한 언덕이 되어 쌓일 때쯤, 특이한 현상이 발견됐다.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차원 이동진에서 마물이 아닌 생명체들도 간간이 나오고 있었다. 다양한 행성의 생명체들이 하나씩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나오자마자 마물들과 함께 몸이 절반으로 갈라진 탓에 소속은 물어보지 못했지만 불사인도 한 명 포함되어 있었다.
어쨌든 튀어나오는 놈들 대부분은 마물. 마물의 시체가 점점 쌓여 산을 이뤄 가고 있었다.
귀자마모는 아직 어디 있는지 나타나지도 않았고, 귀마왕 역시 간간이 마기를 날려 보낼 뿐 금세 공간 너머로 몸을 숨겼다.
이대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최수영의 화살이 날아드는 간격도 점점 넓어지고 있었고, 나 역시 움직임이 꽤나 둔해진 상태.
하지만 마물들은 여전히 새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콰광, 쾅!
그때 저 멀리서 포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근처 마물 몇 놈을 정리한 뒤 몸을 높이 띄워보자 한 무리의 방위군이 로켓포를 쏘며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숫자는 백여 명. 모두 방호복을 잘 챙겨입은 채였다.
강력한 폭발에 마물들의 관심이 방위군 쪽으로 쏠렸다.
연거푸 로켓포를 날리던 방위군은 이제 개인 화기를 꺼내 마물들에게 난사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다른 벙커 쪽에서도 방위군이 나와 이곳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넥시트 네가 틀렸군. 이곳의 인간들도 그렇게 나약하지만은 않아.”
마물들의 관심이 이쪽저쪽으로 분산되자 조금 체력을 아끼며 놈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상황은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체력을 조금 더 아끼게 될 수 있다뿐이지 이미 빠져 버린 체력을 보충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때 저 멀리 귀마왕과 귀자마모가 보였다. 둘이 나란히 공중에 떠 있는 게 무슨 수작을 부리는구나 싶어 다가가려는데 마물 시체 산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제기랄.”
강화도에서 봤던 거대 마물을 탄생시키려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마물들을 이만큼이나 희생시킨 거겠지. 발밑의 마물 사체들을 보니 지난번 거대 마물보다 훨씬 큰 놈이 만들어질 것 같았다.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몇 구의 마물 사체가 공중으로 떠올라 달라붙더니, 그게 구심점이 되어 빠르게 마물 시체가 모여들었다.
잘린 팔이 머리에 가 달라붙고 그 위에 다시 다른 놈의 몸통이 가서 달라붙었다.
더 커지기 전에 검으로 완성 전의 거대 마물을 여러 차례 베어봤지만 잠깐뿐. 잘린 조각들은 바로 다시 합쳐지며 거대 마물의 몸집을 키워 나갔다.
산처럼 쌓였던 마물 시체가 이제 산처럼 거대한 거인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방위군의 화력이 거대 마물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놈의 몸은 뚫리고 부서져도 금세 다시 모여들어 달라붙었다.
강화도에서는 천마가 귀마왕을 죽이면서 거대 마물도 그 힘을 잃었었는데. 아쉽게도 오늘은 천마는커녕 메타디펜스의 디펜서들도 없는 상황. 방위군이 화력 지원을 해주고는 있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의미 없는 칼질을 접어두고 양손에 내력을 모아 놈에게 날려 보내기 시작했다.
자르는 공격보다는 범위가 넓고 큰 내력 공격이 조금은 더 먹혀들었다.
하지만 내력에도 한계는 있는 법. 무턱대고 이렇게 계속 발산하다가는 정작 귀마왕과 싸울 땐 내력이 남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제 차원 이동진에서 튀어나오는 마물들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아마도 내올 놈들은 거의 다 나온 것이리라.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거대 괴물과 계속 소모전을 펼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어떻게든 귀마왕과 귀자마모에게 접근해 놈들과 결판을 내야 했다.
하지만 다가가려고 하면 공간 너머로 몸을 숨기는 놈들과 수시로 내 사각지대를 노리고 공격해 들어오는 마물들. 게다가 패도 패도 다시 재생하는 저 거대 마물.
귀마왕에게 접근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그때, 차원 이동진에서 사람의 형태를 한 것이 하나 튀어나왔다.
거대 마물을 상대하며 귀마왕의 위치를 찾느라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는데, 사람의 형태를 한 것은 이동진에서 빠져나와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걸 보니 평범한 인간은 아닐 텐데. 적인가, 아군인가.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귀를 통하지 않고 머리로 바로 들어오는 목소리.
- 수호 네놈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