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 * *
전음?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
내력을 세게 내뿜으며 주변 마물들을 모두 밀쳐낸 후 고개를 들어보았다.
붉은 장삼을 입은 노인이 공중에 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엔 희미한 미소.
“천마 할배!”
붉은 장삼의 노인이 순식간에 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수호, 네놈이 맞구나.”
“천마 할배가 여긴 어떻게?”
“마귀놈들이 뭔가를 꾸미는 것 같아서 들여다보고 있다가 차원 너머로 엄청난 기운이 느껴지길래 넘어와 봤다. 혹시 네놈인가 했는데 네놈이 맞구나.”
“저 너머에서 제 기운을 느끼고 넘어오셨다고요? 역시 천마 할배이긴 하네.”
“저승에서 마귀 놈들이 뭘 꾸미나 했더니 차원문을 열어 다 넘어가지 뭐냐. 그래서 잘됐구나 하고 놔뒀는데 네놈 때문에 궁금증을 못 이기고 넘어오고 말았다.”
“잘 오셨어요, 할배.”
펑, 퍼엉!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마물들은 우리에게 다가왔고, 천마 할배와 내 손에서 번갈아 나가는 장력에 맞아 계속 터져 나갔다.
“저쪽에 수영이도 있어요. 같이 가요.”
“그래? 어디 가보자꾸나. 오랜만이군.”
“아니, 지금 저승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너무 차분한 거 아니에요?”
“있어 보니 저기든 거기든 여기든 별다른 것이 없다.”
“저기 거기 여기요? 원래 있던 곳과 여기가 다른 곳이라는 건 알고 계세요?”
“느낌이 이렇게 다른데 어떻게 모르겠느냐.”
“역시 대단해요, 할배.”
천마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그 와중에도 오른손은 쉬지 않고 다가오는 마물들을 날려버리고 있었다.
“왜 웃으세요?”
“누가 누구보고 대단하다고 하는 것이냐. 네놈은 아예 괴물이 되어 있지 않느냐. 등선을 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군.”
“등선은커녕 이쪽 세상에 또 붙잡혀 와서 이 짓을 또 하고 있네요.”
“그것이 너의 숙명인 모양이구나.”
나와 천마는 담소를 나누면서 어렵지 않게 마물들을 뚫고 최수영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천마 어르신!”
“잘 있었느냐.”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수호 이놈하고 똑같은 걸 묻는군. 마귀 놈들이 만든 차원문을 타고 넘어왔다.”
“대단하세요!”
천마가 천천히 하늘과 주변 풍경을 돌아본 후 말했다.
“이번에 너희들이 지키고 있는 세상은 환경이 그다지 좋지가 않구나.”
“멸망 직전이죠, 뭐.”
“자, 그럼 저 마귀 놈들이나 처리를 좀 해볼까? 이번엔 수호 네놈이 귀마왕인가 하는 놈을 맡아라. 내가 저 거대 마물하고 나머지 놈들을 맡고 있으마.”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좋아요, 할배. 그럼 여기 좀 맡아 주세요. 저는 귀마왕이랑 귀자마모 잡고 올게요.”
“귀자마모는 또 무엇이냐.”
“귀마왕의 엄마이자 귀마왕의 부인이라고 설명하면 맞나 그래요.”
“마귀 놈들답군.”
“그럼 부탁합니다!”
나는 빠르게 몸을 날려 귀마왕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 * *
갑자기 나타난 존재에 귀마왕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천마.
태어나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한 존재. 그리고 자신을 죽게 만든 존재.
귀자마모가 물었다.
“왜 그러는 것이냐?”
“날 죽게 만들었던 놈. 그놈이 나타났다.”
“날 죽인 놈에 이어 널 죽인 놈까지 한자리에 나타났구나. 기회를 봐서 한 놈씩 확실히 처리해야겠군.”
귀자마모가 손가락을 튕기자 곳곳에 흩어져 있던 십이호마가 옆에 나타났다.
“공간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한 번에 몰아친다.”
“그럴 필요 없겠군. 한 놈이 이쪽으로 곧장 오는 것 같은데?”
귀자마모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날 죽인 놈이구나. 제 발로 찾아오는군. 그런데 우리가 이곳에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오고 있는 것이지? 여긴 분명 공간 너머인데.”
걸리적거리는 마물들을 펑펑 터뜨리며 달려오는 인간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왔다.
“십이호마! 앞을 막아라!”
강력한 열두 마물, 십이호마가 귀마왕과 귀자마모의 앞을 막아섰다.
인간은 이제 바로 앞까지 도착한 상태. 양팔에 기운을 잔뜩 모은 인간이 내력을 뿜어냈다.
콰직, 콰지직.
공간의 벽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마, 말도 안 된다. 힘으로 공간을 깨부수다니? 여기 있는다고 안전하지 않겠군. 귀마왕! 밖으로 나간다!”
“알았다.”
귀자마모, 귀마왕, 십이호마가 공간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기다렸다는 듯 인간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제 머리통만 한 마법구를 여러 개 만들어 동시에 십이호마에게 쏘아 보냈다.
단 한 차례의 격돌이었는데 십이호마 중 절반이 전투 불능 상태에 빠져 버렸다.
귀마왕이 서둘러 마기를 모아 인간에게 내뿜었다. 놀랍게도 인간은 귀마왕의 마기를 정면으로 받아냈다.
남은 십이호마도 날카로운 발톱을 앞세워 공격해 들어갔다.
인간은 놀라운 몸놀림으로 십이호마의 공격을 피하거나 흘려내며 마물을 하나씩 처리해 나갔다. 귀마왕과 귀자마모조차 눈으로 좇기도 힘든 움직임이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십이호마는 모두 정리되었다.
* * *
십이호마로 추측되는 마물들을 모두 처리하자 귀마왕이 본격적으로 육탄전을 벌여왔다.
예전처럼 마음대로 공간을 열고 뒤편으로 사라지며 나타나길 반복했다.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려는 틈을 노려 놈을 붙잡으려 하면 귀자마모의 마기가 그 사이를 가로막았다.
아무튼 참 상대하기 곤란한 놈들이었다.
쐐액.
그때 화살 한 발이 날아와 공간 뒤로 숨으려는 귀마왕에게 꽂혔다.
놈이 잠시 움찔한 틈을 놓치지 않고 곧장 팔을 뻗어 놈을 이쪽 공간으로 끄집어내었다.
놀란 귀마왕이 내 팔을 뿌리치려는 사이, 잡고 있는 손을 통해 내력을 밀어 넣었다.
천마가 귀마왕을 해치웠을 때와 같은 방식의 내력 대결이었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여긴 귀자마모라는 적이 하나 더 있다는 것.
그리고 천마와 나의 다른 점이 있다면, 나에게는 내력대결을 하면서도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마나가 있다는 것.
마족이라지만 내력 대결 중에 외부의 자극이 가해지면 어떻게 되는지 뻔히 알 텐데 귀자마모가 거침없이 마기를 날려 보냈다.
귀마왕의 안위는 관심 없고, 내력 대결을 하는 지금이 나를 없앨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콰앙!
두껍게 펼쳐낸 실드와 귀자마모의 마기가 부딪쳤다.
쿠드드드.
귀자마모가 마기를 더욱 끌어올렸다. 아무래도 날 없앨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쐐액.
귀자마모에게 최수영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귀자마모는 별수 없이 마기를 거둬들이고 화살을 피해야 했다.
최수영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왔다.
“여기 와도 돼? 거대 마물은?”
“천마랑 방위군이 알아서 막고 있어. 천마 할배는 죽었다 살아나더니 더 세진 것 같더라.”
나와 대화를 하면서도 최수영은 귀자마모에게 계속해서 화살을 날렸다.
그리고 귀마왕은 밀려드는 내 내력을 겨우 막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방어는 뚫릴 것이다.
“조금만 더 시간 끌어 줘, 수영아. 여긴 끝나가.”
내 말을 들은 귀마왕의 눈이 가늘게 떠졌지만 놈에겐 뭐라 대꾸할 여유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끄아아!”
내력이 밀려들기 시작한 건지 귀마왕이 비명을 질러대었다.
최수영은 내 옆에 바싹 붙어 귀자마모를 몰아붙였고, 난 실드를 펼쳐 귀자마모의 마기를 막아냈다.
드드드드.
귀마왕의 몸이 강하게 진동하며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퍼엉!
밀려드는 내력을 이겨내지 못한 귀마왕의 몸이 그대로 터지고 말았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귀자마모를 바라보았다.
“다음은 너다.”
깜짝 놀란 귀자마모가 공간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고는 차원 이동진이 있는 쪽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어딜 도망가려고!”
한발 앞서 귀자마모의 이동 경로를 따라잡은 후 빈 공간을 향해 내력을 가득 실은 주먹을 내뻗었다.
콰앙!
아무것도 없었다면 그냥 허공을 지나갔어야 할 주먹인데, 귀자마모가 만든 공간의 벽과 부딪치며 커다란 충격음을 냈다.
한 번 더.
콰앙!
이번엔 공간의 벽이 완전히 무너지며 귀자마모의 모습이 드러났다.
콰악.
나는 오른손으로 귀자마모의 목을 꽉 잡았다.
“크악!”
귀자마모는 짧게 소리치다가 이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컥컥대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귀자마모의 목을 잡은 손에 점점 더 강한 내력과 힘이 들어갔다.
귀자마모는 내 손에 매달린 채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사이 천마가 옆으로 다가왔다.
“거대 마물은요?”
“네놈이 귀마왕을 끝내지 않았느냐. 거대 마물은 이미 사라졌다.”
천마가 고개를 돌려 고통스러워하는 귀자마모를 바라보았다.
“이년이 마물들의 진짜 왕인가?”
“그런 것 같아요. 마물을 만들어 내는 걸 본 적이 있거든요.”
“뭘 시간을 끌고 있어. 빨리 끝내라.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하고 싶구나.”
나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동시에 내력도 강하게 밀어 넣었다.
“크극, 큭!”
“저승엔 술이 없나 보죠?”
“술뿐이냐.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 계속 늘어나는 망자(亡者)뿐.”
귀자마모 역시 귀마왕처럼 밀려드는 내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몸이 터져 버렸다.
* * *
C-197 구역. 휴게실.
“천마 할배가 제때 나타나 주지 않았으면 좀 애를 먹을 뻔했어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할배.”
“안 그래도 저승에서도 마물 놈들을 한번 쓸어버릴까 하고 고민하던 차였다.”
“그리고,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네놈의 입에서 어울리지 않게 그런 소리도 나오는구나.”
최수영이 옆에서 거들었다.
“아니에요. 오빠가 천마 어르신 얘기를 얼마나 자주 했다고요. 분명 보고 싶어 했을 거예요.”
나도 모르게 최수영에게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 뭐. 보고 싶은 정도까진 아니었고.”
다행히 천마도 이런 낯간지러운 대화는 싫은지 화제를 돌려주었다.
“그런데 술 가지러 간 놈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것이냐? 뭐 얼마나 좋은 걸 내오려고 하는 것이야.”
“여기서 술을 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알아요? 여기 사람들은 밥도 제대로 못 먹어서 캡슐에 들어가서 영양 보충을 한다고요.”
“그러냐? 불쌍한 인간들이군.”
그때 마침 허염환이 오래돼 보이는 양주 한 병을 들고 들어왔다.
“겨우 한 병 구했다, 수호야.”
천마가 대신 대답했다.
“이것이 전부이냐?”
“네. 당장 구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었고, 조직원들에게 수소문을 좀 하라 했으니 조만간 또 구해 볼 수 있긴 할 겁니다.”
“이거 여긴 안 되겠군. 무림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허염환이 건넨 양주 뚜껑을 따며 무림 얘기를 꺼낸 천마에게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거긴 가상 세계였다는 말을 해주긴 해야 할 텐데.
천마는 자신의 잔에 술을 채운 후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리고는 바로 다시 잔을 채웠다. 그 후에야 내 잔에도 술을 한잔 따라주었다.
술잔을 들어 건배를 권한 후 다시 양주를 한입에 털어 넣은 천마가 물었다.
“그래, 여기가 진짜 세상인 게냐?”